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기에 현장으로 갔다. 피를 마시지 않고선 살 수 없는 뱀파이어 검사와 조선왕조 최대의 미스터리 속에 뛰어든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남자, 다시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과 토크쇼를 처음 진행하게 된 여배우의 떨림. 서둘러 프레임에 가둔 놀라운 순간들.




#6 여배우의 대담한 대담


배우가 토크쇼를 진행한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기억 또한 선명하 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이미숙이라면? 소파에 몸을 푹 잠기게 두고, 그녀가 이끄는 대담한 대담에 귀를 기울일 만하지 않나.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했다. 제작발표회가 열린 오후. 여배우답게 완벽하게 치장한 이미숙의 눈빛은 다른 때와 달라 보였다. 종종 보여주곤 했던 관능도 아니었고, 노련한 배우의 익숙함과도 달랐다. 새로운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의 자신감과 기대감이라면 설명이 될까. 그녀가 이끄는 토크쇼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 프로그램의 이름도 <이미숙의 배드신>. 이미숙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이름이며 기획이니까. 플래시가 계속 터졌고, 이미숙은 웃었다.

“저는 배우로서 한길만 걸어왔어요.” 누구나 궁금할 것이다. 그녀가 왜 토크쇼를 수락했을까? 30년 넘게 연기생활을 하면서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과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는 그녀다. 오로지 배우로서 내가 어떻게 나이를 먹고 연기를 해야 할지만 생각해왔고, 그런 마음이 그녀를 불혹의 나이가 훨씬 지난 지금도 정상에 올려놓지 않았나. 끊임없이 대중에게 스스로를 ‘여배우’로 인식시키는 배우가 처음으로 다른 일을 해보겠다고 선언했으니 배경이 궁금할 수밖에. “권민수 PD가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끝없이 설득했어요. 편지, 꽃다발, 선물. 수없이 말이에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이야기,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요.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연기 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좀 생기지 않았을까요?” 배우가 토크쇼를 진행한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기억 또한 선명하다.

가까운 예로, 영화계의 기둥 중 하나인 박중훈도 있지 않았나. 토크쇼는 그저 유명한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모든 성공한 토크쇼에는 제각기 명확한 콘셉트와 캐릭터가 존재한다. 마지막 회를 방송한 <무릎팍 도사>는 카운슬러와 샤먼을 자처하는 진행자를 내세웠고, <승승장구>는 끼리끼리 모이는 친구 모임을 주선하고, <힐링 캠프>는 여행을 떠난 야외에서 이뤄지는 대화 속에서 치유의 힘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미숙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녀의 차가움, 그녀의 도도함…. 그 부분은 토크쇼에 방해가 될까, 도움이 될까. 어쨌든 이미숙은 쉽게 말 붙여도 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고,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이 편하다고 이야기를 잘하고,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었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능력. 그런 능력을 발휘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서브 MC를 맡은 윤희석은 이미숙의 직설적인 화법 옆에서 조용한 존재감을 발할 작정이다. “<배드신>은 베드(Bed)가 아니라(Bad Scene)입니다. 게스트들의 힘들었던 경험이 나쁜 기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는 내용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토크쇼예요.” 누구에게나 운수 나쁜 날은 있다. 앞으로 수많은 배우의 배드신을 꺼내야 할 그녀가 먼저 자신의 배드신을 이야기했다. “아마도 배우에게 배드신은 긴 무명생활이겠죠. 그런데 난 고등학교 때 데뷔를 해서 계속 승승장구한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내 배드신은 바로 그거였어요. 현실에 부딪혀 정상에서 내려왔어야 했을 때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면 이런 역할과 연기를 해야 한다는데, 난 싫었거든요. 그래서 10년 동안 연기를 쉬었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람들이 저를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도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어요.” 이미숙은 그 과정을 모두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고 설명한다. 선배라는 이유만으로는 존경을 얻지 못한다는 걸 그녀는 안다. 연기의 선배이자 인생의 선배는 무엇보다 중심이 분명해야 하고, 이미숙은 그걸 가지고 있다. 살가운 편은 아니지만, 10년 후에도 똑같이 사람을 대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장혁, 이정재를 비롯한 쟁쟁한 배우들이 <배드신>을 찾았고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들이 장소는 이곳 씨네드쉐프다. 모두가 배우이기 때문에, 장소는 자연스럽게 스크린 앞으로 정해졌다.

