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밤이 깊고, 낮의 길이를 빼앗긴 사람들은 생각이 많아진다. 한 장 한 장 시집 읽기 좋은 계절인 것이다. 작가들이 아끼는 시집 스물두 권을 추천했고, 시 같은 추천사를 함께 적었다. 시가 있고 시인이 있어서 다행이다.



1.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서효인
서효인은 이 시집에 실린 시들로 몇 년 전 김수영문학상에서 ‘물먹었다.’ 2등에게 상을 준다면 그가 수상했겠지만. 이 시집은 거의 ‘묻혔다.’ 2011년 서효인은 드디어 김수영문학상을 받는다. 수상 시집이 곧 출간될 예정이고 아마 많은 사람이 그 시집을 사겠지만, 시작은 바로 이 시집이었다. – 이우성

2.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언젠가 한 모임에서 이 책의 목차를 보고 끌리는 제목을 골라 낭독했는데, 우리가 고른 시의 내용이 우리 각자의 삶 또는 고민과 딱 맞아떨어졌다. 시인이 1945년부터 2005년까지 기록한 170편의 시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모든 충고, 삶의 슬픔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 그리고 언제나 극과 극의 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이중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표현, 정곡을 찌르는 명징한 언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그녀의 시는 노벨문학상 수상은 물론 ‘시단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얻게 만들었다. – 이기원

3. <유년의 시놉시스> 김정환
전방위적 감각으로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스케일과 세계에 대한 지평을 장착하고 있는 김정환 시인의 시집은 그만의 독특한 시적 리얼리티를 지닌 채 여기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실재를 길어 올리는 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읽어 보면 안다. 그가 시적으로 어떻게 헤엄치고 싶은가를, 골방에 갇혀 읽는 것보다 여행 갈 때 배낭에 챙기면 좋겠다. – 김경주

4. <소> 김기택
소설이든 시든 첫 번째 덕목으로 ‘관찰’을 꼽는다. 그러한 점에서 시인 김기택은 관찰이 무엇인지, 관찰의 힘이 어떠한 것인지 시로써 증명해내고야 만다. 시인 김기택의 눈과 뇌는 유독 친밀해 보인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뇌에 전달하고, 그것을 다시 심장을 거쳐 손끝으로 보낸다. 이성이 관장하는 세밀한 관찰, 거기에 마지막 낙관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감성. 이것에 유머를 더한 것이 김기택의 시집 <소>다. – 최민석

5. <김수영 전집> 김수영
1980년대였다. 나라는 어지러웠고 나의 20대는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때 김수영의 시에 빠졌다. 시집에 담긴 한 장의 흑백사진. 야윈 얼굴과 퀭한 눈을 한 시인의 모습에는 고독과 저항의 삶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4.19와 5.16혁명을 거치며 표현된 김수영의 시들은,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희망적이며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아름다웠다. 그의 대표 시 ‘풀’의 구절구절이 그러하듯. – 김영주

6. <푸른빛과 싸우다> 송재학
처음에는 왜 푸른빛일까 궁금했다. 수많은 빛 중 왜 푸른빛과 싸운다는 걸까. 시집을 읽고 난 후 알게 되었다. 청춘과 죽음의 냄새, 희망의 냄새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격렬하고도 뜨거운 서정의 세계. 송재학은 첫 시집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보여준다. 시인은 왜 끝내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독자들은 왜 그 빛을 잊지 못하는 걸까. – 윤보인

7. <불쌍한 사랑 기계> 김혜순
나는 어떤 동물을 떠올린다. 어떤 끔찍한 핏덩어리를 떠올린다. 아니다. 나는 가장 눈부신 구애와 몸서리를 떠올린다. 사랑과 혐오로 점철된 한 덩어리 괴물이 저기 있다. 저 표정으로 읽는 그림. 저 표정으로 그려지는 시집. 불쌍한 사랑 기계. 사랑도 기계도 불쌍도 모두 저기 있다가 사라져간다. 아 아무것도 없는 겨울은 이렇게도 끔찍하구나. – 김언

8. <극에 달하다> 김소연
간결의 미학을 보여준 산문집 <마음사전>으로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 산문집을 펼쳐본 후 내 혼의 일부를 시인에게 차압당했다. 그리고 그 차압당한 일부의 영혼을 되찾으려 시집 <극에 달하다>를 펼쳤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기대에 불과했다. 내 영혼은 더욱 깊이 시인 김소연의 세계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 최민석

9. <실험실의 미인> 한성례
이 시집의 출몰을 한국시단에선 너무 급하게 한쪽으로 밀어놓았거나 아직 이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 없나 보다. 우연히 발견한 이 시집의 속살에서 나는 매혹과 숨이 차오르는 차가움을 동시에 보았다. 일본문학번역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해온 한성례 시인의 정체성은 시에 숨겨져 있다. 시집을 펼치면 시인의 언어는 기갈에 가득한 서정과 새로운 실험실의 기포들로 가득 차 있다. – 김경주

