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중독되고, 모르는 사람은 궁금해하는 편집숍. 그 경계에 선 피처 에디터가 산보하듯 쇼핑에 나섰다. 31가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다양한 매력이 숨어 있는 그곳에서 내가 찾던 바로 그 옷을 발견했다.



패션과 뷰티가 주는 화려한 세계와 다소 거리가 있는 피처 에디터의 자리는 조금 애매하다. 사람들은 ‘잡지 에디터’라고 하면 머릿속에 곧장 영화 속 패션 에디터를 떠올리지만 피처 에디터의 라이프스타일은 신문의 문화부 기자에 가깝다. 문화와 예술을 다루는 일이 더 많기에 패션에 모든 털을 곤두세우진 않는다. 물론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예쁜 것을 탐하는 사람이 많은 잡지 특성상 각자 나름대로 패션을 즐기기는 하고, ‘패션과 뷰티 좋아하는 피처 에디터’ 소리도 듣곤 하지만 전문가인 패션 에디터와는 비교가 안 된다. 언젠가 편집숍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에 이 가격을 지불해도 될까 하는 고민에 빠졌을 때 지금 런던에서 가장 떠오르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라면서 당장 구입할 것을 종용한 것도 패션 에디터였다. 편집숍 쇼핑은 가장 즐거운 쇼핑 스팟 중 하나다. 패션에 관한 가장 날카로운 감각을 자랑하는 바이어들이 고르고 고른 옷은 예쁘지 않을 리가 만무했고, 몇 벌밖에 없다는 희소성도 중요한 가치. 무엇보다 디자이너의 DNA가 그대로 느껴지는 웰메이드 의상들은 대량생산하는 옷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생기와 열정이 있다. 다만 편집숍의 수많은 브랜드 중 모르는 게 반이라는 건 가끔씩 궁금증과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날카로운 감각으로 선택된 패션 아이템에 늘 반하곤 하지만 그 가치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폭설처럼 쌓였다. 그리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에 패션 에디터와 함께 쇼핑에 나섰다. 일곱 곳의 편집숍은 각자의 개성과 분위기로 나를 사로잡았다. 지금 가장 빠른 것, 멋진 것, 아름다운 것과 패션에 미친 매력적인 사람들이 다 그곳에 있었다.

밀라노에서 온 원더랜드, 10 꼬르소꼬모 서울
밀라노를 여행하고 10 꼬르소꼬모의 포장지에 담긴 CD를 사 오는 게 정말 으쓱했던 시절이 있었다. 늘 멀리서 안부를 궁금해하던 그 10 꼬르소꼬모가 아시아에, 그것도 우리나라에 최초로 문을 열었을 때의 놀라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오픈 1주일 동안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 그곳을 드나들었는지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 갈 때면 괜히 기분이 좋다. 목적은 그때그때 다르다. 가끔은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책을 사기도 하고, 협업으로 탄생한 특별한 향수를 살 때도 있다. 예쁘고 멋진 곳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곳이 일종의 디즈니랜드가 아닐까 한다. 원하는 게 다 있으면서도,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원하게 되는 것. 10 꼬르소꼬모는 정말 많은 브랜드를 바잉한다. 때로는 이 공간 자체가 날 교육시키기도 하는데 한여름에 신기 좋은 까스따네르(Castaner),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슈즈를 만드는 브루노 프리조니(Bruno Frisoni)를 알려주고 신겨준 곳도 여기. 상당히 고가의 제품이 포진한 것이 사실이지만 톱숍 케이트 모스 라인 등 중저가 브랜드도 생각보다 많아서 쇼핑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10 꼬르소꼬모는 한동안 내 월급도둑이었다.

