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번개가 온 도시를 뒤흔든 며칠 후, 거짓말처럼 파랗게 갠 하늘을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그곳에서 만난 풍경은 온통 초록이었고, 어김없이 꽃이 피었다. 청보리가 머리를 세우고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는 고창, 대나무 숲을 흔드는 담양과 배꽃이 들판 가득 피었던 나주, 그리고 작약의 흰 봉오리가 열린 강진. 그곳에서 여름의 문을 열었다.

전북 고창의 청보리밭에 부드러운 안개가 내려앉았다. 눈에 닿는 모든 곳이 초록이다.

청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남쪽으로 달릴수록 나무가 달라졌다. 뾰족뾰족한 잎 대신 둥글 넓적한 잎을 단 연둣빛 나무가 순하고 둥글게 자라고 있었다. 남쪽엔 활엽수가 자라고, 북쪽엔 침엽수가 자란다는 오래전 교과서의 한 장을 오랜만에 복기해주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고속도로도 낮아져서, 도로와 닿을 듯 가까이 벚꽃이 피거나 논밭이 펼쳐지곤 했다. 차창 밖으로 마주친 어느 작은 마을은 정말 아름다운 가로수길을 가지고 있었다. 고깔처럼 늘씬하게 자란 나무와 족두리처럼 둥글고 낮게 자란 나무가 아무렇게나 심어져 있는 가로수길의 고요한 선. 주변으로 낮게 안개가 피어오른 모습은, 그림 같았다. 표지판에 적힌 이름은 ‘서포리’. 손에 잡힐 듯 했던 그림이 빠르게 뒤로 지나갔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첫인상이자 남쪽 세상의 첫 인사였다.

전라북도 고창은 서울에서 너무 먼 것 같은 담양을 갈 때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답답하지 않은 도로라면 서울에서 고창까지 세 시간쯤 걸린다. 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고창에 들를 예정이라면 청보리밭부터 가야 한다. 고창이 보리밭으로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보리 종자 중에는 쌀보리와 겉보리가 있는데, 쌀보리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 바로 고창이다. 우리에게 고창은 참남쪽이지만, 고창은 보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북쪽 끝이었던 것. 또 고창은 노령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남도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데, 이렇게 눈이 많이 와야 뿌리가 단단해져서 보리가 잘 자란다. 보리 입장에서는 천당 아래 고창이었던 것이다. 보리밭으로 유명한 학원 농장은 보리로 채운 바다였다. 얼마나 넓은지 보려고 까치발을 해도 눈에 닿는 모든 곳이 파랗다. 그 밭 사이로 찻길이 나 있고, 긴 산책길도 계속 연결되어 있다. 걷는 동안 손바닥을 펴서 보리밭을 스치면, 강아지풀 수백 개가 따라오는 것처럼 손이 간질간질하다. 6월 중순이 되면 이 청보리밭은 황금보리밭으로, 거짓말처럼 변해버릴 것이다.

낙화하는 저녁
고창을 대표하는 사찰인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은 절이다. 보물 5점을 비롯해 나라가 지정한 19종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 백미는 절 뒤를 병풍처럼 두른 동백나무숲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동백나무 군락지로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동백꽃은 추운 날씨 속에서 피기 시작하지만, 이곳 선운사의 동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은 4월에 꽃을 피운다. 올해는 봄이 늦어서 5월에도 꽃이 한창이었다. 사찰의 단청지붕과 동백나무 가지가 맞닿아 있고, 초록색과 파란색의 중간인 동백나무 잎사귀 틈으로 빨간 동백꽃이 정갈하게 피어 있었다. 동백꽃은 시들면, 꽃송이가 투신하듯 땅으로 툭 떨어져 내린다. 그래서 시든 후에도 추하지 않다. 끝없이 흩날리는 벚꽃이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한다면 그냥 낙화하는 동백꽃은 너무 미련이 없어서 미울 정도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선운사 동백꽃’이라는 시를 썼다. ‘여자에게 버림 받고 /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 맨발로 건너며 /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 이 악물고 / 다시는 울지 말자 / 눈물을 감추다가 / 동백꽃 붉게 터지는 / 선운사 뒤안에 가서 / 엉엉 울었다.’ 시인의 글처럼 선운사 뒤안에는 가지 위의 동백꽃과 땅 위의 동백꽃, 그리고 수많은 야생화가 덤불처럼 피어 있었다.

