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영화, 음반과 책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기민한 분석과 확고한 취향으로 자신의 것을 선별해내는 피처 디렉터 8인에게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물었다.




장우철 <GQ> 피처 디렉터


당대의 아티스트가 무슨 획기적인 전시를 하거나 말거나, 1등 가수가 새로운 노래를 열창하거나 말거나, 천재 영화감독이 세계가 까무라칠 영상미학을 발명하거나 말거나, 3월과 4월이면 아마 꽃이나 보고있을 것이다. 순천 선암사 선암매와 진도 석교리 목련과 서울 남산아파트 처진올벚나무는 사나흘 간격을 두고 일제히 소식을 전할 테니, 3월과 4월에 무슨 일을 기대하느냐 하면 그것들이 언제 필까 오매불망 노심초사하는 마음뿐이다. 다른 것들일랑 그때그때 놀던 가락대로 찾아가거나 찾아오거나 할 뿐이다. 김한용의 전시는 올 초 일찌감치 시작되었으나 아직 발길을 정하진 못했다. 다만 충무로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로 찾아가, 손수 타주신 녹차를 마시고 전시 도록 한 권을 받아와 펼쳤더니 그 안에 있는 이미지들이 너무도 극단적이라 힘이 쏙 빠지고 말았다. 우리에게 ‘광고 이미지’라는 것의 ‘처음’을 제공한 선구자의 작업에는, 여럿이 경쟁하며 얻은 말쑥한 좌표가 아니라 다만 홀로 뭔가를 개척해나간 예술가의 무자비한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지금이 컬러의 시대였음을 몇십 년 전에 찍힌 사진으로부터 알고 새삼 탄력을 느낀다는 아이러니. 무작정 그때가 아름다웠다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접어두더라도 이 리드미컬한 ‘현대사진’을 꼭 큰 사이즈로 보고 싶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작년에 이미 예매를 끝낸 호페쉬 쉑터 컴퍼니의 무용 <반란> & <당신들의 방에서>를 기다리는 마음은 뚜렷한 모양이거나 확실한 색깔이거나 그렇지 않고, 그저 두루뭉술하다. 현대무용에 대해서라면 아주 좁은 편견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알랭 프래텔이 안무를 맡은 세드라베 무용단에 대한 치우친 환호다. 그들의 무대 <저녁기도>와 <아웃 오브 콘텍스트>를 해를 거르며 잇달아 서울에서 본 후, 무용은 ‘모르겠는’ 것이 아니라 마냥 ‘두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호페쉬 쉑터 컴퍼니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그런 멍청하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객석에 앉고 싶다. 그러고 나면 뭔가 시작될 것이다. 멈춘 심장이 다시 뛴다느니 그런 (의학적인)얘기는 아니다. 3월 10일 영등포 공장지대에서는 기이한 소리들이 자기가 기이한 줄도 모르고 흘러나올 것이다. ‘노이즈’를 ‘음악’의 파장 속에서 감상할 수도 있음은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들만의 특별함이라는 전제를 두고, 우리는 오토모 요시히데라는 압도적인 이름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든 기대와는 전혀 다른 측면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 기대 역시 배반당하길 원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그곳에 있어나 보는 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일. 그걸로 충분하다. 요즘은 드문드문 세 장의 새 앨범을 듣고 있다. 첫 번째는 한 물이 아니라 두 물, 세 물은 갔다고들 하는 프렌치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대명사, 에어의 <Le Voyage Dans La Lune>이다. ‘몽롱한’이라는 형용사는 지겹지도 않다. 계절이 반복된다고 지겨울 리 없듯이 마찬가지라 여긴다. 몇 곡을 들어보니 에어는 과연 에어다. 두 번째 앨범은 독일 출신의 친애하는 아티스트 울리히 슈나우스가 마크 피터스라는 베이시스트와 함께 만든 <Underrated Silence>라는 앨범이다. 그가 만든 소리는 언제나 멀리서 들리는 소리라서, 아무리 여기서 크게 들어도 잡히질 않는다. 계절도 산을 넘어오는 거라고 여기며 우두커니 여기에 서서 그 소리를 듣는다. 세 번째 앨범은 존 탤러봇의 <fIN>이다. 최근 <피치포크>를 통해 알게 된 노래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이름이라서 앨범을 통째로 받아서 듣고 있다. 이광국 감독의 <로맨스 조>는 심심풀이. 마돈나의 새 앨범도, 빅뱅의 월드투어도, 이하이가 김추자 노래를 부르며 우승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그저 심심풀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푸는 십자말풀이처럼 그저 그런일. 논둑의 아지랑이 같은 일. 모두 꽃보다 못한 일, 하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일.




