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기에 현장으로 갔다. 피를 마시지 않고선 살 수 없는 뱀파이어 검사와 조선왕조 최대의 미스터리 속에 뛰어든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남자, 다시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과 토크쇼를 처음 진행하게 된 여배우의 떨림. 서둘러 프레임에 가둔 놀라운 순간들.




#1 민중의 뱀파이어


법의 정의를 세상에 구현하는 창백한 얼굴의 검사에게는 비밀이 있다. 인간의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는 점에서 캐릭터를 닮은, 연정훈이 돌아왔다.

촬영장의 연정훈은 말이 없었다. 실제로 이날 그가 촬영하는 장면에는 대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정훈은 이곳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뱀파이어 검사 민태연은 자신의 초월적인 힘을 숨긴 채, 평범한 인간 형사인 이원종이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다. 마치 지루함을 달래려는 듯 라이터를 켰다 껐다 하면서.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 저주받은 신. 뱀파이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것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육체의 연약함과 노화와 죽음을 뛰어넘은 존재는 경이롭다. 영화와 책 속에서 수없이 재생산된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인간의 이상향에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피를 마시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인간을 해쳐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착한 뱀파이어’의 존재를 창조해냈다. <뱀파이어 검사>는 이 ‘착한 뱀파이어’의 계보를 잇는 드라마다. 어느 날 갑자기 뱀파이어가 된 검사 민태연은 자신의 힘을 좋은 일에 쓰기로 한다.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죽은 자의 피를 마시는 사이 그에게 초능력이 생긴다. 죽은 자의 피를 마시면, 죽을 때의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런 사이코메트리 능력으로 범죄를 해결해나간다. 연정훈은 며칠 후 열린 제작보고회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 촬영장에서는 피 대신 복분자를 마시는데, 한번은 체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던 적도 있어요. 뱀파이어로 사는 인생은 정말 괴롭더군요. 뱀파이어에겐 검사라는 직업이 적격인 것 같아요.”

뱀파이어 검사, 아니 뱀파이어의 검사를 연기하는 연정훈은 일산의 거대한 몰 ‘웨스턴 돔’의 2층 난간에 기대어 1층을 바라보고 있다. 1층에서는 의욕 넘치는 형사로 분한 이원종의 범인 추격이 한창이다. 쇼핑몰에 모여든 사람은 ‘구마적!’을 외쳤다가 ‘연정훈!’을 보고 놀랐고, 스태프들은 카메라 앵글에 걸리지 않는 위치로 구경꾼들을 통제하느라, 감독의 지시에 따라 붐 마이크를 올리고 내리느라 정신이 없다. 검은 옷에 모자를 쓴 범인이 달아나고, 지퍼 달린 카키색 점퍼를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형사가 바짝 뒤따른다. 급정거한 차에 몸이 부딪히는 이 장면은 열 번쯤, 국수 배달을 가는 여자와 부딪히고 쓰러진 여자가 이원종의 얼굴에 비빔국수 가락을 던지는 장면은 다섯번쯤 촬영한다. 다시 연정훈이 뱀파이어 검사로 바뀌는 장면. 그냥 못 본 척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도와주는 게 좋을까? 미리 정해둔 동선을 따라 연정훈은 결심하듯 빠르게 걷고, 이원종은 넘어지고, 범인은 주차장으로 달아난다. 컷. 얼굴에 비빔국수 세례를 받은 이원종을 향한 박수가 터지고 연정훈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돈다. 이원종은 극중에서 연정훈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동료를 연기할 예정이다. 수많은 스태프는 서둘러 조명이며 장비를 챙겨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곧 액션 신이 펼쳐질 예정이라 크레인을 설치하고 와이어 액션 장비를 점검하느라 분주하다.

