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요리사와 여섯 명의 작가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둘레를 걸으며 혀끝에 올라온 맛을 기억했다.

제철이 아닌 제철 재료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한 크기, 럭비공처럼 생긴 모양에 촘촘히 박혀 있던 작고 보드라운 솜털, 솜털 사이로 보이는 연두색 껍질. 살며시 집어 슬쩍 눌러보니 단단한 탄력은 있지만 그렇다고 딱딱하진 않은 질감. 조심스레 칼을 대어 꼭지부터 아랫부분까지 사알짝 칼집을 넣는다. 아보카도를 자르듯 반대편까지 칼을 이어 그 시작이 끝과 만나게 한다. 한쪽에는 작은 그릇에 차가운 물과 비타민C 가루를 섞어 만든 용액을 준비하고 금을 내었던 칼 끝을 금 안쪽으로 집어넣은 뒤 툭! 하고 비튼다. 떨어지는 한쪽 껍질,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하얗고 탱탱한 그것. 조심스럽게 칼을 놀려 하얀 그것을 떼어내고 곧바로 비타민 수용액에 넣는다. 맛이나 볼까 하고 반으로 쪼개면 안에는 알로에와도 비슷한 투명한 게 들어있다. 살짝 씹으니 툭하고 터지는 젤리… 살짝 새콤하고 상쾌하지만 아주 낮고 은은하게 깔려 있는 고소함. 일 년에 단 한 달 정도 4월에서 6월 사이에 맛볼 수 있는 이것은 그린 아몬드(Green Almonds). 아몬드가 단단하게 영글기 전, 이제 막 말랑말랑한 속살이 생겼을 때 수확하여 먹는 이 그린 아몬드는 수확하는 양이 극히 한정적이다. 제철 아닌 제철 재료인 그린 아몬드를 처음 손질했을 때의 쾌감, 설렘, 그리고 떨림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물론 지금은 아무런 감정 없이 손질을 하지만 말이다). 이종교배 등으로 창조된 재료들처럼 세상에 없던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 당연하게 써오던 ‘아몬드’의 다른 형태였기에 충격은 남달랐고 지금도 해마다 기다리는 재료 중 하나가 되었다. 계절에 따른 식재료, 즉 제철재료는 대부분이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 재료가 자신의 삶을 자연의 섭리대로 정직하게 살아왔을 때 비로소 이르게 되는 최고의 맛의 단계, 그 정점을 가진 재료들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그린 아몬드의 경우처럼 기존에 알고 있던 제철재료의 개념을 떠나 발견되지 않은 제철을 찾아내어 없던 제철을 만들어내는 재료들도 요즘 널리 인기를 얻고 있다. 대부분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수확시기를 앞당기거나 늦춤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맛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내 몸에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더라도 감수하고 먹는다는, <식객>에도 나왔던 (일년에 3일만 먹을 수 있다는) 옻 순, 여린 과육과 말랑말랑한 호두를 그대로 병조림하여 먹는 어린 호두, 초록 토마토처럼 과일이 완숙되기 전의 상큼한 새콤함을 즐기는 초록 딸기. 단단하게 굳기 전의 말랑말랑한 껍질 덕분에 통째로 튀겨서 한입 베어 먹으면 바삭한 동시에 쫄깃한 껍질과 함께 입안에서 터지는 진한 육즙, 그리고 그 보들보들한 살들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소프트 셸 크랩, 너무 진하지 않은 육수에 시간을 들여 푹 쪄내면 포유류에서 가장 단단한 살이라는 종아리까지 보들보들한 부드러움이 꽤나 만족스러운 어린 양, 마치 바늘처럼 생겨 아주 살짝 익혀 조리하여 소스와 함께 버무리면 톡톡 끊어지는 그 작은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부한 장어의 향이 일품인 장어 치어, 그리고 설명 자체가 필요 없는 물러터지기 직전의 홍시…. 이제는 더 이상 미국음식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레스토랑 문화를 만들고 제철에 대해서, 또는 로컬재료에 대해서 가장 높은 관심을 가진 손님들이 모여 있는 도시, 뉴욕. 레스토랑의 셰프들은 서로 저마다 최고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매일매일 지역의 농부들이 모여서 수확한 식재료를 파는 그린 마켓에 들러 최고의 로컬 재료와 빠르게 지나가는 제철재료를 구하는 건 당연한 일과다. 각자의 특징을 살린 음식을 만들기 위해 주방 한켠에서는 요리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고 주방 밖에서는 손님들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입에서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뒤처지게 되는 이 바닥에서 신선한 자극제로 작용한다. 일 년에 하루만 먹을 수 있든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든 우리는 계절과 함께하고 계절과 함께 살쪄간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이 자연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임이 분명하기에, 오늘도 입맛을 다신다.
