꽃은 무자비한 봄의 여왕! 기상이변으로 영 난처한 봄이 계속되고 있지만 꽃은 아랑곳 않고 봄을 피운다. 노랗게 물든 구례와 온통 하얀 광양, 벚꽃을 준비하는 하동과 붉은 꽃이 툭툭 떨어져 내리던 여수로. 꽃을 찾아 떠난 남쪽 여행.

광양 매화마을에 봄이 도착했다. 햇살의 온도가 달라지는 순간, 섬진강은 매화꽃으로 온통 하얗게 뒤덮인다.

1, 2. 산수유의 꽃송이는 아주 작지만 그 꽃송이가 모여 만드는 풍경은 이렇듯 풍요롭다. 구례 산수유 마을은 가장 먼저 봄이 찾아오는 곳 중 하나다.


거짓말 같은 봄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할수록 불안과 초조는 짙어졌다. 분명 꽃이 피었다고 했는데, 구례에는 산수유가 피고 광양에는 매화가 피었다고 했는데 서울에서 이미 한참 남쪽이었는데도 꽃은커녕 파란 풀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평일 낮, 도로는 한산했고 차는 굽이굽이 굽은 길을 최대 속도로 달렸지만 어디가 봄인가 싶어서 억울해지려던 그때, 노란 꽃이 보였다. 거짓말 같다는 건 이런 풍경을 두고 말하는 것일 거다. 정확히 남원 ‘이몽룡 도로’를 타고 가다가 만난 ‘춘향 터널’을 중심으로 계절이 달라졌다면 설명이 될까? 그 작은 터널의 저쪽은 겨울나라였고 터널의 이쪽은 봄나라였다. 햇살은 겨우내 쬔 그 어떤 난로보다 따뜻했고 그 길을 따라 드문드문 노란 점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온통 노란색으로 덮인 마을이 나왔다. 이 곳이 구례 산수유 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 봄이 가장 먼저 깃드는 마을이라는 수사는, 너무나 봄다운 이 노란 풍경 때문에 생겨났다. 작은 마을의 담벼락과 들에서 피어오르는 산수유는 멀리서 보면 마치 겨자를 골고루 바른 안개꽃처럼 보였다.

산수유 마을로 유명한 구례 산동면 중에서도 특히 상위마을, 반곡마을, 현천마을 등이 유명하다. 상위마을로 들어가는 하위마을 길목은 작은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을 어귀의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작은 우체국, 보건소, 목욕탕이 모여 있다. 왠지 정겨워서 볼일 없이도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다. 작은 건물 머리 위로 펼쳐지는 배경화면은 역시 모두 산수유다.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은 왜 산수유를 심었을까? 천년 전 중국 산동성 처녀가 지리산 자락의 한 마을로 시집와서 심은 산수유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도 ‘산동면’이라는 것이다. 봄이 오면 이 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래서 마을 어귀에는 커다란 장터가 세워지고 입구부터 플래카드가 내걸린다. ‘구례 산수유 축제’. 축제에 술과 음식이 빠질 수 없으니 지역 명물 막걸리가 도열하고, 빈대떡 지지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햇살을 타고 날아다닌다. 쿵짝쿵짝 걷게 만드는 트로트도 울려 퍼진다. 평일인 지금은 손님보다 상인이 더 많지만 아마 주말이 되면 온통 사람들로 들어찰 것이다. 그러니 꽃 여행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첫 번째 수칙은 주말을 피할 것.

오은 시인의 신작인 색 그림책 <너랑 나랑 노랑>은 시인의 색깔 사전으로 부를 만하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너랑 나랑 노랑’은 파울 클레의 <회전하는 집>에 바친 축사다. ‘너의 이름을 나직이 속삭여봐. 휘파람을 불어봐. 메아리를 쳐봐. 허밍으로 너를 표현해봐. 노래를 불러봐.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어봐. 너의 이름을 각각의 음표에 대입해봐. 노랗게 웃어봐. 감노랗게 감동해봐. 병아리처럼 삐죽거려봐. 너에게 스스로 주문을 걸어봐. 네가 커가는 상상을 해봐.’ 산수유 마을에서 책의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봤다. 시인의 낱말과 산수유의 노랑 송이가 신기하게 겹쳐지곤 했다.