<뱀파이어 검사>는 연정훈의 복귀작이다. 그만큼 고심해서 고르고,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후문이다. 뱀파이어의 날렵한 이미지를 위해 체중을 감량하고 액션 연기에 공을 들였다. 1편에서 등장한 유조차 폭발 장면도 직접 운전한 것이다. <탑기어>의 진행자답게 운전을 너무 잘해서 감독이 무섭다고 소리를 칠 정도였다고. “뱀파이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걱정을 했죠. 시청자들이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는 그 다음이었어요.” 고민은 현장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범인 역의 배우가 몸 안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액션 장면을 위해 무술 감독이 등장해 ‘합’을 맞추자 연정훈의 표정이 한결 진지해진다. 범인은 인간답게, 연정훈은 뱀파이어답게 싸워야 한다.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싸움에 능한 모습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연정훈의 말. 모두 동의하고, 다시 액션 연기의 ‘합’을 맞춘다. <뱀파이어 검사>는 강도높은 액션 장면을 예고하고 있는데, 영화 <바람의 파이터>, <우아한 세계>의 무술감독으로 활약한 이홍표 감독이 액션 연기를 지도하고 있고 연정훈도 3개월 동안 액션 연기 지도를 받았다. 덕분에 연정훈의 동작은 꽤 기품이 있다. “이소룡의 제자에게 절권도를 배웠어요.” 드라마 제작사 초록별 미디어의 김태연 대표가 흐뭇하게 말했다. “일단은 15부작으로 시작해요. 시즌제로 가는 건 모든 드라마 스태프의 바람이죠. 오늘 촬영이 끝나면 밤새 후작업을 합니다.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후반 작업에도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어요.” <뱀파이어 검사>를 기획한 이승훈 PD의 말처럼, <뱀파이어 검사>는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의 한계가 아닌, 케이블이라서 할 수 있는 도전을 보여주고 있다. 총 제작비는 30억원에 달하고 촬영감독은 영화 <최종병기 활>의 김태성 감독이다. “<뱀파이어 검사>의 포인트는 ‘피로 푸는 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뱀파이어로의 욕망과 검사로서의 성격이 충돌하면서 재미있는 요소가 더 많이 생기죠.” 김병수 감독의 말이다. 이날의 촬영은 저녁에 시작해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촬영장만큼 기다림의 미학을 새삼 깨닫게 되는 장소도 없을 것이다. 시간은 빠른 것 같으면서도 더디게 갔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기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에디터 | 허윤선




#2 당신의 빨간색


<레드>의 리허설 현장을 떠나는 건 쉽지 않았다. 끝까지 그 자리에 서서, 마지막 대사까지 듣고 싶었다. 배우와 관객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무대에서 나는 유일한 관객이었다. 지적이면서 인생의 통찰을 담고 있는 대사들은 마음속 깊이 파고들고 배우들의 몸짓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예술가를 연기하는 예술가들의 연기는 붉고 뜨거웠다.

