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려도 길은 곧 녹는다. 눈으로 덮인 산과 산 사이를 달려 도착한 속초에는 빈틈 많은 바다와 그 바다와 만나는 호수, 바람 그리고 겨울의 본능적 허기를 채워준 열 손가락도 모자란 겨울의 맛이 있었다.

1. 아바이 마을 옥상에서 명태가 말라간다. 머리는 따로 모아뒀다가 각종 국물을 내는 데 쓰고, 눈은 모아서 된장을 담글 때 쓴다. 버릴 게 하나도 없어서 예전부터 제일로 친 생선이 명태다. 2. 옥미식당의 곰치국. 3. 도치알탕은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속초의 별미다. 4,5. 함경도 아바이 젓갈에서 판매하는 가자미식해와 이북 음식. 6. 대포항의 도루묵 구이. 7. 속초의 곳곳에 눈금처럼 놓인 항구. 속초는 항구다. 8. 영랑호와 바다가 만난다. 해질 무렵의 따뜻한 풍경.

아침 식사는 이곳에서

아직 동도 트지 않은 길을 달려 속초에 도착하면, 이미 그곳에는 아침 풍경이 한창이다. 관광객이 많은 속초에는 아침부터 영업하는 집이 많다. ‘섭’으로 부르는 홍합으로 끓인 국이나 복국도 먹고 그때그때 계절의 생선으로 끓인 국이 아침 식사로 오른다. 이맘때는 가게들마다 일제히 ‘도루묵찌개’나 ‘도치알탕’, ‘물곰탕’을 종이에 써붙인다. 속초 사람들이 좋아하는 도치도 물곰도 참 못생겼다. 아귀만큼 포악하게 생기진 않았지만, 아귀한테는 있는 이목구비가 도통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게 못생겼다. 하지만 이 도치와 물곰은 다른 생선에게는 없는 독특한 맛을 내는 겨울의 별미다. 도치는 껍질이 두껍다. 복껍질의 몇 배나 되는 쫀득쫀득한 껍질이 별미다. 겨울이면 암컷에는 알이 가득 차는데, 이 도치를 툭툭 잘라서 신 김치와 함께 폭폭 끓여 먹는 음식이 도치알탕이다. 도치의 알은 국물 속에 풀어져서 한 수저를 뜰 때마다 알알이 동동 떠 있다가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물곰으로 불리는 곰치살을 수북하게 넣고 끓이는 ‘물곰탕’도 보드랍고 시원하기로 따지면 어느 생선이 부럽지 않달까. 이른 아침에도 속초 옥미식당에는 여행자들과 전날 과음한 지역 사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소박해 보이는 음식에도 반전이 있다. 사실은 상당히 비싸다는 것. 도치도, 곰치도 예전만큼 잡히지 않지만 겨울의 맛에 눈을 뜬 사람들은 계속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국적으로 품귀다. 요즘 곰치와 도치의 별명은 ‘못난이’에서 ‘금치’로 바뀌었다.

옥미식당, 88 생선구이 식당이 있는 중앙동 맞은편에 실향민이 이룬 청호동 ‘아바이마을’이 있다. 방송에 등장하면서 이곳의 명물이 된 갯배가 바다 이쪽과 저쪽을 이어준다. 마을 사람의 80% 이상이 이북에서 피란왔다가 고향이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다. KBS 다큐멘터리를 다시 책으로 만든 <한국인의 밥상>은 ‘실향민들은 대부분 1.4후퇴 때 부산 일대까지 피란 갔다가 고향에 빨리 돌아가기 위해 함경도와 가까운 청호동 백사장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함경도는 바닷가였기 때문에 오징어와 명태가 많이 나는 곳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정착해왔다’고 적고 있다. 가자미식해, 아바이순대, 명태순대 등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은 손수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들이 아바이 마을에 많이 남아 있다. 음식점을 하지 않더라도 아바이마을 지붕에는 어김없이 명태가 걸려 있다. 된장을 담글 때도 이 명태로 우려낸 육수와 명태눈 등을 쓴다고, ‘함경도 아바이 젓갈’의 주인장은 말했다. 명태와 가자미는 속초에서 가장 중요한 생선이다. 특히 가자미는 1년 내내 잡혀서 늘 그 자리에 있는 고기라는 애칭으로 ‘자리고기’라고 부른다. 조밥으로 버무려 삭힌 가자미식해는 이곳에서 시원하고 콤콤한, 진짜 맛을 낸다. 여행을 왔다가 사가는 일이 많은데, 가자미식해는 빨리 먹어야지 묵혀두면 맛이 변하고 군내가 난다고 당부한다.