3, 4. 하동 쌍계사에도 봄이 깃들었다. 봄이 완연해지면 늘 사람으로 북적여 조용한 구석이 없다.


화개장터 풍경


구례에서 화개장터로 이어지는 19번 도로는 ‘십리벚꽃길’로 유명하다. 벚꽃이 10리, 그러니까 오래된 벚나무 가로수가 4km나 이어지는 길이다. 기대만큼 실망도 큰 법이라고 하지만, 이 벚꽃길만은 예외라서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 4월 한철, 이 벚꽃길은 그대로 이정표가 되어서 내비게이션의 도움도 필요 없이 벚꽃을 따라가면 화개장터가 나오고 쌍계사가 나온다. 드문드문 어린 벚나무는 벌써 벚꽃을 다 피웠는데 수백년 묵은 벚나무는 아직 때가 이르다는 듯, 점잖게 그냥 서 있다. 열흘은 더 지나야 이곳은 제대로 벚꽃을 피울 것이다. 언젠가 늦은 봄날 이곳을 찾았었다. 벚꽃을 찾아온 사람들도 다 떠나버린 그때는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이 눈처럼 내렸다. 산수유로 시작해서 매화, 목련을 피우고 그들이 다 진 후에도 벚꽃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다. 꽃 여행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두 번째 수칙은 늦은 것 같더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 개화한 후로 꽃이 얼마나 오래 생명력을 유지하는지, 직접 보면 놀랄 것이다.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덕분에, 쌍계사도 화개장터도 여유가 있다. ‘벚꽃 축제’가 시작되면 이곳은 꽃만큼 사람도 많아진다. 라디오헤드를 모셔온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보다도 사람이 많고 차도 많다. 신라시대 때 창건한 쌍계사는 남도의 이름난 사찰 중 하나다. 특히 쌍계사는 일주문을 지나절 안으로 들어갈 때 두 번째로 지나는 금강문이 유명하다. 불법을 수호하고 더러움과 악을 물리치는 두 금강역사가 모셔져 있는데, 금강역사를 모시고 있는 금강문은 드물어서 문화재로 가치가 높고, 벽암스님이 현판의 글씨를 썼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나라연금강’ 왼쪽에 있는 것이 부처님에게 바짝 붙어, 부처님을 지키면서 비밀스러운 내용을 듣고자 했다는 ‘밀적금강’이다. 쌍계사는 산을 따라 층층이 사찰이 이어진다. 대웅전 마당에는 참배객 대신 검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학생이 더 많다. 티셔츠 등판에 일제히 써 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뛰는 사학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 절은 시종일관 조용한 날이 없지만 곳곳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참 정겹다. 스님들의 먹거리가 들어 있을 장독대 옆 벚나무에는 뒤집어놓은 기와가 매달려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사찰을 찾은 새들이 먹을 수 있는 모이를 담아서 매달아놓은 것이다. 이렇듯 스님은 새를 위한 공양도 잊지 않는다.

꼭 벚꽃이 아니어도 개울과 차밭, 작은 전통찻집이 늘어서 있는 이 길은 그대로도 참 아름답다. 오일장, 칠일장이 아니라 이제 상설시장이 된 화개장터도 구경하기 좋다. 지역의 명물인 손바닥만 한 강굴과 참게탕, 빙어튀김 등을 먹을 수 있다. 빙어튀김과 어린 쑥튀김을 섞은 한 접시가 딱 1만원. 튀김 한 접시에도 삼색 나물과 시원한 동치미, 매실절임이 함께 나온다. 맛있어서 맛있다고 했을 뿐인데 시원한 음료도 덤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곳이 인심도 좋다. 그러고 보니 장터의 상인도 무엇을 팔든 유독 친절하다. 화개장터 안에도 꽃은 피어 있다. 야생화를 담은 작은 화분을 파는 집도 있고, 화기 삼아 온통 꽃을 진열해놓은 그릇집도 있지만 나물 파는 아주머니나 막걸리 집에도 어김없이 매화 화분이며 히아신스, 들꽃, 해당화 화분이 놓여 있다. 파는 것이냐고 물으면, 그냥 ‘나 보려고 놓은 꽃’이라는 답. 꽃 같은 동네의 꽃 같은 사람들이다.