대학로의 연습실 바닥은 붉은 물감이 추상화처럼 떨어져 있다. 잭슨 폴락의 작품 같다고 말하면, 이 연극의 실제 주인공인 마크 로스코는 화를 냈을까? 마크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을 연기하는 강신일과 강필석 두 배우의 바지 자락에도 어김없이 붉은 물감이 매달려 있었고, 신발로 내려갈수록 붉은 원은 점점 진해졌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배우와 눈을 맞추는 연출 팀장의 맨발에는 붉은 물감만큼이나 회색 먼지가 뒤엉켜 있다. 시월의 첫날, 나는 이 연극 무대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첫 공연이 10월 14일에 시작되니까, 지금이 연습의 절정인 셈이죠.” 강필석이 말했다. 완성되지 않은 연기와 무대를 보여주는 건 배우에게나 연출자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연습이 시작되자, 침입자의 존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늘 관객과 마주 보고 함께 숨쉬어야 하는 연극 무대에 단련된 배우들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연습을 이어갔다. 이미 모든 대사와 연기는 완성되어 있었기에 이날의 연습은 실제 공연을 전부 연기하며 좀 더 디테일한 부분을 맞춰보고 다듬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긴 대사 중 어디에 쉼표를 찍을 것인가. 물감통은 어디에 내려 놓을 것인가. 손은 멈출 것인가 움직일 것인가. 그런 작은 부분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줄 것이다. 연극 <레드>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를 통해 인생의 열정을 이야기한다. 작가 존 로건은 마크 로스코가 생전에 남긴 이야기를 각색해, 마크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Ken)으로만 이루어진 2인극을 만들었다. 2009년 초연된 <레드>는 작년에 토니상 6개 부문을 휩쓸었다. 영화 촬영장과 연극 무대를 분주히 오가는 강신일이 마크 로스코를, 뮤지컬 배우에서 정극 배우로 무대를 넓힌 강필석은 켄 역할을 맡았다. 스승을 존경하고 언젠가 스승을 뛰어넘어야하는 제자이며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들, 기성세대를 전복하는 젊음.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마크 로스코와 달리 켄은 허구의 존재다. “대본을 처음 읽고 소름이 돋았어요. 스릴러는 아니지만, 그 못지않은 긴장감이 있었어요. 위대했던 작가에게 새파란 젊은이가 대드는 긴장감이 그랬어요. 대본을 봤을 때 가장 강렬했던 대사는 선생님의 대사였죠. 모든 게 다 좋으면, 그냥 좋은 것과 존중할 만한 것, 가치있는 것을 구별하는 잣대는 대체 어디 내다버린 거냐고.” 대본의 흡입력에 매료된 건 강신일도 마찬가지다. “대본이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죠. 어떻게 이런 작품을 썼을까, 감탄했을 정도였죠. 대본이 갖고 있는 재미와 감동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부분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하는 강신일. 그가 가지고 있는 배우의 오라는 마크 로스코라는 대화가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 조금의 주눅도 들지 않는다. 그렇게 예술가가 예술가를 연기한다. 그 과정에서 느꼈을 공통된 코드가 궁금해졌다. 감히 마크 로크소라는 당대의 화가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술과 함께 시대의 문화를 담당하는 배우로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신일은 말했다. “마크 로스코의 젊은 시절에는 용기, 도전, 에너지가 있었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자신이 이룬 업적을 보호하고 싶고, 그것이 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기성세대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일입니다. 나 자신이 연기자로서 도전하고 열망했던 것과 나이가 들면서 마주치는 여러 장면이 작품과 겹쳐지기도 합니다.” 본래 참 조용한 성격이라는 강필석은 강신일 앞에서는 밝아진다. 아마도 켄이라는 인물의 에너지가, 배우를 물들인 것 같다.

강필석이 캔버스를 준비하는 동안, 강신일은 테레빈유와 달걀을 넣고 휘저어 물감을 만든다. 마크 로스코와 켄이 함께 캔버스를 섞고 함께 밑칠을 한다. 모두 연극의 장면이다. 채 30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에 거대한 캔버스가 붉게 물든다.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아래에서 위로! 붓을 든 두 남자는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어느새 붉게 완성된 캔버스는 세 번째 주인공으로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마크 로스코와 켄은, 아니 우리는 인생에서의 붉은색을 찾을 수 있을까.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작품에 어떠한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생전의 마크 로스코는 말했다. 좋은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흥과 감동이란 그런 것이다. <레드>의 무대에서 빠져 나온 후의 긴 침묵처럼. 에디터 | 허윤선




#3 배우는 유리창 너머에 있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박희순과 박시연을 지켜봤다. 유리창에 가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무성영화 시대의 관객처럼 유리창 너머를 상상했다.