안미영 수석 기자


찬바람을 맞으며 어질어질한 상태에서도 기어이 공연장과 극장을 찾아가, 막이 오르거나 영상이 시작되길 기다릴 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담요 속에 들어와 앉은 듯 나른한 행복이 찾아온다. 공연 일정을 적어둔 다이어리에서 3월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5일부터 17일까지 공연하는 피터 브룩의 오페라 <마술 피리>. 올해 LG아트센터 기획 공연 21편 중에서도 이 작품을 관람 리스트의 가장 위에 올려둔 건 새로운 형식의 오페라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관람한 <마술피리>지만 세계적인 연극 거장 피터 브룩이 재해석한 모차르트 오페라라면, 지금까지 보았던 공연과 전혀 다른 생경한 에너지를 안겨줄 것만 같다. 작곡가 드뷔시를 주제로 한 음악회들도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3월 15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드뷔시 탄생 150주년 기념 콘서트>는 국내 중견 피아니스트 8명이 ‘녹턴(Nocturnes)’과 ‘바다(La Mer)’ 등을 연주하며 드뷔시의 감성을 피아노로 전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드뷔시의 몽환적인 정서는 4~5월 금호아트홀 연주회까지 이어진다. 피아니스트 에드워드 아우어나 파스칼 드봐이용이 연주할 드뷔시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사실 올해 들어서부터 드뷔시의 곡들을 거의 매일 감상하고 있는데, 최근 타계한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의 드뷔시 음반에 수록된 ‘달빛(Clair de Lune)’은 들을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연주다. 음 하나하나에 밤의 서정을 담아내는 섬세한 타건이라니! 드뷔시의 여파일까. 새로운 음반을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것 역시 프랑스 작곡가들의 음반이다. 생상스, 프랑크, 라벨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수록되어 있는 조슈아 벨의 신보 <French Impressions>는 지난 연말 관람했던 정경화의 독주회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녀가 연주했던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4악장은 절정에 다다른 원숙함이란 또 다른 순수함과 상통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마도 내가 조슈아 벨의 이번 음반에서 가장 사랑하게 될 곡은 5번 트랙부터 시작되는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가 되리라. 얼마 전 이메일 인터뷰를 했던 피아니스트 랑랑은 자신의 근황에 대해 말하며,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을 언급했다. 자신이 이 영화의 주제곡을 연주했고 할리우드에서 개최된 시사회에도 참석하고 왔다고. 이 영화에서 더 기대되는 부분은 올해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다. 실존 인물이자 세기의 섹스 심벌이라니, 참 부담스러우면서도 여배우로서 탐낼 수밖에 없는 역할이었을 것. 1950년대 마릴린 먼로를 얼마나 완벽하게 2012년 스크린 위에 불러왔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어 마음이 달뜬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원작 미스터리 소설을 영화화한 <화차>는 감독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다. <낮은 목소리>부터 변영주 감독의 행보를 좋아했고 또 지지해왔는데 <발레교습소> 이후 개봉작이 없어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물론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에서 종종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자신의 작품을 들고 복귀한 것은 8년만. 신뢰하는 감독의 신작이니 개봉 첫날의 저녁 스케줄부터 확인해야겠다.