5, 6 매화나무와 벚나무, 동백과 산수유 등 온통 꽃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작은 꽃 화분을 옆에 두는 것을 잊지 않는 남도 사람들.


섬진강의 하얀 매화


더도 말고 더도 말고, 화개장터 앞에서 섬진강을 건너는 다리 하나를 지나면 하동도, 구례도 아닌 광양이다. 신기한 남쪽 동네! 다리 하나만 건넜는데 이곳은 또 다른 세상이다. 다리를 건너는 그 시점부터 눈부신 매화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처음에는 여기에만 있는 줄 알고 흥분하며 셔터를 눌러대던 우리는 계속된 매화 행렬에 감동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강을 따라, 산을 따라 온통 하얗다. 아직 나무의 새순도 돋지 않은 3월 말부터 매화는 가득 피어 섬진강에 제일 먼저 봄을 고한다.

추위에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는 고결함과 충절의 상징이다. 완연한 봄이 될 때까지 피지 않는 벚꽃과 달리 매화는 아직 겨울인가 싶을 때 만개한다. 강 하나를 두고 하동과 광양은 꽃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같다. 두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충신처럼 이곳은 동시에 꽃이 피지 않는다. 매화가 절정을 달리고 꽃이 지면 그때 하동의 벚꽃은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하니까. 그때까지 섬진강은 매화꽃소굴이다. 악당처럼 꽃이 핀다. 그만큼 많이, 마치 다른 꽃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광양 매화마을의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홍쌍리 청매실농원’이다. ‘홍쌍리’라는 브랜드를 전국에 전파한 홍쌍리 여사의 청매실농원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매화가 이토록 피었으면 매실도 그만큼 열릴 테니, 봄은 시리게 희고 여름은 푸르게 시릴 것 같다. 매실절임과 매실된장을 담가놓은 옹기 항아리도 수백 개다. 찾아온 사람들이 쉽게 거닐 수 있도록 청매실농원을 공원처럼 꾸몄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꽤 높은 전망대까지 오르면 섬진강의 요요한 흐름과 함께 눈 덮인 것 같은 매화꽃 언덕이 시리도록 펼쳐져 있다. 매화뿐만 아니라 숲을 이룬 대나무도 유독 훤칠하고 잘생겼다!

표지판에는 <취화선>을 촬영한 곳이라고 적혀 있다. 역시 이곳도 꽃 축제가 한창이므로 빈대떡과 막걸리는 빠지지 않고, 직접 만든 매실주스와 매실아이스크림도 인기다. 시판용과 달리 달지않고 새콤한 맛이 더 강하다. 계속 매화를 보면 매화에 마음을 꽤 빼앗기게 되는데, 분재에 매화를 접붙이기한 묘목 한 두 개를 살 수도 있다. 화분에 담긴 것도 있고, 검은색 비닐봉투로 대충 아랫도리만 감싼 것도 있다. 가격은 1만원에서 2만원대 정도. “이건 청매. 이건 홍매.” 하얀 것은 청매화요, 붉은 것은 홍매화. 희고 붉은 꽃이 피는 이곳에서 마침내 나는 벚꽃과 매화를 구분하게 되었다.

1. 섬진강을 따라 대부분 희고, 이따금 붉은 매화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2, 3, 4, 7. 여수 오동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동백이 가장 많이 모인 곳. 발길이 닿는 곳마다 동백이 숨죽이며 낙하한다. 5. 광양 매화마을의 절정은 홍쌍리 청매실 농원이다. 지대가 높아 한눈에 매화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고, 매실과 매실된장이 익어가는 항아리가 조르륵 늘어선 모습도 정겹다. 6.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몽돌에 부딪혀 구슬 소리가 나는 무슬목 해변.