10. <클로로포름> 송승환
평론가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실험적이다!’ 난 뭐가 실험인지 모르겠다. 너도나도 실험적이라고 한다. 그게 다 실험이면 지구가 실험실이게. 하지만 송승환은 ‘실험적이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추종자이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몇몇 작가들이 선보였던 모더니즘을 추억한다. 이 땅에 지금 오직 한 명뿐인 시인이 있다면 송승환뿐이다. – 이우성



11. <오늘 아침 단어> 유희경
한 여자 후배가 말했다. “제목이 멋있지 않아? 사진 보니까 얼굴도 잘생겼어.” 사진은 거짓말쟁이다. 유희경의 얼굴은 보통이다. 아, 질투하는 건가? 제목이 정말 멋지다. 유희경은 이런 말을 싫어 하겠지만, 그의 시에서 기형도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난 늘 이런 생각을 했다. ‘기형도가 살아나면 좋겠어.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내가 기형도 문학상을 만들면 1회 수상자를 유희경으로 정하겠다. – 이우성

12. <Love Adagio> 박상순
박상순의 시집을 자주 펼친다. 신선하고 유머가 넘치고 심플한 세계. 단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곳을 혼자 여행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 여행은 조금 고독하지만 자유롭다. 그의 시를 해석하는 건 쉽지 않다. 수많은 암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미로 속에 갇혀버린 느낌. 그 느낌만을 만지고 그 세계를 말없이 따라갈 뿐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 윤보인

13. <동경> 최정진
외롭고 싶을 때 거울을 보면, 외롭고 싶지 않은 나를 만날 수 있다. 동경은 그런 시집이다. 어린 시절을 세탁소에서 보냈을 법한 시인의 자분자분한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어쩐지 마음에 다림질을 하고 싶어진다. 반듯하게 외롭고 싶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싶기도 하다. 시집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다. – 서효인

14.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굳이 고백하자면 그녀는 내 첫사랑이다. <혼자 가는 먼 집>을 펼치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라는 문장을 읽고 바로 사랑에 빠졌다. 그런 첫사랑의 최근 시집이다. 추억 때문에 다시 찾는 거냐고? 천만에, 이 시집도 좋다. 아주 좋다. 내가 봤다. 좋은 거 내가 봤다. 두 번 봤다. 왜? 사랑하니까! – 서효인

15.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각혈이다. 불길이다. 달을 우러러 차고 내리는 정염이다. 환멸이다. 회한이다. 살 터지게 신랄한 통찰이다. 여학교 앞에서 바바리코트 열어젖히고, 국회의사당에 탱크 포신 대놓고 우쭐해하는 나라에 최영미가 있다. 매 편마다 서슬 푸르다. 살얼음 딛고 선 지성이 비길 데 없다. 그녀가 시들어도 그녀의 시는 봄마다 부활하리라. 우리 볼을 부끄럽게 하리라. – 유형수

16. <슬픔치약 거울크림> 김혜순
꾸준히 어떤 제도와 감각에도 함몰되지 않은 채 자신의 상상력에서 천사들을 키워온 김혜순 시인의 열 번째 시집. 숨쉬는 미로들로 가득 찬 그녀의 문장들로 들어서면 우리는 불현듯 캄캄해지거나 아련해진다. 그녀가 만든 정전기에 나는 언제든 감전될 준비가 되어 있다. – 김경주

17. <생물성> 신해욱
비밀을 지키는 언어, 고요하여 모두인 여백. 신해욱의 두 번째 시집 <생물성>은 천천히 오는 시집이다. 그녀의 시를 처음 만났던 겨울, 나는 빈 방에 앉아 자꾸 책을 내려놓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가만가만 누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어깨를 툭, 건드려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여전히 아무도 없으나 현존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유희경

18.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김민정
‘너, 시에는 문외한이지? 네, 그래도 무뇌아는 아닌데요?’ 어느 새벽 2시 반, 침대에 누워 김민정의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를 읽다가 빵 터져 웃었다. 새벽 아닌 오후 두 시 반에나 걸맞은 웃음이라 혼자서도 민망했다. 은밀하게 품어왔던 생각이 조밀한 언어유희 속에 담겨 있었다. 그녀의 시를 읽고 나도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이용재

19. <그는 걸어서 온다> 윤제림
시를 읽으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다. 시인이 ‘재춘아, 공부 잘해라’라고 말하면 정말 재춘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막차마저 놓쳤는지 이십 리 길을 그냥 걸어 들어온 가난한 연인들’의 안부도 궁금해진다. 시를 읽으며 나는 책장 속의 별과 말을 훔친다. 급기야 시인이 ‘제아무리 잘된 영화래봤자 별 다섯 개가 고작인데. 우리들 머리 위엔 벌써 수천의 별들이 떴다’고 말할 때, 책장 속 밤하늘도 내 것이 된다. 말의 전염이 좋다. – 윤고은

20.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바람의 언어를 적어 내려간 고독과 주저의 연대기. 이 시집을 읽는 동안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읽고, 울고, 접고, 적어두고, 다시 읽고 울기를 반복했던 그 아마득한 시간. 버텨내었으니, 잊지 못하였고, 나에게 김경주와 그의 첫 시집은 오지 않을, 그리하여 영원히 바라게 될 전설의 계절이 되었다. – 유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