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는다’라는 화장품 공병 고유의 목적은 죽지 않았다. 도시인의 삶과 심리로 전환되어 연장 상영에 들어간다. 지속가능한 생활에나 어울릴 법한 수식어를 예술작품 속에서 발견한 순간, 그 자리에 작가, 이호진이 있었다.

얼루어 그린 캠페인장을 찾은 2,011명의 시민이 각자의 삶을 대변하는 색을 선택하고 친환경 뷰티 브랜드에서 수거한 공병을 골라 그 안에 색이 들어간 물을 담거나 라벨을 붙여 자신만의 병을 만들어 진열장 안에 채워 하나의 공동체로 재탄생한 작품. 새로운 개념의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이며 각자의 개체가 다른 색을 띠며 함께 공존하고 있는 우리 현대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심각한 회화 작업을 해왔어요. 저와 잘 맞을까요?” <얼루어>에서 주최하는 그린캠페인에서 보여줄 작업을 의뢰했을 때 작가의 첫마디였다. ‘당신과 이러이러해서 맞는다’ 라고 설명하자 ‘그것만 해결되면 되는 거였다’라는 눈빛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수락하는 즉흥성을 보여주며 <얼루어>와의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일종의 재능기부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호진은 현재 진보적인 현대미술성향에 맞춰 건립된 인천가톨릭 대학교(송도국제도시 캠퍼스 타운 내)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회화 작가로, 21세기의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도시와 도시인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벽화, 사진, 비디오,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인터미디어 장치를 활용한 작업으로 회화에 기반한 이미지를 3차원의 공감각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이호진의 작품들은 서울의 가나아트센터, 금산갤러리, 브레인 팩토리, 갤러리 조선을 비롯해 해외의 갤러리 퍼페추얼(Galerie Perpetuel, 프랑크푸르트), 갤러리 루멘(Galerie Lumen, 파리), MK2 아트 스페이스(MK2 Art Space, 베이징)의 기획 초대 개인전과 부산비엔날레와 서울 디자인올림픽 등의 단체전을 통해서 소개되었고, 국립 고양 창작스튜디오, 프랑크푸르트 문화부 스튜디오, 파리 시테(cite) 국제 예술 공동체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현재 금천아트팩토리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하고 있는 꽤나 심각한 아티스트였던 것이다.

이호진은 고등학교 때 소위 말하는 ‘입시 미술’을 해본 적이 없단다. 그렇다고 그림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고민 많던 고교시절의 유일한 탈출구는 ‘그리기’였다. 순수미술이 그냥 좋았다. 매일 혼자서 추상화를 그려댔다. 그런데 그림을 더 그려보고 싶어 뉴욕의 한 미대에 입학했다. “체계가 없었던 것이 마음에 들었나보죠.” 분명 모르긴 몰라도 감각이 엿보여서였을 텐데 자신을 잘 모른다. 이런 캐릭터, 흥미롭다. 그런 그에게 <얼루어>와 뷰티 브랜드가 함께 모은 화장품 공병을 몇 천 개 잔뜩 안겨주겠으니 시민들과 함께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호진이 <얼루어>의 의도를 의미 있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준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미술작품은 종교적 성역일 수만은 없죠.”