비와 동백꽃, 그리고 여수


구례, 하동, 광양은 제법 가까이 붙어 있지만 하루에 돌아보기엔 빠듯하다. 서울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이기 때문에 세곳을 다 보려면 꽤 급한 마음이 된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매화를 실컷 본 후, 여수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여수는 이미 밤이었고 갓 문을 연 엠블호텔 앞에는 요즘 문화계의 핫 키워드가 된 ‘여수밤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다음 날, 예고대로 여수에는 비가 왔다. 하루를 머문 엠블호텔은 동백꽃으로 유명한 오동도 바로 앞에 있다. 오동도로 이어지는 다리는 아침 산책 삼아 걷기 좋고, 만성 게으름뱅이라면 한 번 타는 데 5백원 동전 하나면 되는 ‘동백열차’를 타거나, 유람선을 타고 섬을 한 바퀴 돌 수도 있다. 여수 앞 바다의 많고 많은 섬 중에 육지와 가장 가까운 오동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동백나무군락지다. 작다면 작은 섬이지만, 이 섬을 동백나무가 가득 채우고 있다. 4천 그루 가까이 된다는 이곳의 동백나무는 수령이 높기로 유명하다. 여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동백. 집 앞마당에 한 그루씩 피어 있는 것은 물론 어떤 길은 가로수가 동백이지만 오동도의 동백나무는 둘레도 키도 만만치 않게 크다. 그 동백나무와 등대 그리고 바다를 볼 수 있는 산책로가 섬의 능선을 타고 이어진다. 비가 내린 덕분에 숲길은 한적하고, 붉게 툭툭 떨어지는 동백은 더욱 은밀하고 고혹적이다. 꽃 여행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세 번째 수칙은 비를 반길 것. 우산을 어깨에 기댄 채 걷고 있는데 툭, 우산 위로 낙하하는 것도 동백이다. 동백이 얼마나 많이 피었는지, 걸으면서 떨어지는 동백이 보일 정도다. 시들지도 않은 동백이 탐스럽고 아깝지만, 동백은 본래 그렇듯 아무 미련도 없는 것처럼 떨어져버린다. 작년 가을에 떨어진 낙엽 위로 붉은 꽃만이 생명을 가진 것 같다. 그 길을 이리저리 걷다 보면 숨겨진 절벽이 나타나고, 시원한 바다가 보인다. 여수의 봄이 아름다운 이유의 절반은 분명이 섬이다.

오동도에서 빠져나오면 이제 모든 표지판이 향일암을 가리킨다. 돌산대교를 건너 찾아간 돌산은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바닷가 마을의 정취를 가득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동백과 목련, 벚꽃, 진달래와 개나리까지 여수의 끝이기도 한 돌산은 이미 완연한 봄이다. 무슬목 해변처럼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찰랑찰랑한 몽돌 해변이 있고 전망 좋은 돌산공원과 돌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 향일암이 있다. 향일암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계단은 만만치 않지만 올라가면 전망이 무척 좋다. 그 아래로는 마치 학교 앞 분식집처럼 바깥으로 창을 낸 갓김치집들이 즐비하다. 집집마다 솜씨를 내서 버무린 갓김치를 먹어보고 그 자리에서 주문하거나, 집까지 배달시킬 수 있다. 지형을 알뜰하게 이용해 층층이 계단처럼 만든 밭에는 벌써 푸른 푸성귀가 자라고, 해송 아래로는 크고 작은 고깃배가 떠다닌다. 5월에 열릴 여수세계박람회 준비로 여수는 온통 들떠 있었다. 어디에서나 엑스포 표시와 깃발이 나부꼈다. 그러나 우리는 여수에서 봄이면 늘 피어나는 꽃 때문에 온통 들떠 있었다. 지금쯤 섬진강의 산수유와 매화, 동백은 다 지고 말았을까. 거짓말처럼 피고 거짓말처럼 사라졌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벚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