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 시인이 낸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를 단숨에 읽었다. 나 역시 야구 때문에 복장이 터졌다가 실실 웃었다 하는 초기 야구증후군을 앓고 있기 때문에 감흥은 남달랐다. 시인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야구였나.

시인이 짐짓 숨겨둔, 제각기 다른 매력을 볼 수 있는 책. 인생을 관통한 취미와 ‘오타쿠’적인 관심, 사소한 듯 주고받은 편지와 길을 잃지 않게 해준 구원의 책 목록. 본업에서 눈을 돌린 시인의 딴 짓에 반했다.

서효인 시인이 낸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를 단숨에 읽었다. 나 역시 야구 때문에 복장이 터졌다가 실실 웃었다 하는 초기 야구증후군을 앓고 있기 때문에 감흥은 남달랐다. 시인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야구였나. 어린 시절 엄마가 잠시 부재한 사이 외삼촌과 함께 듣던 라디오 방송이 시인과 야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갔던 야구장이 요강을 닮지 않아서 실망하고, 할아버지는 쌈짓돈을 털어서 글러브를 사준다. 축구 하는 소년들이 차지한 운동장의 그늘 내린 한 귀퉁이에는 야구하는 소년들이 있다. 그리고 사회인 야구단의 포수이자 시인이 되었다. 여전히 야구를 하고, 경기를 보면서 시를 쓴다. 야구에 대한 수많은 기록 중 이토록 아름답고 사적인 기록이 또 있었나 싶다. ‘파울’은 아직 죽지 않은 인생에 대한 응원이라고 표현한 말처럼 시인의 언어로 바꾼 ‘야구 해설’도 남다르게 담겨 있다. 때로는 그도 야구 때문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인생과 꼭 닮은 야구장에서 온갖 희로애락과 108번뇌를 맛본다. ‘이게 다 야구 때문’이라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맞장구쳐주고 싶다. 정말, 야구가 뭐길래. 하지만 이미 야구가 인생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단어>를 낸 시인이자 문학과 지성사 편집자인 유희경은 시인의 딴 짓을 많이 제보해주었다. “성기완 시인은 삼호선 버터플라이라는 그룹으로 활동 중이고, 김이듬 시인과 김선우 시인도 소설책을 냈어요. 오은 시인은 곧 미술산문집을 출간할 것 같아요.” 그가 추천한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은 인간의 머리와 가슴을 오가며 벌어지는 온갖 감정을 사전의 형식을 빌려 서정적으로 풀어 쓴 내면의 요점 정리다. 외롭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고 동사다.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이 기억하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존경이 저절로 생긴 마음가짐이라면 옹호는 일종의 다짐이다. 명쾌한 정리가 가슴을 두드린다. 허연 시인에게 책 읽기는 ‘구원’이었다고 한다. 고전을 읽으면서 삶에게 던지고 싶은 수많은 질문에 대해 답을 얻고, 삶 속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들을 정리해서 <고전 탐닉>을 펴냈다. 시인이 마음의 결을 살핀 사전을 쓰고, 시인이 탐닉한 동서양 고전에 대해 풀어놓는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할 수 있겠지. 오은 시인은 출판계의 위대한 시리즈 중 하나인 ‘살림지식총서’ 중 ‘로봇’편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를 썼다. 제목 밑에는 좀 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 있다. ‘로봇과 서사’. 시집 <호텔 타셸의 돼지들>로 일약 문단의 총아이자 문단의 원빈으로 떠오른 오은은 로봇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며 로봇 서사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로봇이라곤 청소기 로봇 룸바밖에 모르는 내게도 이 얇은 책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봇과 서사이므로 로봇을 다룬 많은 영화와 책도 함께 등장한다. 사람들은 왜 로봇에 열광할까, 로봇은 인간의 편인가 적인가, 조종되어야 마땅한 로봇이 가지는 욕망의 위험함. 이 책을 읽고 영화관에 가서, 하필 <리얼 스틸>을 보게 되었다. 권투 하는 로봇 아톰이 인간으로 보였다.

<더 레터-두 시인의 편지>는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미니홈피 대문에 적어놓곤 했던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를 쓴 나희덕과 장석남 시인이 주고받은 편지를 담은 서간집이다. 몇 년 전, 공학도이자 뮤지션인 루시드폴과 의사이면서 시인인 마종기 시인이 주고받은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 출간되었을 때, 다정한 시인의 편지에 꽤 마음이 흔들렸었다. 6.25로 황폐해진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고향의 봄’이 흘러나왔을 때 비행기에 탄 장년의 남자들이 모두 앞 좌석 등받이에 이마를대고 흐느꼈다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편지는, 내밀한 고백이다. 나희덕과 장석남 두 시인의 편지는 ‘올드패션’하다. 이미 사라진 시대의 방식으로 바삐 돌아가는 세상과 동떨어진 언어를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들이 주고받는 편지의 행간에서 살구가 익고,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내는 슬픔이 기대고, 담담한 위로가 세워진다. 30통의 편지는 제각기 절실한 평화를 품고 있다. 아무래도 시인은 우주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종족임이 분명하다. 이들의 재능은 좀 낭비될 필요가 있다. 오늘도 심상을 길어내느라, 단어를 고르느라 고심하고 있을 시인에게 딴 짓을 권한다.

New Books

1.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 아직도 보여줄 게 많다고 말하는 걸까. 1979년부터 2010년에 걸쳐 있는 미공개 단편 소설, 다른 책을 위한 서문과 해설, 친구의 딸에게 보내는 결혼 축사 등 응축된 에세이 69편이 504페이지에 담겨 있다. 잡문이 짧지 않아서 다행이다. 비채

2. <로즈가든> 기리오 나쓰오 고정 팬이 도톰한 사회파 추리작가 기리오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시리즈 유일의 소설집이다. 미로의 여고 시절에 마주친 사건을 담은 일종의 프리퀄. 중단편이 실려 있어 또 다른 호흡으로 읽을 수 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제각기 입체적이다. 비채

3. <슬로 러브> 도미니크 브라우닝 <하우스앤가든>의 미국판 편집장인 저자는 갑자기 잡지가 폐간되면서 인생이 흔들린다. 일이 전부였던 그녀가 다시 천천히 살며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보다 열 배는 진지하고 괜찮은 책. 푸른숲

4. <아우디 그녀, 세상을 사로잡다> 이연경 아우디는 ‘아우디 그녀’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아우디의 본사가 있는 독일에서, ‘한강의 기적’이자 전 세계 사업부의 우상이며 롤 모델이 된 그녀는 말했다. “사실 나는 날라리였어”. 잘 놀아야 일도 잘한다. 문학동네

5.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기낙경 패션 매거진의 피처 에디터인 그녀에게 서른이란 서툴고 미숙한 의자에 앉는 시간이다. 서른의 여자들은 늘 들르는 카페가 있고 매번 앉는 자리가 있다. 또 ‘서른의 의자’가 있어야 한다. 앉아서 생각하며 길어 올린 삶의 단상들. 오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