– 이준 ‘리스토란테 링컨’ 셰프

아버지의 계절
요리에 있어서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요리 맛을 좌우하는데, 8할 이상이다. 계절에 맞는 재료를 찾아 요리하는 것은 요리사에게 기본 요건이다. 본인의 노력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어떤 재료를 먹고 자랐는지는 분명 요리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내게 맛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주고, 요리를 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은 아버지와의 여행이었다. 아버지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생선을 파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셨다. 그리고 산을 무척 사랑하셨던 분이라서, 내가 내 발로 걸을수 있을 때부터 아버지는 산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두 번은 아버지의 손에 끌려 산에 갔고, 아버지 친구분들 앞에서 장기 자랑을 하곤 했다. 그렇게 전국에 있는 한국의 산의 절반 이상은 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것 같다. 지금은 내가 다녀왔던 산의 이름도 기억이 잘 안나지만, 이렇게 산에 많이 끌려다녔고, 산은 경이롭고 위대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나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난 지금 산악인이 되었어야 하는 건 아닌가 가끔 생각한다. 그런데 난 요리사라는 업을 택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떠올랐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산에 갔을 때 집중했던 것은 산을 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데려간 산 주변의 맛있는 식당의 음식이었다. 참 신기하다. 분명히 산에 가자고해서 나갔는데, 조금만 옆으로 가면 바다가 있어서 아버지께서 회도 사주신다. 산에 가자고 따라가면, 산 주변에서 나는 맛있는 것들 말고도, 바닷가에 가서 생선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면서, 국토의 2/3가 산이고, 바다가 우리나라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수업시간에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갔던 전국의 산과 바다의 여행에서 그 계절에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아직도 계절을 떠올리면 계절마다 다른 산과 바다의 풍경과 음식이 함께 떠오르게 만들어준 것이다. 봄과 가을에는 지리산에서 먹었던 산의 냄새가 물씬 나는 나물과 버섯들로 만든 산채 비빔밥이 먹고 싶고, 여름엔 통영에서 먹었던 해삼과 멍게, 주문진항에서 먹었던 오징어와 한치회 그리고 설악산에서 먹었던 감자전이, 가을에는 아버지와 산행 후에 내려와서 먹었던 추어탕이 너무 그립고, 겨울에는 대포항에서 먹었던 도치 매운탕과 도루묵이 생각난다. 그 여행과 맛이 때때로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 최정윤 샘표 기획 셰프

계절의 오므라이스
간혹 견딜 수 없이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어진다. 어느 정도냐면 과히 신체 기관의 어디가 잘못돼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이라 할 정도다. ‘오므라이스, 오므라이스’ 라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거리를 헤매거나,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계란 지단인 양 착각하고 쫓아가게 된다. 어째서 이런 증상에 시달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봄에 좀 더 심각해진다. 특히 광화문의 서점에서 인간의 고독에 관한 소설이나, 사랑을 노래하는 시집을 사고 나오는 길이면, 더욱 그렇다. 열차 칸 차창 뒤로 피어오르는 개나리라도 보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리며 오므라이스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강남에 가면 오므라이스를 먹고 싶은 기분이 전혀들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나는 고민하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오므라이스는 인간의 고독을 해결해주는 요리이다. 2. 인간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특정 장소에 가면 오므라이스가 더욱 생각나는 것이다. 이 허술한 삼단논법이 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과연 살면서 진정으로 허술한 행동을 해본 적이 없는 자는 내게 돌을 던지기 바란다. 다시 광화문의 서점 앞으로 되돌아가서, 아직 채 벗지못한 코트 깃을 세우고 고독한 시집과 소설을 흙빛 종이봉투에 담아 나오면 속까지 허해진다. 그러면 갑자기 들이닥친 봄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음식이 연상되는데, 바로 달콤한 오므라이스다. 스푼으로 곱게 정돈된 계란 지단을 살짝 갈랐을 때 베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을 보면 그만 감격해버리고 만다. “이 봄처럼 당신을 품어줄게요”라는 식으로 온기를 모락모락 피워내는 오므라이스는 그 광경만으로도 따뜻한 것이다. 게다가 오므라이스는 언제나 기품 있는 두께의 흰 접시에 정갈하게 앉아 있다. 소설로 치자면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단편소설 같다. 당근과 양파, 감자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일하게 썰어놓은 것과 색깔이 균등하게 퍼진 샛노란색의 계란 지단과,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S자 곡선으로 뿌린 A1소스를 보고 있자면, 마치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더 이상 버릴 단어가 없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어버린다. 왠지 헛헛한 봄에는 달콤한 오므라이스가 더욱 생각난다.