김지수 피처 디렉터


첫 번째 권유 상품은 장석주 선생의 새로 나올 에세이 <고독의 권유>다. 재작년에 내가 출간했던 에세이 <나는 왜 이 도시에 남겨졌을까>가 도시에서 서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에디터의 안간힘을 담았다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 선생의 에세이 <고독의 권유>는 그 반대편에서 ‘시골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을 담백하고 요요하게 그려냈다. 몇 년 전 장석주 시인을 만나러 안성 금강 저수지 끝자락에 있는 ‘수졸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시인은 그곳에서 도가적인 삶을 누리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이쪽 살림 집 마당을 가로질러 저쪽 집필실로 출근했다. 홀로 깨어 차를 끓여 마시며 새벽 별을 보고 글을 썼다. 시인의 눈매는 형형한 산호랑이되, 가슴은 물 많은 저수지였다. 10년 전 <추억의 속도>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가, 다시 손을 보아 재출간된다. 단언컨대 활동성과 생산성에 피로해진 도시생활자들에게 장석주 선생만 한 삶의 스승이 없다. 시골에 지은 집, 단순함, 낮잠, 산책 같은 글들은 산개울물처럼 비옥하고 청량하다.

장석주의 책을 읽을 때는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10년 만에 낸 정규앨범인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듣자. 나는 이 음유 시인의 ‘떠나가는 배’를 가슴으로 부르며 10대와 20대의 다리를 건넜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그런데 이제는 ‘바다로 가는 시내 버스’라니 얼마나 초현실적인 제목인가. 그 바다는 물 없는 바다일까, 아니면 버스가 지나갈 때 일어서는 홍해의 바다일까. 격동하는 선원의 바다일까, 잠잠한 해초의 바다일까. ‘모든 시계들이 깊은 잠에 빠져도/네 먼 바다는 아직 일렁이고 있겠지/여기 끝모를 어둠 깊어진대도/누군가에게 작은 배를 띄우고….’ ‘시인의 마을’의 원주민 부부는 시인 박남준과 이원규와 백무산, 소설가 박민규와 사진가 김홍희에게서 음악의 서사와 영감을 찾았다. 3월 6일부터 11일까지 KT&G 상상마당에서 그들의 공연도 열린다.

내가 이달에 기다리는 공연은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피지컬 시어터 단체 중의 하나인 영국의 DV8 공연. 영국의 혁신적인 안무가 아크람 칸으로부터 현대 무용의 실험적이고 피지컬한 에너지를 본 터라 더욱 기대된다. 특히 DV8의 예술 감독 로이드 뉴슨은 아크람 칸보다 주제 의식이 과감하고 날카롭기로 유명하다. 추상성을 철저히 배격하고 일상적인 제스처와 연극적인 동작들을 재구성한 안무는 물론, 다리가 절단된 사람, 혹은 한쪽 팔이 소아마비인 장애자를 무용수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번에 공연할 <Can We Talk About This?>는 2011년 8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세계 초연된 후 현재 유럽을 돌며 센세이션을 이어가고 있는 화제작. 문맹의 우아한 몸짓이 아닌 정치적이고 극적인 텍스트로 읽힐 이 피지컬 시어터의 무대는 내게 입체적인 오르가슴을 선사할 것이라 확신한다. 섹스하며 사르트르를 읽거나, 요가하며 체 게바라를 읽는 기분이랄까.