1. <Talking about City, Thinking about Life>, 2006 Brain Factory은 뉴욕과 서울의 일상적인 이미지, 개인의 생활을 벽화와 영상으로 시각화한 전시이다. 공공의 관심사를 순간적으로 포착한 이미지들은 도시의 어두운 이면을 적극적으로 노출한다. 유리창과 문을 광고 전단지로 막고 조명도 어둡게 설치해서 전시장 자체가 거리의 뒷골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2. <Made in City>, 2008 부산 비엔날레1,500여 개의 다른 우유팩을 벽에 콜라주 형식으로 붙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대형 도시풍경화이다. 다량 제품화되기 전에 만든 패키지를 가지고 거대하게 자본화되고 산업화된 대도시의 여러 측면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3. <자화상(Self Portrait) Part Ⅱ>, 2011 Space CAN벽화 위 캔버스에 그린 이 작품은 포커스가 없고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불안정한 모습과 심리를 은유적으로 대변한다.4. <Civil Storming>, 2010 북경 MK2 아트 스페이스서울의 특정지역 내 건축물과 도로 등이 부서지고 합쳐지는 구조를 만들고, 한강을 형상화한 물결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면서 구름과 큰 태양으로까지 범람하고 있는 풍경을 연출하여 광활하게 표현했다.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각각의 많은 에너지가 뭉치고 충돌하면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작가 본인의 시각으로 해석한 대형 도시 풍경화.5. <21 United Diffi_World>, 2003초기 작품으로 다양한 문화와 다른 현상이 섞여 하나가 되고 순환되는 21세기 현대 조형적인 완성도를 추구하며 완성했다. 다양한 시각 작업을 하는 데 있어 모태가 된 작품.6. <No Pain no Doubt>, 2010더 이상의 아픔과 혼돈을 원치 않는 우리 시대의 많은 인물을 작가 본인의 모습을 통하여 반영한 인물화이자 풍경화이다.7. <Man in Republic>, 2006 프랑크프루트 시 문화부 스튜디오사회 속에서 우리가 놓쳐버린 것에 대한 갈증과 대상 없는 욕망에의 자조적 표현. 모든 열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 대한 비판과 연민을 보여준 작품이다.8. <One’s>, 2008 디자인 올림픽1,300여 개의 사이드 미러를 폐차장에서 수집해 지름 3.5m의 구를 제작하고 돌려 붙여 완성, 각기 다른 색을 도색한 작품. 각각의 미러는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다양한 빛에 따른 각도의 연출이 가능하다. 각각의 산업화된 삶의 과정을, 개체의 흔적이 한데 모여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미래를 지향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9. <초상(No One No Cry)> 2011 Space CAN각기 다른 대도시(서울, 뉴욕, 북경)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작품과 벽화 캔버스 작품의 이미지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공간작업이다. 바쁜 하루의 일상으로 여겨지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우리 삶의 반복된 긴 여정 속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공병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작품이 아니라 도시인의 심리를 끌어내어 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주제는 이러했다. ‘당신의 삶의 색은 무엇입니까?’ 시민들에게 먼저 설문지로 사전조사를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컬러가 만들어졌다. 그린캠페인 당일 남산에는 다양한 색의 물이 담긴 수통이 놓였다. 이미 만든 유리와 철제 선반 위에 <얼루어> 독자들과 시민들이 자신의 삶의 컬러를 담아 온전히 올려놓는 일만 남았다. 이윽고 봇물 터지듯 사람들이 몰려와 원하는 화장품 공병을 골라 색이 들어간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결과로의 행보가 재미있다. 관찰자로서 바라볼 때는 표정과 외모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회색빛 안색을 한 사람이 예쁜 노란색 물을 담거나 부러울 것 없이 생긴 여자가 검은색 물을 담는다거나 하는 의외성은 이곳저곳에서 불쑥 올라오는 오락실의 두더지처럼 자극적이었다. 하루 동안 완성된 작품으로 남산은 색으로 물들었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작업이죠. 디렉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완성도를 이끌어내야 하니까요. 콘셉트도, 개념도 있으면서 사람들을 참여시켜 결과물을 단시간에 만든다는 것, 남들이 개입되어 내가 원하는 뭔가가 나온다는 건 힘든 일이에요. 물론 단순한 행사로 생각하면 디자인 디렉터의 역할이면 되겠죠. 하지만 개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생각을 던지고 일회성으로 끝나게 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가 덧붙인다. “그래서 생각도 많아졌지요. 미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소통하는지 말이에요. 전 도시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데 단지 대도시의 풍경과 초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화두를 던지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이 작품도 그 연장선상에서 같은 개념 위에 서 있는 셈이에요.”

2,011명의 시민이 각자의 삶을 대변하는 색을 선택하고 친환경 뷰티 브랜드에서 수거한 공병을 골라 그 안에 색이 들어간 물을 담거나 라벨을 붙여 자신만의 병을 만들어 진열장 안에 채워 하나의 공동체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작가의 변처럼 어떻게 보면 가장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 브랜드 따지는 우리에게 새로운 개념의 브랜드를 제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각자의 개체가 다른 색을 띠며 함께 공존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로 남게 될 듯하다. 작품을 통해 대도시인 가슴에 ‘냉소’와 ‘희망’이라는 다트를 적재적소에 꽂을 줄 아는 그의 존재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