– 최민석 시인

서울과 밀라노 사이
이탈리아의 여름은 건조해서 여름에도 살 만하다지만, 밀라노의 여름은 습도마저 높아 결코 만만치않다. 이탈리아에도 전국의 먹을거리를 보여주는 요리 프로그램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름 음식 말고는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수박에 고르곤졸라 치즈를 발라 드시는 방송인 할아버지의 식습관에 경악만 했을 뿐(보편적인 이탈리아식 수박 먹기는 절대 아니다). 여름이면 입맛이 없는 건 서울이나 밀라노나 똑같다. 바게트 빵을 구운 후 마늘을 바르고 토마토 조각이나 페이스트, 올리브, 올리브유, 바질잎을 곁들인 브루스게타와 그릴에 가지를 구워 올리브유, 통후추를 뿌리면 완성되는 가지구이를 자주 먹었다. 오이소박이도 만들고 냉면도 만들었다. 한국에서 부추씨앗을 공수받아(그런데 포장을 보니 원산지가 이탈리아였다) 앞마당에 심은 후, 웬만큼 자라면 거두어서 인터넷에 나온 레시피를 따라 해 오이소박이를 해 먹곤 했다. 부추는 아흔 넘은 어르신도 자손을 보게 해준다고 했던가? 아무튼 자주 먹었다. 이탈리아의 한국식당에서 파는 김치는 무척 맛이 없다. 원래 성격이 ‘그리워하지만 말고 직접 찾아 먹자’라는 쪽이라 결국 김치를 담갔다. 맘에 드는 한국 여자 유학생에게 작업용도로 김치를 활용하기도 했다(실패로 끝났다). 유학 기간이 길어질수록 여름을 더 잘 보내게 되었다. 흔히 이탈리아식 전채로 알려진 것이 프로슈토와 멜론을 함께 먹는 것인데 더 고급은 프로슈토와 생무화과를 먹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이탈리아에서도 무화과는 늦여름에 많이 나온다. 이 시기가 되면 거의 매일 슈퍼에 들러 무화과가 진열대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참치를 즐긴다. 캔 참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레어로 구운 참치스테이크에 루콜라를 곁들여 먹곤 하는 음식으로 레스토랑에서는 ‘Tonno e Rucola’라고 부른다. 매우 두꺼운 참치를 겉만 익히고 루콜라, 소금, 레몬즙으로 마무리해서 먹는다. 이걸 먹을때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식재료의 조화를 찾는 것에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붉은 참치와 녹색의 루콜라, 그리고 노란 레몬의 색깔 조합도 감탄의 대상이었다. 만들기는 매우 쉬운 편이지만 처음에는 참치를 얼마나 익혀야 할지 몰라서 레어가 아닌 웰던 스테이크를 먹은 적이 수차례 있었다. 물론 웰던은 레어만큼 맛이 없었다. 이 참치 요리를 알려준 음식점에서는 여름이면 디저트로 체리를 팔았는데, 냉면사발만큼 큰 대접에 얼음물을 담고 그 속에 체리를 한가득 넣어주는 것이었다. 소박하면서도 맛있게 체리를 먹는 방법이랄까? 붉은 오렌지를 생으로 갈아 만드는 오렌지 주스 ‘Spremuta Arancia Rossa’도 엄청 마셔댔다. 맛이 노란색 오렌지와는 ‘근본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시원하면서도 매우 진한, 고기로 치면 꽃등심 육즙 같은 진한 맛이다. 또 생활비의 큰 부분을 젤라토에 바쳤다. Fiori di Latte(우유맛), Menta(민트), Pesca(복숭아), Amarena(체리). 인공 향 따위는 전혀 생각할 줄 모르는 ‘비효율적 생산방식’을 선호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든 음식답게 맛은 어떤 젤라테리아에서도 만족스러웠다. 축구 경기도 없는 재미없는 여름밤은 이 젤라토와 함께했다. 어느 날, 우연히 밀라노 인근 기사식당에서 이탈리아식 도가니수육인 ‘네르베티 인살라타(Nervetti Insalata)’를 맛보고 완전히 반했다. 도가니를 살짝 데친 후, 마늘, 파, 레몬즙, 올리브유로 버무린 이 음식에 푹 빠진 나머지 거의 매일 먹어댔다. 이탈리아는 슈퍼에서 데친 도가니를 판다. 이걸 사다가 한번은 이탈리아식으로, 또 사골을 끓여 만든 국물에 이 도가니를 넣은 ‘보양용 도가니탕’을 만드는 서울식으로 번갈아 먹었다. 이탈리아와 서울의 맛을 뒤섞으며 몇 번의 여름을 보냈다.