나지언 피처 디렉터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며 회사를 그만둔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한번 계산해보자. 부지런을 떤다고 하면 3일에 책 한 권은 읽을 수 있다. 1년이면 121권. 대한민국 여자 평균 수명은 83세. 앞으로 48년 남았다.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5808권! 제기랄, 만 권도 안 된다. 사실 이건 8월쯤이면 나 몰라라 하는 신년계획일 뿐이고, <무한도전>도 봐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는 나로선 어림도 없는 숫자다. 웬 정신 나간 소리인가 싶겠지만 11권짜리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4,000여 개의 주석이 달려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완독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사의 대단한 걸작을 버리고 내가 택한 책은, 대실 해미트의 <데인 가의 저주>다. 제목이 너무 끝내주지 않나? 아이라 레빈의 <로즈메리의 아기>나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처럼 집 안에 깃든 미스터리와 음모라는 소재는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다이아몬드였다’라는 자신감 넘치는 첫 문장을 보라. 물론 호들갑 좀 보탰다. 담배를 엄청 피워대고 술을 콸콸 들이부은 그의 삶이 차갑고 멋진 하드보일드 소설로 탄생했다.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늦여름>은 ‘토머스 만이 추천한’ 어쩌구 홍보 문장만으로도 완벽하다. ‘슈티프터는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특이하고 대담하며 기괴한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꾼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는 어쩔 수 없이 써준 것 같은 서평 느낌이지만 성장소설이라고 하니 늦여름의 밤 냄새에 비밀스럽게 킁킁거릴 준비가 돼 있다.

설거지를 하면서, 술을 마시면서 들을 수 있어서 책보다는 음악에 대한 강박증이 좀 덜한데, 세상엔 너무나도 좋은 뮤지션이 많다는 사실 역시 날 괴롭게 한다. 인류가 가장 잘하는건 국내에 라이선스로 나오지 않는 인디 음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더 블랙 키스의 <El Camino>는 이제야 나온 라이선스 음반인데, 오하이오 촌구석 출신의 두 남자가 이렇게 섹시해도 되는 건가 싶다. 기타와 보컬을 맡은 댄 오르바흐와 드러머 패트릭 카니가 만들어내는 블루스 록 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5808권의 책 따위 잊고 그냥 덩실덩실하게 된다. 출신으로는 뒤지지 않는 조지아 주의 페리(대체 어디?)에서 나고 자란 어네스트 그린의 원맨밴드 ‘워시드 아웃’은 만약 외계인이 들었다면 ‘뭐야, 80년대 음악이잖아’ 할지도 모른다. 어네스트 그린은 취직이 안 되면서 집안에서 딩가딩가 만든 EP <Life of Leisure>로 갑자기 몽환적인 일렉트로 팝 사운드의 스타가 됐는데, 그의 정규 음반 <Within and Without>은 앞으로 그가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준다. 음악은 남들이 점점 좋아하기 시작하면 시큰둥해지고 ‘난 이제 그런 건 안 들어’ 심보가 발동되는 장르인데 이 두 밴드는 최소한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까지는 응원할 것 같다. 주드 로처럼 머리가 빠진다 해도 응원하고 싶은 남자 조지 클루니도 새 영화로 돌아온다. 조지 클루니가 셔츠 입고 나온 영화치고 별로인 게 없다. <The Ides of March>는 조지 클루니가 셔츠 입고 나온 것도 모자라 감독 점퍼까지 입은 영화다. <드라이브>로 갑자기 멋진 마초남이 된 라이언 고슬링, 생긴 것 자체가 연기를 잘할 수밖에 없는 느낌을 주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폴 지아마티도 정치권의 배신과 협잡, 복수를 다루는 데 참여했다. 예고편을 보니 <위험한 마음의 고백>과 <굿나잇 앤 굿럭> 등 조지 클루니의 기존 연출작만큼이나 남자 냄새가 퀴퀴하게 날 것 같다. 괴로운 리스트 중 최고인 건 덴마크 가구 디자이너 핀율의 전시다. 내 영혼을 팔아도 구매가 불가능한 그의 아름다운 의자와 서랍장이 대림미술관에서 전시된다. 미술관 문 닫는데도 안 나가고 침 질질 흘리면서 ’45 체어’를 넋 놓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난 줄 알면 되겠다.




허윤선 피처 디렉터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뒤섞여버린 지 한참 되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는 게 어려울 때도 있다. 아무런 필요와 책임, 의무가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문화 생활은, 그래서 지극히 사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일과 놀이의 모호한 경계에 지친 스스로가 그렇게 저울의 추를 다시 맞춘다.