속초는 항구다

속초 길의 눈금처럼 놓여 있는 항구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겨울의 먹거리가 온통 모이는 곳이다. 속초에 처음 온 사람도, 속초를 외갓집 드나들듯 하는 사람 모두 통과의례처럼 대포항에 들른다. 대포항은 미운 정이다. 늘 행복한 기억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포항의 가장 큰 매력은 중앙시장을 뛰어넘는 다양한 먹거리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큰 돈을 썼거나 잘 먹고도 찜찜한 경험을 몇 번 느낀 후면 각자 자기만의 대포항 이용 지침을 세우게 된다. 새우튀김만 날름 사가거나, 대포항 안쪽에서 조개를 굽거나, 바닷가 쪽 난전을 이용하는 식이다. 물론 그곳에 도달하기까진 수많은 ‘대포항 도우미’, 나쁜 말로 ‘삐끼’를 통과해야 한다. 이 도우미들의 홍보 멘트는 갈수록 예술의 경지에 오른다. “이빨 빠질 때 까지 오징어 서비스!”

겨울이 숨겨놓은 대포항의 맛은 제철을 맞은 도루묵과 양미리 등을 숯불에 구워 먹는 것. 대포항의 몇몇 집은 골목 쪽으로 숯불 화로를 올려두고 알이 배 밖으로 터져 나온 생선을 굽는데, 아마 가을 전어 굽는 냄새 다음으로 고소한 냄새일 것이다. 미리 구워놓은 것을 다시 데워주기도 하지만, ‘생물 도루묵’을 구워달라고 요구해야 진짜 맛있는 도루묵구이를 먹을 수 있다. ‘생물 도루묵’이 있다는 금성호 앞에서 도루묵과 양미리를 주문했다. 작은 생선이라 눈앞에서 금세 익는다. 앞뒤로 노릇하게 익힌 도루묵은 꼬리를 꺾고 몸통을 몇 번 두드리면 척추 같은 뼈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데, 이렇게 뼈만 제거하고 나머지는 붕어빵 먹듯 손에 쥐고 먹으면 된다. 고추냉이를 푼 간장을 바르면 간이 딱 맞는다. 이렇게 맛있는 도루묵을 왜 도로 물렸을까? 선조는 알이 없을 때 먹었나? 톡톡 튀는 알은 알대로, 보드라운 살은 살대로 맛있다. 불이 좋은 숯불 화로에 서서 도루묵 구이를 먹으면서 추운 것도, 다리가 아픈 것도 잊었다. 이왕 불을 올린 김에 수조에서 꺼낸 오징어도 굽고, 가리비도 구웠다. 올리는 족족 굽히는 만능 화로! 손바닥만 한 산오징어는 구워서 내장째 썰어 먹으면 고소하고 구수하다. 목이 마르면 사이다와 맥주를 곁들이길. 도루묵 5마리와 양미리 5마리, 오징어 3마리, 가리비 4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포항에서 영리하게 먹을 자신이 없다면, 회는 동명항이나 물치항, 외옹치항 같은 속초의 다른 항구를 찾는 것이 좋다. 항구마다 특징이 있다. 동명항은 자연산만 고집하고, 가장 한적한 분위기의 외옹치항은 회를 먹고 끓여주는 매운탕이 맛있으며 물치항은 물회가 유명하다. 동명항에서는 우럭이나 광어처럼 전국적으로 흔한 생선보다 잡어회를 먹어야 한다. 동해에서 잡은 살아 있는 꽃새우도 수조에 가득한데 1만원에 열 마리쯤 담아준다. 미주구리, 도다리, 전복치 등 도시 사람은 봐도 모를 생선을 소쿠리 가득 담아서 흥정한다. 3인이면 3만원, 4인이면 4만원 정도 회를 구입하면 양이 적당한데 여기에 1만원 정도 더 드릴 테니 맛있는 것 좀 달라고 하는 것도 요령이다. 회 뜨는 비용은 회값의 10%. 쌈 채소와 고추, 마늘, 고추냉이, 초고추장 등은 별도 구입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길. 한편, 진짜 속초 사람들의 항구 이용법은 회만 몇 종류 먹고 가는 도시 사람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겨울에 맛있는 도치는 삶아서 썬 숙회로, 복어와 방어는 회를 뜨고 도다리 세꼬시와 살아서 튀어 오르는 꽃새우를 곁들이고 백골뱅이 한 대접과 문어는 삶는다. 동명항에서 이렇게 남자 어른 여섯 명이 겨울 일미를 즐기고 있었다.