– 이윤철 칼럼니스트

더위라는 밥도둑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아니라면, 집에서 밥 주는 사람은 엄마다. ‘우리 엄마는 음식을 진짜 못해’라는 사람도 엄마 밥을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엄마의 손맛이나 입맛은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복불복인 것 같다. 다행히 엄마는 음식을 잘했다. 7남매의 장녀, 장남의 아내, 세 아이들의 엄마로 태어나 손도 무진장 커졌다. 돼지고기, 소고기, 생선을 장본 날 저녁에는 돼지고기, 소고기, 생선이 다 함께 오른다. 가스레인지의 불 구멍 네 개를 다 켜서 기어코 한 상을 차려버린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잘 먹고 잘살아왔다. 딱 한 계절, 여름만 제외하면 말이다. 엄마는 식구들 중에서 혼자만 더위를 탄다. “보기만 해도 덥다”는 우리집 관용어구이며, 세 자식 중 여름에 태어난 녀석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자랑이다. 그런 엄마에게 갱년기라는 게 찾아오면서 일대 위기가 찾아왔다. 더위만 잡숫고 요리를 안 하게 된 것이다. 더워서 못하겠단다. 몇 해 전부터 여름이면, 요리하는 엄마 대신 죽부인…아니, 죽서방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서 대리석 바닥에 방석도 없이 앉아 신문이나 책을 보는 엄마를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장시간의 조리를 요하는 쇠꼬리 같은 재료는 진작에 퇴출됐다. 휘슬러 솥 대신 햇반이 박스로 들어오고, 냉장고에는 콩국물, 우뭇가사리, 두부, 오이, 낫토 등 날로 먹는 것들만 가득 채워진다. 오이로 만드는 냉국, 간장과 파, 식초 등 양념을 치고 후루룩 후루룩 마셔버리면 그만인 투명한 우뭇가사리, 알싸한 무순이나 김을 올린 두부나묵, 싱싱한 푸성귀로 가볍게 버무린 겉절이와 온갖 쌈 채소. 그마저도 귀찮을 땐 콩국물 한 컵이 한 끼 식사가 된다. 식탁이 부실해질수록 외식이 잦아졌다. 장어를 비롯한 온갖 보양식부터 깻잎, 묵은지, 가자미식해와 꼬시래기, 양파를 넣어 돌돌 말아 먹는 세꼬시까지 먹어대느라 여름이면 엥겔지수가 급증한다. 우리 집도 여름 별미가 많았는데, 그걸 더위가 다 훔치다니. 억울해서 눈물을 훔치다가도 더위에 맥을 못 추는 엄마를 보면 사계절 중 한 계절은 대충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자연히 디톡스 식단이 되다 보니, 식구들 몸 곳곳에 붙어 있는 잉여지방은 이때 싹 빠진다. 9월이 되고, 창문을 열었을 때 바람이 어쩐지 서늘한 느낌이 들면 엄마는 병어조림을 한다. 동생들과 달리 생선을 좋아하지 않던 시절에도 내가 유일하게 잘 먹었던 생선이다. “저거는 비싼 거만 좋아해서….”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며 병어에 칼집을 넣을 때의 엄마는 모처럼 삶의 에너지가 피어 오른다. 병어는 원래 6월 말에서 7월이 진짜 맛있는 생선이라지만 우리 식탁엔 더위가 한풀 꺾인 다음에야 도착한다. 폭신폭신 보드랍게 감자를, 살캉살캉하게 무를, 곱게 빛나는 은빛 피부가 벗겨지지 않도록 대파 이파리도 좀 바닥에 깐 뒤 생강향 간장 양념을 뿌려가면서 엄마는 본인이 생각해도 꽤 잘 한다는 조림을 한다. “올여름은 왜 이렇게 더웠지.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렇게 병어조림이 셰프의 귀환과 여름의 끝을 함께 고한다. 다음은 본격, 살찌는 계절이다.