“내가 형사니까 더 믿을 수 있잖아!” 박희순의 목소리가 유리창을 뚫고 들려온다. 여기는 용인시 기흥구. 한진화학의 연수원을 개조해서 만든 주택의 거실에 박희순과 박시연이 서있다. 사설탐정역의 박희순이 의뢰인 박시연의 독단적인 행동에 화를 내는 장면이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선나와 두 배우 사이에 놓인 거리는 5미터 정도. 48인치 HDTV화면을 통해 50센티미터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5미터 앞에 존재하는 실제의 배우들은, 당연하게도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전부 훔쳐듣기에는 먼 거리여서 나는 조용히 두 배우의 몸과 얼굴을 주시했다. 생각보다 길고 가는 몸을 가진 박희순의 표정은 자유로웠다. 두 눈이 동그래지며 미간에 주름이 잡히나 싶더니, 이내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올라간 입 끝만이 살짝 보였다. 반면, 박희순에게 몸을 돌린 채 서 있는 박시연의 얼굴은 비현실적이었다. 봉긋한 이마에서 시작해 버선코처럼 매끄럽게 올라간 코를 지나 턱선까지 이어지는 옆선은 ‘선’이라는 고운 단에 정확하게 부합했고 깡마르지 않은 굴곡 있는 몸은 완연한 여성의 것이었다. 영화 관련 기사가 박시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온통 팜므파탈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년 2월 개봉을 목표로 하는 영화 <간통을 기다리는 남자(가제)>는 코믹 에로 스릴러물이다. 남편의 외도 현장을 습격해달라는 수진의 요청을 받고 현장에 찾아갔다가 살인 용의자로 몰리게 된 사설탐정 선호가 개미핥기 혀처럼 끈끈하게 들러붙는 누명을 벗기 위해 두뇌싸움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이미 2009년 설경구, 류승범 주연의 <용서는 없다>로 한차례 스릴러물을 선보인 김형준감독은 이번 작품이 전작보다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지점이 많을 거라고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현장의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까다로운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전해 들은 터라 당일까지도 전전긍긍했던 게 허무할 정도였다.

현장은 분주했다. “미술감독님, 화면에 이 스탠드 나와요? 우리 창문 좀 닦아야 될 것 같은데.”, “선호, 지금 상황에 신발 벗는 거 너무 한국적이야. 그냥 신발 신고 들어가세요.”, “이제 수진 씨 내려오라고 해.” 스태프들은 일벌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윙윙대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박희순과 박시연을 당연하게도 선호와 수진이라 불렀다. 여러 대의 조명과 모니터, 카메라, 크레인, 전력기, 정수기 등 온갖 장비가 늘어서 있고 수십 명의 스태프가 움직이는 풍경은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영화 촬영 현장과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았다. 불꽃 튀는 연기가 펼쳐지는 장면 대신 배우의 동선과 뒷모습을 기록하는 짧은 컷들이 이어졌고, 단 한순간도 현장을 제압하려 하지 않던 감독은 감독 의자에 앉아 있는 대신 리허설 중인 배우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살피거나 크레인에 올라 모니터 화면을 확인했다. 놀라운 것은 ‘슛’소리가 들어가는 순간 찾아오는 고요였다. 모두가 그 한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는 일체감. 육각형의 작은 방이 모여 이룬 하나의 벌집처럼, 현장도 그랬다. 여기있는 모두 큰 그림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 두 배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리허설 중인 박시연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혼자 발성을 가다듬는 모습을 바라보며 5미터 너머의 긴장감에 대해 상상했다. 한 장면을 마칠 때마다, 박희순은 혼자 정원의 소파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혼자 앉아 있는 그에게 “팬이예요.”라는 흔한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연기하지 않고 있는 그를 볼 때도 느껴지는 유리벽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떠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 하고 손을 흔드는 박희순을 멀뚱히 쳐다보며 ‘진작에 말을 걸어볼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그는 다시 유리창 너머였다.
에디터 | 이마루




#4 요즘 남자들


얼굴로 보나 평균 키로 보나 10cm는 영락없는 요즘 남자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랑 ‘사귈래 죽을래’라고 묻고, ‘내 몸엔 팬티스타킹 오감이 찌릿찌릿’이라고 과감히 말할 줄 안다는 거다.