“나는 딱히 착하지도 않지만 딱히 못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뭐든 느낀 대로 말하죠. 이건 장점이면서 단점인데, 뭐… 장점으로 봐주세요. 꼭 만나고 싶은 게스트? 젊은 남자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현빈, 원빈을 다들 원할 것 같은데 현빈 씨는 제대하려면 많이 남았죠? 그때까지 내가 이 프로그램을 할 수 있을까?” 에디터 | 허윤선




#7 영광의 시대


<제빵왕 김탁구>의 이정섭 피디와 강은경 작가가 <영광의 재인>을 위해 다시 만났다. <제빵왕 김탁구>가 1980~90년대의 희망을 이야기했다면, <영광의 재인>은 2011년판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빵 대신 야구, 탁구 대신 영광이다.

야구 경기장으로 가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동행하게 된 촬영 장소는 의외로 청파동의 작은 소금구이집이다. 천정명과 김승욱이 소주 한 병과 고기 몇 점을 두고 마주 앉았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딴 거 개나 먹으라고 주십시오.” 천정명의 으름장에 반대쪽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돌아본다. 그의 대사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오늘 이곳에서 꽤 무거운 내용을 촬영할 예정이다. 야구팀에서 퇴출당한 김영광이 코치와 만나는 장면으로 김영광 역을 맡은 천정명의 감정 연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특유의 천진한 웃음은 온데간데없고 미간에 주름만 가득 잡혔다. 그가 최 코치 역할을 맡은 김승욱과 리허설을 하는 동안 조연출은 고기를 굽고 기계까지 동원해 연기를 낸다. 작은 고깃집 안으로 금세 연기가 차올랐다.

<영광의 재인>은 사랑, 가족, 야구를 버무린 이정섭, 강은경표 드라마다. 50%의 시청률을 올리며 국민 드라마로 등극한 <제빵왕 김탁구>를 만들어낸 이들인 만큼 그때의 인기를 다시 한번 재현할수 있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번 드라마에서 천정명은 가진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은 야구뿐이지만, 자신감 하나만큼은 최고인 2군 야구 선수 김영광 역을 맡았다. 박민영은 명랑한 간호조무사 윤재인으로, 이장우는 까칠한 재벌 2세 서인우로 변신했다. 최명길, 손창민, 박성웅, 이문식 등 연기파 배우들도 대거 합세했다.

“감독님과 작가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대본을 보고 극중 영광의 캐릭터가 저랑 비슷한 점이 많아 애착도 생겼고요. 촬영하다 보면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있는데 감독님이 워낙 에너지가 넘쳐서 덩달아 기분 좋게 촬영하고 있어요.” 천정명은 전직 프로야구 감독에게 직접 야구를 배우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덕분에 야구 선수로서 해내야 할 어려운 장면도 대역 없이 소화했다. “야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막상 배워보니 정말 어렵더라고요. 프로선수인 만큼 폼 하나하나에도 신경 써야 하고요. 타석에 들어서면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몰라요. 공을 던지는 분이 선수였는데 정말 눈 깜빡하니 공이 포수 글러브에 들어가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빠지더라고요. 그걸 극복하는 게 아직도 어려워요.” 물론 야구만 하는 건 아니다. 재인과 연애도 하고 동료와 싸우기도 하고 이렇게 코치와 술을 마시며 울분을 터트리기도 한다.

긴 리허설이 끝나고 드디어 피디가 “자, 촬영 들어갑니다”를 외친다. 최 코치가 영광이에게 술을 한잔 따르며 첫 대사를 치는데 주방에서 달그락 소리가 난다. “어머니, 설거지 잠깐만 멈춰주세요.” 다시 “액션!” 최 코치가 첫 대사를 뱉는데 이번에는 피디가 중단시킨다. “최 코치님, 지금 술을 2병 마신 상태예요.” “아, 그래? 난 이게 첫 잔인 줄 알았어.” 또다시 “액션!” “아들 불러서 돈 이야기 하지 마라, 아들이 무슨 돈이 있노, 니랑 도찌니 개찌니지.” 최 코치가 걸쭉한 사투리를 구사하며 혀 꼬인 음주 연기를 선보인다. 영광이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잡혀 있다. 이어받아 대사를 치는데 자신의 연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몇 번이고 다시 컷이 돌아간다. 고깃집 분위기를 내기 위해 동원된 기계는 쉴 새 없이 천정명의 얼굴에 연기를 뿌려대고 있다. 연기가 꽤 매울 텐데 조금의 미동도 없다. 그는 지금 오직 영광이 생각만으로 간절해 보인다. “굶어 죽어도요? 집을 뺏기고 길바닥에 나앉게 생겨도요? 그래도 야구인의 자부심이나 지키라는 겁니까?” 목소리는 한층 절제되었고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그제야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간의 주름을 편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스태프들이 다음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마주 앉은 선배에게 그간 자신이 어떤 장면을 촬영했는지 스토리를 읊어댄다. 소품으로 놓인 고추도 한입 베어 먹는다. 타는 고기를 뒤집고 의자 위치를 바꾸면서 스태프의 손을 돕기도 한다. 피디가 그에게로 와서 어깨를 두드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때 서로가 주고받은 눈빛만큼은 서로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영광의 재인>이 안타를 칠지, 홈런을 칠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좋은 선수와 좋은 감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선수와 좋은 감독을 가진 팀은 여태껏 우리를 실망시킨 적
이 없다. 에디터 | 조소영