온통 신간으로 둘러싸인 책상을 떠나 서점으로 가면 오래된 책들이 내 지갑을 턴다. 특히 전집 앞에서 마음이 약해진다. 전집은 결코 ‘책의 세트 판매’가 아니다. 성격을 세우고, 디자인하고, 작가와 작품을 고르고 골라서 다시 전집의 이름으로 내는 숭고한 일. 일단 관심을 가져보면 제각기 뚜렷한 전집의 개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한동안 시크한 블랙 커버의 문학동네 전집에 열중했다. 가즈오 이시구로나 조나단 사프란 포어 같은 ‘새로운 고전’을 소개하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전집에서는 과거에서 현재로 온 문학의 달라진 시선을 읽는다. 문학과 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는 남루한 마음도 충만해지는 시를 권한다. 비스바와 쉼보르스카의 부고를 들었을 때 그녀의 <끝과 시작>을 마지막 장부터 다시 폈다. 작가의 숨겨진 작품이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주옥같은 작품을 펴내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의 <요양객>은 나를 이 전집의 노예로 만든 주범이다. 헤르만 헤세의 가장 개인적인 작품을 모은 이 내밀한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 자신이 헤세의 좌골 신경통이 된 것 같았다. 마감이 끝나면 전집의 일곱 번째 책인 보토 슈트라우스의 <커플들, 행인들>을 읽을 예정이다. 모르는 작가지만 전집을 믿고 샀다. 전집과 나는 이만큼이나 돈독해졌다.

우디 앨런의 신작 <미드나이트 인 파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가 영화 속에서 수없이 연기한 신경쇠약 직전의 인물처럼 초조해진다. 어디 카우치에 누워서 심리 치료라도 받으며 울분을 토하고 싶다. ‘이러다 지금 제시 아이젠버그와 찍고 있는 <네로 피들드>와 나란히 개봉하는 거 아녜요?’ 초조함에 불안까지 더해졌다. 얼마 전, 테오 앙겔로 풀로스 감독이 불의의 사고로 타계했다. <영원과 하루>를 촬영한 테살로니키의 풍경과 그리스 민중 음악인 렘베티카의 선율이 떠올라 슬프고 그리웠다. 우디 앨런은 테오 앙겔로 풀로스 감독과 같은 1935년생이다. 사고가 아니라도 언제든 우리를 떠날 수 있는 나이. 부디 우디 앨런이 순이와 오래오래 살면서, 영화를 생산해주었으면 한다. 잠수 중인 또 다른 영화 소피아 코폴라의 <썸웨어>의 행방도 궁금하다. 서울이 베를린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를 개봉관에서 못 볼 정도의 도시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266분짜리 <리스본의 미스터리>를 보면 초조함이 좀 덜해질까. 긴 겨울의 끔찍하게 차가운 공기 속에서 가장 날 따뜻하게 만든 소식은 올지도 모른다던 제인 버킨이 정말 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버킨 백이 한 개도 없는 나는- 그녀도 단 한 개뿐이라지만 – 패션 아이콘이 아닌, 그녀의 노래를 좋아한다. ‘Ex Fan Des Sixties’는 오랫동안 나의 컬러링이었고, 홍콩 HMV에서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음반을 뒤진 적도 있다. 라디오헤드가 오는 것보다 제인 버킨이 오는 게 천 배는 설레는 이 마음. 3월 공연에서 어떤 곡을 불러줄지, 궁금하지도 않다. 뭐든 그냥 막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제인 버킨이 돌아간 후에는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도착>을 보고 싶다.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시간과 장소를 여행하는 이민자의 이야기를 그린 숀 탠의 그림책을 재구성한 공연이다. 그는 낯선 곳에 당도한 이방인의 긴장과 기대를 판타지적인 요소로 그렸다. 사람들은 낯선 말을 하고 이상한 동물이 출현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마주치는 공기에 대한 멋지고 낭만적인 우화. <도착>을 보고 하늘을 향해 열린 트렁크의 배 속에 여유와 낭만을 꾸역꾸역 넣고 ‘출발’을 준비하면 좋겠다. 여행은 언제나 최고의 문화 생활 중 하나니까.