“끈적끈적해.” 생각은 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실이었다. 리허설을 시작한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는 가사 그대로 ‘농밀한 오르가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권정열과 기타를 치는 윤철종. 10cm를 이루는 두 남자는 이렇다 할 움직임 없이 각자의 역할에 집중하며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지만 무대는 이미 뜨거웠다. 한겨울 차창에 서리는 뜨거운 입김의 온도처럼.

<무한도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때의 모습이나 아카페라 CF에 삽입된 ‘아메리카노’로 10cm를 기억하는 이라면 10cm를 ‘끈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콘서트를 세 시간 남겨둔 어느 토요일 오후 2시, 권정열의 성대가 쫀쫀하게 감아 올린 노래의 가사는 이랬다. ‘만지고 싶은 향기 새빨간 구두 소리에 또다시 눈에 요염히 드러난 허벅지와 튿어진 스타킹. 입술은 말라가고 담배는 젖어가는데 못내 애태우며 허리띠 춤을 조여오는 그대의 스타킹’. 덩달아 스크린에는 붉은 미니원피스에 망사스타킹을 신은 여자가 허리를 돌리는 애니메이션이 몇 번이고 흘렀다. 콘서트의 시작을 알린 ‘Kingstar’는 지난 1월에 발매한 정규앨범 <1.0>의 첫 번째 트랙이기도 하다. 스타킹 페티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 10cm는 자신들의 능글맞음에 대해 당당하다. ‘잠들 때까지 머릿결을 만져줘요. 믿어줘요,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냐’ 라고 노래하던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는 생전 처음 보는 치덕거림이었다. 다행히 이런 그들을 귀엽게 웃으며 넘어가줄수 있는 여자들은 많았다. ‘이러다 정말 미쳐 돌아버리면 어쩌나 이러다 진짜 숨이 덜컥 멎으면 어쩌냐’던 ‘죽겠네’는 어설픈 은유 따위 존재하지 않는 사랑 노래였다. ‘죽을래, 사귈래. 아니면 나랑 살래, 어떡할래’ 라고 외치던 ‘죽을래 사귈래’는 말할 것도 없다.

10cm의 매력은 이 지점에 있다. 스스로 농담 삼아 맨해튼 스타일이라고 칭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보다 조금 나은 외모의(<무한도전> ‘하나마나 가요제’에서 10cm 대역은 남자 두 명만 섭외하면 된다고 했던 것은 과장이 아니다.) ‘요즘’ 남자들이 이토록 능청맞고 강력하게 사랑을 구애한다는 것 말이다. 남자들이 행여나 마초로 오해받을까 단어와 행동을 고르고, 그들 역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밀고 당기는 것이 당연하게 된 요즘은, 투박하지만 노골적인 수컷들이 가끔 그립다. 그리고 10cm는 이 점을 파고든다. 이 점을 여자들만 알아채진 않았다. 리쌍은 신곡 ‘TV를 껐네’에서 권정열에게 ‘이대론 잠 못 자요, 넌 너무 아름다워. 난 오늘 이 밤을 보내기는 아쉬워요.’를 부르도록 했으니까.

무대 아래에서 지켜본 10cm의 유혹은 끈적였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관객의 감성이 받아들일수 있는 적정선과 수위를 아는 것은 이들의 장점이다. ‘Kingstar’가 끝난 후 달궈진 무대에는 “기타 소리가 여전히 둔탁하게 들려요.”, “고음 부분에서 마이크가 나가네요.” 같은 간단한 요청이 오갔다. 권정열은 특별한 모션 없이 정자세로 꼿꼿이 서서 자신만만하게 노래를 불렀고, 그보다 수줍어 보이는 윤철종은 연주를 하는 내내 고개를 거의 들지 않았다. 권정열이 젬베를 연주하며 ‘우정, 그 씁쓸함에 대하여’와 ‘사랑은 은하수 다방’을 부르기 시작한 순간, 분위기는 경쾌하게 바뀌었다. 나는 노래들을 따라 부르기도 하고 신이 나서 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한껏 온도가 올라간 이 ‘요즘 남자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디터 | 이마루