– 에디터 허윤선

어른들은 전어를 굽는다
유통 기한이 좀 지난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약 30년 전의 일이다. 작은 경양식 레스토랑을 하던 어머니와 함께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2시간쯤 기다려야 하던 때가 있었다. 한두 번은 근처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계속 지루했던 걸 보면 나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오락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고팠다. 레스토랑 음식이 지겨울 거라고 짐작한 어머니는 먹고 싶은 걸 사 먹으라고 돈을 주었다. 주머니도 두둑하겠다, 밥집을 찾고 있던 중 어디에서 냄새가 나는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내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그 냄새가 날 허름한 포장마차로 안내했다. 체질상 알코올과 별 친분이 없는 관계로 지금도 포장마차는 잘 가지 않는다. 인생 처음으로 냄새에 이끌려 포장마차를 찾은 것이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이 고소한 냄새는 어디서 나냐고 물었다. 그것은 가을 바다의 진미인 전어였다. 그날 이후로 당시 돈 5백원을 들고 어머니 가게를 갈 때마다 그곳에 들러서 전어를 먹었다. 술 마시는 어른들 틈에서 밥과 전어구이를 먹는 까까머리의 고등학생, 그게 나였다. 물론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전어구이 맛에 폭 빠진 나는 그런 시선쯤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때 먹은 전어의 맛은 중년이 된 지금에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중학교 때에도 직접 디자인한 옷을 맞춰 입을 정도로 패션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옷이 가득한 방에서 죽는 것이 소원일정도였다. 자주색 가죽 버버리를 입고 다닐 정도로 튀는 패션 전공자가 일식 셰프가 된 계기는 그때의 전어구이가 아니었을까 한다. 새로운 맛을 알았을 때의 기쁨을 그때 처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선구이 하나가 이렇게 오랫동안 날 감동시키고 있다. 예전에도, 가을 별미로 버젓이 알려진 지금도 전어는 비싼 생선이 아니다. 그렇기에 늘 등한시했던 생선이다. 까까머리가 더 이상 까까머리가 아니었을 때, 난 패션 공부를 하러 일본 여행을 떠났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교복 입고 자란 나와 어릴 적부터 자율복 입고 다니는 일본인과 패션으로 게임이 되겠는가. 그래서 바로 요리로 전향했다. ‘넌 패션보다 요리무키’라고 말해준 스승도 있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전어를 다시 만났다. 일본에서는 전어를 출생어라고 한다. 크기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 다르다. 제일 작은 사이즈는 ‘신고’, 그 다음 ‘노고시로’, ‘고하다’ 라고 불린다. 작은 신고는 크기가 3센티 정도되며 상태에 따라 1kg에 약 30만원 하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다. 그리고 초밥집에서 그 집의 수준을 알려면 전어를 꼭 먹어봐야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대우받는 생선 중 하나다. 나라에 따라 전어를 대우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맛에 있어서는 공통적인 것 같다. 저녁 퇴근 후면 샐러리맨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한참 기름이 오른 전어를 즐기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 풍경을 볼 때면 나는 혹시 거기에 철없는 까까머리가 있지는 않나 두리번거린다.
– 한석원 ‘스시조’ 셰프

간장 향기