#8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


처음엔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이 작가들이, 이 작품들이 왜 한 자리에 모일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전시 시작을 하루 앞두고 설치 준비가 한창인 논현동의 한 갤러리에서였다.

B-E 갤러리에 두 그룹의 작품이 나란히 놓였다. 그런데 하나의 주제로 선보이게 될 작품이 이렇게 달라도 되나 싶다. 작품의 모양새는 물론이고 그것을 만들고 있는 작가들의 성향까지도 말이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좀처럼 말이 없는 러프 디자인의 이재하, 정지호와는 달리 모토엘라스티코의 시모네 카레나(Simone Carena)와 마르코 브루노(Marco Bruno)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까부터 그저 싱글벙글이다. 내일 있을 전시 오프닝을 위해 막바지 설치 작업을 하는 중에도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급기야 모빌에 걸어야 하는 작품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이재하와 정지호도 그제야 고개를 들고 한바탕 웃는다. 그러더니 금세 또 표정을 바꾸고는 조용히 가구를 손질하기시작한다. 언뜻 공통 분모랄 게 없어 보이는 두 팀의 작가들은 이번 전시에서 ‘모듈’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통한 변형의 다양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가구 디자이너인 이재하와 정지호는 건축 자재로 쓰이는 각재와 금속 큐브를 통해 ‘원 바이 원 가구’를 만들어냈고 이탈리아 건축가 시모네와 마르코는 2003년부터 디자인해온 ‘오토 시리즈’를 발전된 형태로서 소개했다. 이들은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 모토엘라스티코를 만들어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도시 개발, 인테리어, 가구 디자인,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섬세한 시모네와 마르코의 오토 시리즈는 그들의 캐릭터와도 꼭 닮았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등 7개의 평면 플라스틱 시트를 통해 조명과 의자 테이블을 만들어봤습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옷도 만들고 아주 커다란 오브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만드는 사람의 상상력에 따라 무한하게 변신할 수 있거든요. 여기에 있는 우리의 작품들은 완성된 형태이기보다는 다음 형태로 변화하기 위한 전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플라스틱 시트를 가지고 관람객들이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어요. 그들이 이제까지 우리가 만들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거죠.”

안쪽으로는 이재하와 정지호가 만든 가구가 자리 잡았다. 조명과 테이블, 옷장, 의자, 수납장까지 그 쓰임새는 다 다르지만 하나의 맥락으로 만든 간결하고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모듈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1인치의 각재라는 소재를 선택하고 그것을 가구의 구조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죠.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 해결책으로 금속 큐브를 생각해냈는데 덕분에 각재를 자유자재로 이어가며 재미있는 변형이 가능해졌어요.”

각재가 선의 역할을 맡고 있다면 선들을 이어주고 방향성을 부여하는 금속 큐브는 점을, 합판은 각재에 맞물려 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인치의 곧게 뻗은 각재로 만든 가구는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만 곳곳에 의외의 변화를 시도한 덕분에 뻔하지 않은 모양을 자랑한다. 시모네와 마르코에게 ‘플라스틱 시트’가 있다면 이재하와 정지호에게는 ‘각재’가 있는 셈. 각재와 플라스틱 시트는 무한하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기본적인 뼈대로서의 역할을 하며 전시의 주제인 ‘변형을 통한 다양성’을 드러냈다.