1. 속초의 지역 특산품이 된 닭강정. 중앙 시장에는 닭강정으로 유명한 집들이 성업 중이다. 2. 봉포머구리집의 물회 1인분의 가격은 1만2천원. 양이 어마어마하다. 3. 성게알밥. 부순 김과 콩나물을 제외하면 모두 성게알이다. 4. 동명항의 꽃새우. 5. 대포항의 명물 새우튀김.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6. 중앙 시장 상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감나무집 감자옹심이. 강원도 토종 감자로 만든다. 7. 설악 신흥사의 풍경. 온통 눈이 쌓였다.

시장 탐험

속초 시내에 있는 중앙 시장은 여느 지방의 재래시장과 달리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친절하다! 지난달 방문했던 부산 시장의 살벌한 활기 대신 찾아오는 손님을 반기는 따뜻함이 보이고, 상인들이 이것저것 설명도 잘해주는 데다 시식 코너까지 활성화되어 있어 돌아보는 재미가 있다. 시장 입구에는 어김없이 가자미식해를 파는 집이 있었다. 커다란 양푼에 식해를 무치던 아주머니는 가자미식해를 먹을 줄 아느냐고 묻더니 커다란 가자미 조각을 얼굴 앞에 내밀었다. 콤콤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최고였다. 생선가게에는 도치, 장치, 붉은 가자미 등 속초 사람들이 겨울이면 빠지지 않고 먹는다는 생선이 가득하고 알이 차오르다 못해 굴러 떨어진 도루묵이 ‘다라이’로 있다. 꾸덕하게 마른 양미리도 주황색 알을 보이며 열 마리씩 두릅으로 엮여 있다. 생물 생선보다 살짝 마른 생선을 좋아하는 바닷가의 입맛에 따라 말린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는 손이 바쁘다. 가자미며 우럭, 이면수 등 알 만한 생선들이 해풍에 마른 몸으로 누워 있다. 이 마른 생선은 굽고, 조리고, 찌고, 국을 끓여 먹어도 맛있다는데, 생물 생선보다 감칠맛과 쫄깃한 맛이 더 좋다고. 또 살짝 마른 생선은 요리를 할 때 모양이 잘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시장 골목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기름에 튀기는 고소한 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다. 호떡집도 튀김집도 있지만, 호떡이나 튀김으로 만들 수 있는 냄새가 아니다. 바로 일명 ‘속초 닭강정’으로 불리는 닭강정 골목이다. 갓 튀겨서 먹는 치킨과 달리 식어야 더 맛있다는 닭강정. 덕분에 중앙 시장의 닭강정은 전국 택배만 매일 1천 박스가 나가는 지역 특산품이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만석닭강정, 중앙닭강정, 시장닭강정 등 닭집의 오픈 키친에서 만들어져 열기를 식히고 있는 닭강정들이 산을 이루고 있다. 닭강정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어느 집이 더 맛있다는 갑론을박도 일어난다. 속초에서 속초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슬쩍 물어봤지만 각기 다른 대답이 나온걸 보면 역시 사람의 입맛은 조금씩 다르기 마련. 속초를 찾은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닭강정 박스를 손에 들고 시장을 빠져나온다. 식은 후에 먹는 닭강정 맛은 소문대로였다. 양념은 입에 착착 붙고, 여전히 껍질은 바삭거렸다. 중앙 시장에는 닭강정 외에도 시장 상인들이 좋아하고, 시장 손님들이 좋아하는 감자옹심이집이 있다. 옹심이는 밀가루 대신 감자 전분을 이용해 만든 수제비 같은 음식으로 강원도의 향토 음식이다. 강원도 토종 감자만을 사용한다는 이곳 ‘감나무집’의 메뉴는 감자옹심이와 송이버섯을 넣은 송이감자옹심이 단 두 개뿐. 따끈하고 쫄깃한 옹심이를 가득 담고 호박 고명과 통깨를 넉넉히 뿌려주는데 씹을수록 고소하다. 반찬으로 나온 열무김치와 깍두기도 바닷바람처럼 시원하다. 소박하면서도 든든한 한 그릇. 사람들은 이것을 강원도의 맛이라고 부른다.