맡자마자 “와, 어떤 계절이 왔구나!”라고 단숨에 느낄 수 있는 요리의 냄새는 뭘까? 늦봄의 딸기와 된장국 속 냉이향, 여름의 시원한 식초와 싱그러운 오이의 물냄새, 겨울은 뻑뻑한 청국장이나 고추장으로 맛을 낸 여러 가지 걸쭉한 탕과 애플사이더에 들어간 럼과 클로브, 시나몬스틱의 향기일 것이다. 그리고 내게 가을의 간장이 그렇다. 간장 향기가 가을을 연상시키는 이유가 있다. 열을 가했을 때 나는 그 복잡 미묘한, 짭짤하면서 달콤하고, 바닥에 눌어붙은 듯한 연한 탄 내음은 낙엽과 나뭇가지를 태우는 가을 들판의 냄새와 비슷하다. 요리에 간장을 조금 넣는 것만으로도 맛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간장에 적당히 열을 가하면 발효되면서 농축된 여러 가지 맛이 갑자기 확 우러나오며 향이 좋아지고 깊은 맛을 내게 되는 폭향(爆香) 현상 때문이다. 익은 맛이 터진다는 것이 무엇이든 잘 익고 풍부한 가을과 통하는 면이 있다. 특히 일본의 가을 식단은 그야말로 간장의 향연이다. 도쿄 아사쿠사 가미나리몬(雷門) 가는 길에 주욱 늘어서 있는 민예품 파는 골목에서 쉴 새 없이 풍기는 다양한 간장 향기는 관광객의 발목을 오랫동안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석쇠 위에서 노릇하게 구운 찰떡이 뜨거울 때 간장을 바르면서, 잘 스며들고 더 깊은 맛이 나라고 부채질로 불을 일으키는 과정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아주머니들과 당고 위에 바를 끈끈하고 달콤한 간장소스를 졸이는 아저씨, 땀을 뻘뻘 흘려가며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간장을 발라가며 센베를 굽는 총각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덤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양손에 간장으로 다양하게 요리한 짭짤한 간식거리가 가득하다. 길을 걸으며 먹어도 좋지만 무엇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맥주안주로 제격이다. 그래서일까? 맥주회사도 가을 안주 앞에 신제품을 내놓고, 가을 전용 맥주는 효모의 맛이 진하고 향기롭다. 중화소바라고 부르는, 간장을 베이스로 한 소유라멘의 국물과 입을 델 듯이 뜨거운 타코야키의 겉에 바른 소스의 맛도 가을에는 어쩐지 더 맛있게 느껴진다. 쌀쌀한 날씨와 뜨거운 음식 그 위의 간장 향기. 내겐 삼위일체 그 자체다. 술 좋아하는 내가 준비하는 가을상엔 언제나 간장향이 가득하다. 도쿄에서 사 먹는 타코야키도 좋지만 직접 집에서 만든 맛간장에 국물 없이 바특하게 볶은 불고기와 그릴에 구워서 버터와 간장을 살짝 바른 옥수수, 생강과 콜라, 진한 색이 먹음직스러운 중국의 쌍노두유를 이용해 바짝 졸인 닭날개, 슴슴한 간장소스에 푹 졸여 겨자를 얹어 먹는 삼겹살찜 등등. 가을은 내게 간장 향기로 온다.
– 차유진 <파스타의 기하학>, <프렌치 테이블> 역자, 손녀딸의 테스트 키친 대표

그리움에 바치는 노래, 포도
삼 년 전 추석이 한참 지나고 익은 벼로 누렇던 벌판이 비어가던 10월 하순, 고향에서 허브를 재배하는 외우 P가 “포도 먹으러 갈 마음은?” 하고 물었다. 포도라면 수확철을 한참 지났을 터, 아이스바인을 빚기 위해 일부러 수확을 늦춘 것이라면 몰라도 식탁에 올리는 포도가 남아 있을 리 없을 터인데. “있다네, 친구. 서리가 내릴 때까지 따 먹는 극만생 포도야. 독일의 아이스바인에 들어가는 포도처럼 엄청나게 달지. 당도가 20브릭스를 넘어. 과일 중에서도 당도로는 최강이라 꿀하고 비슷하지.” 그의 허브 농장 뒤편에 포도밭이 있다고 해서 차를 몰고 가는 중에 그는 포도와 포도밭 주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포도의 이름은 스튜벤(Steuben)이고 미국 뉴욕 농업시험장에서 웨인과 세리단 품종 포도를 교배 육성하여 선발한 것인데 겉보기로는 머루포도 비슷하단다. 한우를 백 마리 가까이 사육하는 60대 남자가 일찍 그 포도 품종의 맛을 알고 심었는데 그 포도를 한 번 맛본 사람은 세세년년 천리가 멀다하지 않고 그 포도밭을 찾아오고 있다는 것. 정작 본인은 근래 건강이 좋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포도밭을 맡겼다는 것 등등. 누런 소가 수십 마리 앉거나 서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사육장 옆으로 나 있는 흙길을 따라갔더니 그리 넓지 않은 포도밭이 나왔다. 이미 서쪽에 병풍처럼 서 있는 노악산 너머로 해가 넘어가버렸고 많이 남지 않은 포도 잎사귀에 바람 부는 소리가 스산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서둘러야 했다.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P가 미리 전화를 해두었다면서 가위와 상자를 들고 먼저 포도밭 안으로 들어갔다. 면장갑을 끼고 포도밭에 들어서자 단내가 코를 찔렀다. 발아래가 푹신푹신해서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숲 속의 부엽토를 밟고 있는 기분이었다. “소를 키우니까 축사에서 거름이 무한정 나오거든. 거름을 엄청나게 많이 퍼부은 거야. 그러니까 같은 스튜벤 포도라도 이 밭 포도가 훨씬 더 오래까지 딸 수 있고 당도도 높은 거라고. 어지간히 따냈다는데도 이래.” 