선운사는 찾아오는 사람을 다감하게 끌어안는다. 선운사 템플스테이는 주중에는 자유롭게 머물 수 있고, 주말에는 절에서의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어서 항상 인기가 좋다. 꼭 이곳에서 잠들지 않더라도, 편안하게 차 한 잔은 해보길. 대웅전 아래 넓은 공간이 쉼터로 쓰이고 있다. 주춧돌에 신을 벗어 올려두고 들어가면 낮은 나무테이블마다 정갈하게 거꾸로 놓인 다구가 보인다. 누구든 와서 다구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사찰의 여러 풍경이 내 것처럼 보인다. 불공을 드리는 스님의 옷자락을 보고 있는 동안 다른 스님은 약속된 종을 친다. 한 번 종을 치고 크게 범종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종을 치고, 다시 한 바퀴를 돈다. 여행자의 일상과 스님의 의식이 겹쳐지는 순간. 종소리는 낮은 목소리로 울려 펴졌다. 선운사를 나오는 길, 다시 한번 사찰을 둘러보니 곳곳마다 꽃이 참 많았다. 철쭉, 노란 수선화, 제비꽃… 여기에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까닭으로 색색의 연등 수백 개도 도열해 있었다. 수백 사람의 소망을 담고서. 어두운 밤하늘 높이 흔들리는 연등은 그래서
예쁘지 않을 수가 없다.



1 선운사 뒤안의 동백나무숲. 피어도 예쁘고 져도 예쁜 동백꽃. 2 담양 한우로 만든 전라도식 육회. 3, 4 여행자를 위한 차 한 잔을 잊지 않는 선운사. 5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만들어 내는 담양 정신이 대나무 연등을 띄웠다. 6, 7, 8 고택 민박 ‘한옥에서’의 하룻밤. 장독대도 열 맞춰 서 있다. 9 삼지내 마을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자전거. 낡아 보여도 잘 나간다.

시간을 묶어둔 삼지내 마을
담양군 창평읍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슬로 시티’로 선정된 삼지내 마을이 있다. 이탈리아 슬로 푸드 협회에서 시작한 ‘슬로시티’는 국적을 잃은 현대화에 반대해, 고유의 멋을 지키고 있는 마을을 선정하고 지켜나가는 운동으로, 국내외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창평은 아시아 최초로 슬로 시티로 선정된 곳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8곳의 슬로 시티가 있다. 가까운 일본은 지방 소도시도 모두 현대화되어서 아직 한 곳도 슬로 시티 인증을 받지 못했다. 창평은 잘 보존된 고택과 전통 먹을거리 등으로 평가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더듬더듬 달려와 이곳 삼지내 마을의 고택 ‘한옥에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에는 몰랐는데, 아침을 맞은 삼지내 마을은 우리가 떠올리는 ‘할머니 댁’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처럼 침 바른 손가락으로 화선지 창에 구멍을 내지 않는 지금은 대신 다는 것이 다를 뿐. 흙에 잔디가 올라온 마당은 폭신폭신했고, 대청마루에서는 빛이 가득 들어와, 하루 종일 누워 선탠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고택 민박을 운영하는 주인내외는 아침 일찍 저수지에서 잡아온 토하새우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것을 삭히면 토하젓이 된다.