#5 당신이 모르는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 이름을 듣는 순간, 습관처럼 어떠한 장면을 상상했고 어떠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들이 춤추고 연기하는 그 작품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그것이 아니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범상치 않은 악센트로 영어를 구사하는 안무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넓지 않은 연습실에 모인 마흔 남짓 무용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한다.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상임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조안무가인 조반나 로렌조니. 그녀는 마이요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국립 발레단 무용수들의 안무를 지도할 예정이다. 손가락 끝의 모양이나 호흡, 다리를 올리는 각도까지 직접 시범을 보이는데,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일어서고 있으니 차라리 계속 서 있는 편이 나을 정도다.

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모인 건 10월 27일부터 4일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릴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위해서다. 김용걸과 이동훈이 로미오, 김지영과 김주원이 줄리엣에 캐스팅 되었고, 오늘 연습실에서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동훈과 김주원이 맡았다. 2002년, 마이요의 작품에 줄리엣으로 열연했던 김주원은 9년 만에 다시 같은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줄리엣의 어머니인 마담 캐퓰렛 역할까지 두 인물을 연기한다는 거다. “두 개의 역할을 넘나드는 것이 쉽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몬테카를로 측에서 원했기 때문에 믿고 하게 되었어요. 같은 작품을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요.” 김주원보다 8살 아래인 로미오 역의 이동훈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김주원의 상대역을 맡게 되었다. 대선배와 함께 연기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연습 초반에만 해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리드하며 익살맞고 여유로운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앳된 얼굴이지만 기술적으로나 신체적인 부분까지 로미오에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어서 마이요의 깐깐한 오디션을 한 번에 통과했다는 후문이다. 김용걸 역시 로미오와 로렌스 사제 역에 더블 캐스팅되었다. 안무가가 오늘의 커플을 지도하는 동안 그들의 뒤켠에서 로미오와 로렌스 사제를 넘나들며 부지런히 연습을 이어가고 있다. 마이요의 작품은 기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다르다. 그는 작품의 제목을 <줄리엣과 로미오>로 정하길 원했을 정도로 줄리엣에게 높은 비중을 두었고, 지고지순하고 연약한 여인이 아닌 적극적이고 강한 자아를 지닌 여성으로서의 줄리엣을 만들어냈다. 또한 로렌스 사제, 캐퓰렛 부인, 티볼트와 머큐쇼와 같은 조연 인물들에게 다양한 캐릭터를 부여해 극을 더욱 짜임새 있게 완성했다. 거기에 미니멀한 흑백의 무대와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도미니크 드리요의 조명 디자인까지 가미했다. “줄리엣은 사랑 그 자체예요. 순수함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더 진실되게 표현해야 돼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가장 불 같은 열정을 표현하는 거죠.” 김주원은 이제까지 그녀가 섰던 모든 무대에서 그러했듯이 연습실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한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다가도 연습이 중단되면 상대 무용수에게 조언을 건네고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서슴없이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당차고 적극적인 마이요의 줄리엣, 딱 그녀의 모습이다.

첫 장면부터 연습을 이어가다가 안무가가 개별적으로 동작을 봐줄 때는 자연스럽게 각자 개인적으로 연습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다시 같이 연습을 이어가는 식이다. 두 주인공의 무대가 시작되자 나머지 무용수들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 발레 슈즈를 꿰매거나 주역들의 연습을 지켜본다. 몸이 차가워지면 부상을 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보온 슈즈를 꺼내 신고 두툼한 점퍼를 걸쳐 입는 모습도 보인다.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웅장하고 격정적인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팔을 벌린 로미오의 품 안으로 줄리엣이 성큼 다가가 눈을 맞췄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조반나 로렌조니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에디터 | 조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