포도송이의 크기는 일반 포도와 비슷했다. 일반 머루포도보다는 훨씬 더 달았다. 으깨진 포도알 몇 개를 만졌더니 면장갑 속으로 끈적거리는 즙액이 들어왔다. 손가락과 장갑이 붙어서 나중에 장갑을 벗을 때 애를 먹었다. 종이상자로 세 상자를 따서 차에 실었다. 하나는 집에다, 하나는 선생님 드리고 또 하나는… P가 운전석에서 차를 돌리는 중에 포도송이를 손에 들고 먹기 시작했다. 달았다. 엄청나게 달았다. 설탕이나 꿀의 단맛과 다른, 품위 있는 단맛이었다. 무엇보다 근사한 것은 향기였다. 단향(檀香)과 벌꿀의 중간쯤 되는 고급스러운 냄새가 났다. 차가 달리는 동안 넋을 빼앗긴 듯, 얼이 빠진 듯 먹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한참 만에 “향수(鄕愁) 같은 맛”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내렸다. 누구의 어떤 향수? 나는 스튜벤을 개발해낸 미국에서 온 사람도 아니고 아이스바인의 본고장인 독일에 향수를 느낄 이유도 없는데? 늦가을의 추위, 어스름, 서녘 하늘에서 돋아나는 별, 오랜 친구, 낮은 음성에 이은 오랜 침묵, 바람, 하나둘씩 켜지는 마을의 불빛… 그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 포도는 일깨워주고 있었다. 포도송이를 손에 들고 있는데도, 포도알을 입에 넣고 있음에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 성석제 소설가 <왕을 찾아서> 저자

찬바람이 불면, 동치미 국수
팔팔 끓어오르는 냄비 물에 하얀 소면 한줌을 촤르륵 풀어 넣는다. 휘휘 젓가락으로 저어주다 거품이 솟아오르면 찬물 한 컵을 살짝 둘러준다. 다시 한번 거품이 일면 소쿠리에 받쳐 손이 시릴 정도의 찬물로 재빨리 헹궈낸다. 너무 푹 삶지 않아 쫄깃한 면발을 유지하는 게 포인트. 국수를 소쿠리에 받쳐 물을 빼는 동안, 무 1/4쪽을 송송 채 썰고, 갓도 한 가닥 꺼내 썰어둔다. 물기를 뺀 국수를 그릇에 담고 채 썬 무와 갓을 올리고 살얼음 낀 국물도 넉넉하게 붓는다. 마지막으로 통깨만 솔솔 뿌리면 완성.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에 먹어야 제맛인 동치미 국수다. 맛난 동치미만 있으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초간단 별미. 식초도 겨자도, 다른 양념장도 필요 없다. 작지만 단단한 무가 소금물을 만나 우려낸 시원한 국물에 달큰한 배와 쌉싸래하게 매운 쪽파와 갓, 칼칼한 삭힌 고추가 어우러져 달리 뭔가를 더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만으로 상큼하게 개운한 맛을 낸다. 여기에 쫄깃한 국수 한 움큼을 말아 넣으면 든든하게 속을 채워주는 겨울밤 최고의 야식이다. 어느 해 겨울, 한국을 떠난 지 5년여 만에 그동안의 휴가를 모아 잠시 들어오게 됐다. 비행기표를 끊고 엄마와 통화하던 중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해줄게’라는 말씀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마가 담근 동치미’를 외치고 있었다. 일 년 365일 중 350일 정도는 햇볕 쨍쨍한 남부 캘리포니아. 그곳에서 6년쯤 살다 보니 코끝이 시큰할 정도로 매서운 한국의 겨울이 가끔 그리워지곤 했다. 어묵탕, 군고구마, 동치미처럼 에어컨 바람 맞으며 먹기엔 영~ 제맛도 운치도 나지 않는 겨울철 별미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했던 건 바로 엄마표 동치미에 말아 먹는 국수 한 그릇. 추위를 많이 타 겨울이 별로이던 꼬마 때부터 ‘겨울’ 하면 눈싸움이나 썰매보다는 아삭아삭한 무와 청량한 국물의 동치미가 먼저 떠올라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동치미 마니아’였던 나. 공항에 내려 집에 도착해선 식탁을 다 차리기도 전에 엄마의 동치미 한 그릇을 비워버렸다. 겨울에 들어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에 흐뭇할 정도로, 오랜 그리움을 사르륵 녹여주는 맛이었다고나 할까? 기자 시절, 영화주간지 창간을 전후로 일주일에 며칠 밤 새우기는 일상처럼 돼버렸을 때, 밥 넘기는 것조차 괴로운 상태에서도 간만에 집에서 먹는 동치미 국수 한 그릇은 후루룩 기분 좋게 비웠다. 역시 무진장 추운 겨울이었다. 음식솜씨 좋기로 소문난 울 엄마는 동치미를 정말 잘 담그는데, 지금까지 엄마가 담근 것보다 더 맛난 동치미를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엄마의 비법은 역시, ‘좋은 재료’라 한다. 그중에서도 물과 소금의 질과 비율이 제일 중요하다고. 맛있는 소금이 음식 맛의 시작이라는 엄마의 소금 선택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편이다. 