냉기와 온기 사이

청명한 날씨에도 속초의 겨울은 얼어붙듯이 춥다. 이열치열이면 이한치한. 본래 냉면은 겨울음식이라는 걸 떠올리면서 영랑호와 바닷가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봉포머구리집’의 물회를 주문했다. ‘머구리’는 잠수사들이 잠수할 때 쓰는 장비를 말하는데, 이곳에선 사시사철 동해에서 건져낸 각종 해물로 만든 물회를 낸다. 해삼과 굴, 오징어, 멍게, 개불, 가자미와 방어와 물미역 등 신선한 재료가 과일을 갈아 넣은 새콤달콤한 육수에 푹 잠겨 있다. 먹다가 소면을 넣고 말아 먹으면 시원한 회국수가 된다. 원래 물회는 뱃머리나 항구에서 급하게 대충 만들어 먹는 음식이다. 통영의 충무김밥처럼 끼니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먹던 음식이지만 이제는 속초의 빠트릴 수 없는 별미가 되었다. 물회가 너무 차다 싶으면 성게 알밥을 주문하길. 김가루와 콩나물을 제외하면 온통 성게알이다. 아이스크림 같은 성게알을 떠먹다가 따로 주는 밥을 넣어서 슥슥 비벼 먹으면 된다. 반찬으로 나온 새우장은 인기가 좋아서 팔기도 한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설악산으로 향했다. 언제 봐도 참 잘생긴 산이다. 요즘은 외국인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서, 입구에 소원을 적어놓은 기왓장에는 영어, 일어, 중국어는 물론 태국어와 아랍어도 쉽게 볼 수 있다. 설악산은 온통 하얗다. 쌓인 눈이 조금 녹으면 또다시 눈이 내린다. 봄이 오기까지는 설악산은 계속 이렇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처마마다 길게 고드름이 내렸고,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무등 태워서 고드름을 따줬다. 눈길이 걱정되어서 백담사까지는 오르지 못했지만 설악산 입구의 신흥사의 풍경도 고즈넉하니 좋다. 눈이 얼마나 왔는지, 사찰 안에도 길이 나 있다. 흰 눈과 사찰의 붉고 푸른 단청의 대비가 시리게 예쁘다. 처마 끝에서는 눈 녹은 물이 툭툭 떨어지고, 귓가엔 물방울 전주곡이 들려온다. 춥다 춥다고 제자리뛰기를 하면서도 쉽게 떠나고 싶지 않은 풍경이다. 약수를 한 컵 받아 마셨더니 머리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 여행을 하며 몸은 얼었다 녹았다 과메기처럼 된다. 이렇게 얼어붙는 몸을 녹일 완벽한 곳이 있다. 설악산은 산 좋고 물 좋은 곳. 척산온천은 1970년대 강원도 최초로 개발된 온천이다. 이 오래된 온천장에서 숙박을 할 수도 있고, 잠깐 들러 목욕만 하고 가는 것도 괜찮다. 42∼53℃의 약알칼리성 온천수로 여러 미네랄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럭셔리한 스파도 아니고, 워터 슬라이드가 있는 워터파크도 아니다. 하지만 오래된 곳만이 가지고 있는 품위와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고, 입장료도 싸서 부담 없이 언 몸을 녹일 수 있다. 게다가 수영복이 필요 없으니 즉흥적으로 들러도 아무 문제가 없다. 설악에서 채취한 약재를 넣어 손수 달였다는 맵싸한 쌍화차를 한 잔 마시고 37℃에 맞춰진 히노키 온천탕에 몸을 뉘었다. 차가운 손과 발에 새삼 피가 도는 것처럼 저릿저릿하다가 몸이 풀린다. 뜨겁고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