목을 한참이나 빼내 작품을 들여다보는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모네가 자신이 만든 비디오 아트를 틀었다. 무한하게 변형되는 오토 시리즈의 모습을 신나는 음악과 함께 만든 영상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제가 한때는 뮤직 비디오 감독이었거든요. 음악, 비디오, 디자인, 건축까지 결국은 다 하나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전혀 달라 보이는 이 공간 안의 작품들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에디터 | 조소영




#9 Let’s Party Time!


<스트릿 라이프>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신난 뮤지컬로 입소문났다. 두 시간 뒤면 무대에 설 세 주인공들과의 짧은 만남 후 나 역시 “공연 며칠까지 해요?”라고 묻지않을 수 없었다.

<슈퍼스타K>와 <위대한 탄생>의 오디션 참가자들을 볼 때마다 세상에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생각한다. ‘뮤지컬 배우들이 저기 나가면 TOP 10 진출은 따놓은 당상일 텐데’ 하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상에 뮤지컬 배우만큼 활력 있고 재능 넘치며, 훈훈한 비주얼까지 겸비한 존재들이 있을까? 그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들은 바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가 좋아서’ 무대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이들에게는 선택한 길을 의심 없이 곧게 달려가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에너지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슈퍼스타K>에 나가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뮤지컬 <스트릿 라이프>는 뮤지컬 배우들이 아드레날린을 무한정 방출할 수 있는 최고의 판이다. 올 8월, CGV홀에서 첫 공연을 가진 이 신생 뮤지컬이, 어떤 스타 출연자도 없이 불과 2개월 만에 대학로에 진출하며 앙코르 공연을 가지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3인조 아이돌로 데뷔한 나이트클럽 직원들이 기획사에 사기를 당한 후 다시 그들만의 무대를 찾는다는 명료한 스토리 라인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DJ DOC의 노래와 춤을 곁들였는데 어느 누가 가만히 앉아 있겠나?

공연이 두 시간 남은 오후 6시,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힘찬 인사와 함께 <스트릿 라이프>의 주인공 세 명이 무대에 올랐다. <바람의 나라>, <위대한 캣츠비> 등 1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뮤지컬 판에서 뼈가 굵은 김태훈, 연극 <이>에 이어 한국 뮤지컬의 교과서 <사랑은 비를 타고>에 출연한 정원영, 그리고 처음으로 뮤지컬 무대에 오른 영화 <영화는 영화다>의 배우 강홍석이 주인공이었다. 세 명 모두 캐릭터에 빙의된 듯, 팸플릿에 쓰인 간략한 캐릭터 소개만 읽고도 이들이 각각 어떤 배역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룹의 리더이자 야심 있는 래퍼 강재민 역의 김태훈의 눈빛은 시종일관 날카로웠고, 달콤한 캐릭터인 보컬 이수창 역의 정원영은 부드럽게 웃었으니까. 나이트클럽 삐끼에서 래퍼로 팀에 영입된 순수남 정훈 역할의 강홍석 역시 “아이돌 그룹 화보처럼 멋있게 찍을게요.” 라는 처음의 주문에 “아, 나 멋있는 거 진짜 안 되는데” 하며 당황하는 모습이 극중 캐릭터와 자연스레 겹쳤다. “제가 나이트클럽 삐끼여서 명함을 나눠 주는 장면이 있는데요, 어떤 남자분이 명함을 받았으니 자기도 줘야겠다며 명함을 주시는 거예요. 삼성 직원이시더라고요” 하고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공연장의 분위기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본공연 때는 열댓 명이 오르는 무대의 분위기를 이 세 명이 재현할 수 있을까. 걱정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날아갔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세 명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작과 표정을 조금씩 바꿨고, ‘이렇게 움직여주세요’ 라고 주문할 틈도 없이 생각지도 못한 포즈가 쏟아져 나왔다. TV에 매일 나오는 아이돌도 롱테이크에 들어가면 어떤 포즈를 잡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통에 이렇게나 능숙한 모습이라니! 사진가도 나도 “좋아요, 지금 좋습니다”라는 말 이외에는 더할 말이 없었던 촬영은 순식간에 끝났다.

넘치는 이들의 끼가 멍석이 깔린 무대에서는 대체 얼마나 발산될지 상상했다. 두 시간 뒤면 뜨거운 열기의 현장이 될 이 무대에 좀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을 누르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현장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공연장을 떠나며, ‘꼭 공연을 보러 오겠다’고 말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같은 약속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이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물었다. “어떤 곡을 부를 때가 제일 신나요?” 정원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부요. 이작품은 정말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너무, 정말 너무 신나요.” 에디터 | 이마루




#10 드라마의 발견


밤이 찾아온 세트장 안은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그러다가도 어디선가 ‘레디’가 들려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어떠한 순간에도 변하지 않은 건 장혁의 눈빛,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스태프들의 태도였다.