해마다 6년 뒤 쓸 신안 천일염을 사다가 직접 간수를 뺀다. 겨울무가 더 달고 단단해 여름엔 제맛이 안 나니 겨울에만 담그기도 하고, 김치냉장고가 있어도 따뜻한 남쪽지방에서는 추운 서울에서 서서히 익힌 ‘쨍한 맛’이 안 난다며 지금도 동치미는 서울에 올라와 담근다. 그것도 입동 지나고 일주일 안에 담가야 한다고! 전문적으로 음식을 하는 딸보다 더 디테일하다. 이런 엄마 딸이라 그런지 계절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식재료를 구할 수 있고 보관도 어렵지 않아 제철음식, 계절음식이란 명칭이 무색해진 요즘도 그 철에 가장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더구나 겨울에만 동치미를 담그는 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에게 동치미는 추운 겨울이 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이름도 ‘동침(冬沈), 겨울에 먹는 물김치’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지난해 환갑을 지낸 엄마는 예전처럼 간을 잘 못 보겠다며 자주 서글퍼하신다. 동치미 담그기는 간 맞추기가 핵심기술이라 하는데… 올겨울엔 엄마와 동치미를 함께 담가야겠다. 간 맞추기 보조부터 시작이다.
– 김미영 ‘델 마’ 셰프

두 가지 겨울 음식
아직 가을이지만 겨울 음식 이야기를 하고 싶다. 두 가지 서로 다른 따뜻함에 얽힌 음식의 추억이 있다. 모두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비롯되었다. 초등학교도 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매직 민트’. 인터넷을 한참 뒤져 찾았다. 오븐의 색깔 이름이다. 둥근 전기 프라이팬에 뚜껑이 달린 형상으로 사실 오븐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물건이었다. 다만 프라이팬보다 훨씬 깊고, 뚜껑에 창이 있어 음식이 얼마나 익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게다가 거대했다. 어린 나에게 아름드리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겨울이면 오븐 아닌 오븐은 화로의 노릇도 겸했다. 무엇인가 만들어 먹으면 그 열기에 온 집 안이 따뜻해졌다. 하얀 살점 위에 점점이 내려앉은 후춧가루가 기억에 남아 있는 닭구이도 단골 메뉴였지만, 그보다 어머니의 유일한 베이킹이 이 오븐을 거쳐 완성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건 일종의 카스텔라였다. 파는 것들처럼 폭신폭신하고 섬세하지는 않았지만 계란의 진한 맛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오븐의 바닥에는 유산지 대신 그림 연습을 하던 달력 종이를 깔고 구웠다. 베이킹이 끝나고 종이에 붙은 가장자리 떼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빵은 부드러웠지만 가장자리는 거의 과자처럼 바삭바삭했다. 물론 과자도 따로 구워주시기는 했다. 거의 비슷한 반죽이었는데 꽈배기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취미로 베이킹을 시작한 것도 절반쯤은 이 추억의 빵과 과자를 재현해보겠다는 목표 때문이었는데, 아직도 레시피를 물려받지 못했다. 어머니도 이제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다. 어머니가 빵이며 과자를 구워주셨다면 아버지는 팝콘을 튀겨주셨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연탄을 때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덕분에 긴 겨울밤 간식은 언제나 연탄불 팝콘이었다. 깊은 냄비에 마가린을 한 덩어리 넣고, 아버지가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튀긴 팝콘에는 ‘불맛’이 살아 있었다. 언젠가 마트에서 장을 보다 옥수수 알갱이를 발견하고, 추억에 젖어 나도 팝콘을 튀겨보았다. 맛도 맛이지만 그보다 안 튀겨진 알갱이가 너무 많았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기만 했는데, 아버지의 냄비 흔드시는 테크닉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모양이다. 흔드는 기술은 바텐더의 셰이커만 따지는 줄 알았는데 팝콘도 그런가 보다. 아버지는 그 기술을 대체 어디에서 전수받은 걸까. 궁금하지만 여쭤보지는 못하고 있다.
– 이용재 푸드 칼럼니스트, <일상을 지나가다> 저자,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