옆에 바짝 선 <얼루어> 패션 에디터이자 후배인 김주현은 끊임없이 “이건 뭐야”라고 물어대는 내게 최신 정보를 물어다 주고 있었다. ‘퍼스널 쇼퍼’역할을 해주는 후배를 대동하고 목적 없이 느긋하게 구석구석 쇼핑하는 동안 태그를 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낯선 브랜드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계단 위 마네킹에 곱게 입혀진 튜브톱 드레스에는 한창 리듬 체조 중인 붉은 리본의 궤적 같은 경쾌한 프린트가 한 가득이었는데 막 도착한 자일스(Giles) 신상품. 심플하면서 로맨틱한 터치의 옷이 많아 인기가 많겠다 싶었는데 거의 도착과 동시에 판매 완료되고 있단다. 그 옆에는 ‘소피스티케이티드’란 수식어가 너무 잘 어울리는 하칸(Hakaan)이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타쿤, 하칸, 자일스가 사이좋게 걸린 행어를 통째로 내 옷장에 옮길 수는 없을까? 알라이야의 구조적인 옷들과 아름다운 슈즈가 차지하고 있는 3층에는 에르메스 빈티지 백 옆에 오래된 듯 멋스럽지만 확실히 새것인 백이 놓여 있었다. ‘벨기에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가죽 브랜드 델보(Delvaux) 제품으로 10 꼬르소꼬모가 독점하는 브랜드 중 하나라고. 좋은 가죽과 단순함이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임을 역설하는 듯한 백은, 진열된 이 한 개만 남았다고 했다. 커스튬 주얼리와 안경, 선글라스 같은 액세서리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엠마뉴엘 칸(Emmanuelle Khanh)과 린다 패로(Linda Farrow) 선글라스는 흰 티셔츠와 데님 팬츠를 소환했고, 앤티크 분위기지만 할머니의 유품처럼 고풍스럽기보단 록 스타의 여자 친구처럼 불량하고 시크한 기운을 뿜어내는 주얼리는 아일랜드 주얼리 디자이너 톰 빈스((Tom Binns) 것. 그러다 보면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데 란제리 옆에 도발적으로 누워 있는 핑크색 안대 같은 게 그랬다. 한 달에 한 번은 낮과 밤 거꾸로 되는 마감을 매달 겪게 되면서 안대가 숙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달았는데, 이 보드라운 새틴으로 만든 실크 안대를 쓰고 자면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역시 브랜드를 추적해봤다. 피피 새닐(Fifi Channill)이라는 뉴욕 란제리 브랜드.

10 꼬르소꼬모 바이어는 말했다. “우리의 대표 브랜드라고 하면 알라이야겠죠. 하지만 시즌마다 새로운 브랜드를 발굴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하칸, 데스킨스 띠어리(Teyskens Theory), 크리스토퍼 르메르(Christopher Lemaire)를 바잉해요. 특히 하칸은 카를라 소차니가 특별히 컨설팅해 준 브랜드죠. 크리스토퍼 레부른(Christopher Raeburn)은 재활용 재료와 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브랜드고요.” 10 꼬르소꼬모라는 거대한 공간은 각각 다른 컬러의 브랜드가 모여 만드는 카니발 같은 곳이다. 물론 원칙은 있다. 카를라 소차니가 결코 타협하지 않는 ‘여성성’, 그리고‘기본기가 탄탄하고 고유의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만 바잉한다는 것.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사는 모든 것은 실패한 적이 없다.