장혁은 “안녕하세요” 하고 낮지만 힘있는 음성으로 인사하며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세트장 밖에는 나이가 지긋한 수십 명의 조연 배우들이 얇은 의상 위에 두꺼운 점퍼를 하나씩 걸친 채 분장차 앞에 일렬로 앉아 메이크업을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집현전의 학사가 살해를 당해서 채윤과 초탁이가 수사를 벌이는 장면으로, 스토리가 꽤 전개된 시점에 들어가게 될 장면이다. 이 한 컷을 위해 촬영장을 찾은 장혁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몇 번이고 다른 연기자들과 입을 맞추고 피디와도 한참 동안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책상 위 벼루에 먹물이 채워지고 배우들의 수염, 모자에 달린 술의 위치, 옷 매무새와 마이크 그림자까지 제자리를 찾아간다. 좁은 세트장 안을 가득 채운 수많은 스태프의 손이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사실 <뿌리깊은 나무>의 취재를 위해 파주의 세트장을 찾은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이틀 전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아침 6시, 정확히 같은 장소에 도착했었다. 세트장에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의 비질이 한창이었고, 지난날 늦게까지 이어진 촬영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마침 그날은 스토리의 핵심이 되는 세종의 신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늦어지는 촬영에 밤을 지새우고 다시 촬영을 재개한 장태유 피디는 <얼루어>의 동행 취재에 난색을 표했다. 약속된 일정에 맞춰 찾아왔지만 변수가 많은 촬영장의 상황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틀 후 다시 세트장을 찾게 된 것이다.

오늘 저녁 세트장 촬영을 맡은 이는 장태유 피디와 공동연출을 맡은 신경수 피디. 작은 디테일 하나, 짧은 대사 한마디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는 깐깐한 연출자로 유명하다. “호흡을 하나, 둘, 셋, 넷까지 하고 다음 대사 들어가세요”, “눈을 너무 많이 움직이지 말고 질문한 사람만 쳐다보면서 말하세요.” 덕분에 한 장면을 위해 벌써 수십 번째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피디가 ‘레디’를 외치면 카메라 안에 들어선 세 명의 연기자들은 물론 현장의 스태프들까지 숨소리를 죽이는데, 그 순간에는 밖에 부는 크지 않은 바람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릴 정도다. 얼마 전 영화 <의뢰인>에서 보았던 섬뜩한 눈빛의 한철민은 온데간데없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갇혀 갈아가는 강채윤의 진중한 눈빛만 남은 장혁이 대사를 내뱉는다. ‘OK’ 사인이 떨어지고 다음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순간, 큰 모자의 그림자가 얼굴의 반을 가렸는데도 흔들림 없는 눈빛은 그대로다. 가까이 비치는 조명에 눈이 시릴 법도 한데 같은 대사를 몇 번이고 내뱉으며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한석규, 장혁, 신세경이 출연하는 SBS 수목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전, 집현전에서 일어나는 학사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카리스마와 연륜이 깊어진 세종 역의 한석규, 진정성과 유머를 가진 강채윤 역의 장혁, 청초 하면서도 은밀한 소이 역의 신세경.” <뿌리깊은 나무>의 김영현 작가는 이 세 명을 주인공으로 낙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했다.

“<추노>의 이대길 때문에 액션 배우로 내 이미지를 한정하는 분들이 많아요. 강채윤은 이대길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연기와 액션 스타일 역시 다릅니다. 드라마 자체도 액션사극이 아니라 수사물에 가까워요. 대길이는 어제, 오늘, 내일이 별 작용을 안 하는 캐릭터였죠. 그냥 매일이 오늘이었어요. 채윤은 어렸을 때 트라우마가 너무 강해서 잠을 못 잘 정도로 노이로제가 심해요. 오늘과 내일이 없고 과거에만 매여 있는 인물이죠. 왕에게 대항할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를 표현해야 하는데 그걸 연구하고 표현하는 게 재미있어요.” 모르긴 몰라도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에 강채윤이야말로 가장 적임자를 만난 게 아닌가 싶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던 촬영이 끝나고 장혁은 세트장을 들어설 때와 같이 낮고 힘있는 음성으로 “어떻게 사진은 많이 찍으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며 세트장을 빠져 나갔다. 에디터 | 조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