이 삼지내 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은 고재선 가옥, 고정주 가옥, 고재환 가옥 등 모두 고씨 성을 달고 있다. 1510년쯤에 형성된 이 마을은 본래부터 창평 고씨 씨족마을이었다고 한다. 먼지는 좀 날리지만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흙길 양옆으로 돌과 논흙을 사용해 지은 토석담이 펼쳐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는 돌담이라고 한다. 슬로 시티를 일부러 찾아온 여행자를 배려해, 집집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평범한 가정집 사이사이 야생화를 발효시킨 효소를 팔거나, 자연 염색을 하는 집, 전통 방식으로 만든 쌀엿이나 장아찌를 만들어 판매하는 집이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마을 입구, 커다란 나무 옆의 마을사무소에서 지도를 한 장 얻었다. 오래된 보건소와 굴뚝 달린 목욕탕집이 있고, 마을회관 옆에 걸어놓은 긴 빨랫줄에는 흰 빨래가 나부끼고 있다. 매달 마을 특산물을 판매하는 ‘달팽이 시장’도 열린다. 산책하다 지치면 자전거를 하나 빌릴 수도 있다. 논두렁을 자전거로 달려보는 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면, 자전거야말로 농촌 생활의 필수품이라는 걸 알게 된다. 모자를 눌러쓰고 휘파람을 불면서 낡은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가 웬만한 픽시족보다 멋지다.

담양의 두 얼굴
가는 날이 축제날이었다. 고즈넉한 담양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담양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담양 대나무 축제’를 읽는 코드는 세 가지다. 대나무, 술과 음식, 트로트!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광고 카피와 너무 잘 어울렸던 선비의 고장 담양은 사라지고, 온통 트로트 음악으로 쩌렁쩌렁했다. ‘전국 노래자랑’ 무대를 뛰어넘는 대형 무대에서 가수 주병선이 노래한 곡을 끝내자, 폭풍 박수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크고 작은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고 관중들의 춤사위도 예외는 없었다. 관방제림과 죽녹원 사이를 잇는 다리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해서, 정말 축제 분위기가 났다. 담양과 가까운 광주, 나주, 고창 등에서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은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뛰었다.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 향우회 등 온갖 지역모임에서는 부스를 차려놓고 고장 별미를 팔았는데, 술이 끊이지 않았지만 금요일 밤의 서울처럼 취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높이 매달린 연등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두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담양은 1년 중 가장 흥겨운 시절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연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예기치 않은 축제의 밤을 걸었다. 모든 축제는 사람은 들뜨게 한다.

하지만 축제의 장소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고즈넉한 담양이 그대로 펼쳐진다. 담양의 10가지 맛, 담양의 10가지 풍경 등 담양의 자랑거리를 열 개에 맞춰 발표하길 좋아하는 담양군은 최근 담양의 10 정자(亭子)를 선정했다. ‘소쇄원’으로 더 잘 알려진 제월당 광풍각, 면앙정, 식영정, 명옥헌, 송강정, 독수정, 상월정, 연계정, 관어정, 남극루가 그것이다. 선비들은 물 맑고 숲이 우거진 곳에 정자를 짓고 글을 썼다. 시와 산문의 중간 형태인 ‘가사 문학’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조광조의 몰락을 지켜보며 벼슬의 길을 접은 당대의 천재 양산보가 여생을 보낸 소쇄원은 가장 유명한 정자다. 대나무 숲 길을 걸어 올라가면 계곡을 벗삼은 소쇄원이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맑고 차고, 대나무와 바람의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의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에게 지어 올린 곳이다. 식영정에서는 드넓은 광주호가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철 좋을 때 잠시 놀다 가는 곳이 아니라, 사시사철 글을 읽고 쓰는 곳으로 정자를 애용했던 담양의 문인들은 정자에도 방을 만들었다. 송강 정철은 송강정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썼다. 원래 이름은 죽록정이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며 호를 따 송강정으로 붙이고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 다른 문화재와 달리 이들 정자는 찾아오는 사람들 누구나 앉아볼 수 있고, 기품 있게 하늘로 뻗어나간 지붕 아래에서 햇볕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