기낙경 피처 디렉터


플랑드르 회화의 매력은 뭐니 해도 정적과 고요가 깃든 공간이고 거기 스민 빛이다. 베르메르의 푸른 머릿수건과 연노랑 물항아리가 그랬듯 그것은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북유럽의 차가운 공기, 거기 꽉 차 부유하는 빛이 그렇듯 자연스럽게침묵하는 것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끌림. 플랑드르라는 이 이국적인 네 음절에는 분명 이 단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해서,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전이라는 전시 제목은 당연히 귀가 쏙 당기는 뉴스다. 시작은 2월 10일부터이지만 4월 12일까지 넉넉한 기간 동안 작품이 걸리는 덕에 여유 있는 시간을 찾아 천천히 둘러볼 참이다. ‘작정하고 동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무심히 그러나 제대로 응시하기’ 정도의 목적을 가지고 갈 참이다.

하와이라면 서핑하는 잭 존슨의 음악을 들고 가거나, 그도 아니면 이즈라엘 카마카위올레의 우쿨렐레 소리를 따라가야 한다. 한번 맛본 하와이는 공기의 달콤함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행복한 깨달음을 전해주었고, 언젠가 하루키 같은 대작가가 되어 섬에 정착한 후 조깅과 글쓰기를 마음껏 반복하리라는 바람도 품게 했다. 그래서일까? 요즘처럼 마음이 바쁘고 시간에 쫓기고, 인생무상이 꽉 박혀버리는 때엔 동경하기 마련이다. 하와이를, 바로 하와이의 푸른 시간을! 히라노 에리코의 에세이 <알로하, 하와이의 푸른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후루룩 들쳐보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다. 10년 넘게 하와이 섬의 힐로를 넘나들었다는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해서 책 중간 중간 끼어든 소소하고 세세한 그녀의 그림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엉뚱발랄한 일본 할머니의 하와이 부엌, <호노카아 보이>의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이 책을 읽다 달콤한 잠에 빠져버리고 싶다.

알렉산더 페인의 <사이드 웨이>는 유명하다. 한 남자의 복잡한 내면을 따라가는 영화의 내러티브보다는 와인을 마시며 전개되는 캘리포니아의 드넓은 포도나무밭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운운하는 피노누아니, 샛길로 새는 인생의 행로보다는 주인공 마일즈가 그토록 아끼던 와인,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마시고 싶었던 1961년산 슈발 블랑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회용 컵에 따라 마셔버리던 그 장면이 좋았다. 일상의 이 찌질하고도 처연한 시퀀스를 이처럼 멋지게 담아낸 장면이 또 있을까? 어쨌든 이 덕분에 알렉산더 페인이라는 이름은 뇌리에 콕 박혀버렸고 그의 두 번째 영화 <디센던트>는 당연히 관심사다. 여기에 조지 클루니가 난관에 봉착한 아버지로 하와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사실 등등이 양념이라면 양념. 클루니에게서 느끼함을 쫙 걷어내고 담백한 연기를 끌어낸 예고편만으로도 흥미를 끈다.

메릴 스트립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주는 이상한 연기를 한다. 그녀는 슬픔을 연기할 때도 독한 여자를 연기할 때도 배우 특유의 개성을 버리지 못한다. 배역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연기의 신’이라는 말이 그녀처럼 어울리는 배우도 없을 테니까. 요는 그녀가 어떤 연기를 하든 어딘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이고 말이 통할 것 같은 정직한 기운이 흐른다는 것. 영화 속 인물이 연대 가능한 현실과 쭉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처 수상을 연기한 <철의 여인>이 기대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인이 아닌, 혁신과 개혁의 이름으로 남자들의 권위 속에서 살아남은 어떤 여자가 아닌, 인간적인 대처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향해 이해의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괜찮은 일일 테니까. 여기에 보철을 끼고 말투를 흉내 내고 한 인물과 제스처까지 똑같은 어떤 연기를 본다는 짜릿함도 보태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