내 이웃집엔 패셔니스타가 산다, 수퍼 노말
‘수퍼 노말’이라는 글씨가 슈퍼맨 망토처럼 날아갈 것 같은 필기체로 쓰여 있다. ‘수퍼’와‘ 노말’이라는 안 어울릴 법한 이름의 유쾌한 조화도 이곳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예쁜데 성격까지 털털해서 남자 친구만큼 여자 친구도 많은 여자 같은 곳. 매장에서 들어서서 쇼핑을 하려고 하면 갓 만든 라테 한 잔을 손에 쥐어준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현실과 동떨어진 난해한 옷이 별로 없다. 당장이라도 행어에 걸린 아무 옷이나 입고 나가 낮의 촬영 스케줄부터 오후의 미팅, 밤의 데이트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옷.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쁘다고 인사 들을 법한 옷이다. 특히 후배는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McQ의 체크무늬 재킷을 골라줬다. 알렉산더 맥퀸의 세컨드 브랜드라는 걸 몰랐다는 것에 조금 분했지만, 재킷을 입는 순간 그런 상념은 사라져버렸다. 예뻤다! 늘 입는 스타일 말고 잘 어울릴 줄 미처 몰랐던 새로운 스타일을 추천받을 수 있다는 것도 편집숍 쇼핑이 주는 매력이다. 다양한 브랜드가 한 숍에 모여있는 특성상 기회는 무궁무진 한 것. 패션 에디터 후배가 없더라도 상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편집숍의 사람들이 당신의 ‘그 사람’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 쇼트 재킷은 청바지랑 입으면 예쁘겠다, 그런데 엉덩이가 작아서 데님 팬츠가 잘 안 어울린다는 대화를 들은 스태프는 ‘엉덩이가 작은 사람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진 브랜드로 씨위 데님을 추천해줬다. 또 노벰버(November)의 진도 추천받았는데 이탈리아 진 브랜드지만 오히려 일본에서 인기가 뜨겁다고. 이렇게 작은 엉덩이에 꼭 맞는 데님 팬츠를 운명처럼 얻었다. 수퍼 노말은 특히 리조트 컬렉션을 적극적으로 바잉하고 있었는데 리조트 컬렉션이 대체로 웨어러블한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걸 생각하면 수퍼 노말의 숍과 잘 어울리는 조합임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반하게 된 두 가지 브랜드는 이갈 아즈루엘(Yigal Azrouel)과 마커스 루퍼(Markus Lupfer). 마커스 루퍼는 시퀸과 프린지로 장식된 네이비색 미니스커트, 미키마우스의 그림자가 그려진 듯한 스트라이프 니트 등의 아이템이 마음에 들었고, 좀 더 섬세한 가죽, 실크 등을 소재로 한 라인을 선보인 이갈 아즈루엘은 실크 팬츠나 블랙 가죽 칼라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아이보리색 재킷, 회색 가죽 베스트, 동양풍의 플라워 프린트 블라우스 등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침 올 시즌부터는 이갈 아즈루엘의 세컨드 브랜드인‘ Cut25’도 함께 바잉한다고 하니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그의 디자인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또 동물보호주의자라면 비닐 캔버스에 가죽 가방을 프린트한 위트 있는 페이크 백 ‘진저(Ginger)’가 마음에 들 것이다. 홍콩 디자이너의 백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또 편집숍 쇼핑은 낯선 브랜드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알던 것의 색다른 매력을 알려주는 계기가 된다. 수퍼 노말은 주디스 리버(Judith Leiber)를 독점 공급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주디스 리버의 필 박스(Pill Box)가 그것이었다. 핑크빛 새, 컵케이크를 본뜬 장식품 같지만 똑딱 열면 안에 약 등을 넣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 바이어는 말했다. “예쁘죠? 저흰 이 박스를 프러포즈 링 박스로 적극 추천하고 있어요. 누가 이 프러포즈를 거절하겠어요?”

시간의 전후 사정을 뛰어넘는, 셀러브레이션
셀러브레이션에 가기 며칠 전에 한 패션 홍보대행사의 팀장과 점심 식사를 할 일이 있었다. 미팅의 목적이었던 비타민워터와 글락소워터에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편집숍 쇼핑으로 넘어갔다. “오, 그럼 셀러브레이션도 가시겠네요? 셀러브레이션 오픈 날은 정말 대단했어요. 저는 기자들이 쇼핑을 그렇게 많이 하는 건 처음 봤어요.” 셀러브레이션은 오픈한 지 이제 1년 된 편집숍인데, 사실 소식만 듣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곳이다. 수퍼 노말에서 나와 청담동 뒷골목을 따라 좀 더 걸어 내려와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이 셀러브레이션이다. 1층의 여성층, 2층은 남성층.

아버지의 서재를 물려받은 젊은 커플의 공간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은 처음에는 눈에 잘 띄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벌 한 벌 들여다보면 당장이라도 입고 싶어진다. 도톰한 니트로 더플 코트를 만든 듯한 초록색 카디건이나 회색 퍼를 두른 케이프형 카디건은 평범한 듯하지만 입어보면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일품. 니트 재킷과 카디건이 유독 맘에 들었던 르몽생미셸(Le Mont St. Michel)도 19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의 브랜드라고 했다.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 파리지앵의 감각을 소화한다는 평을 받는다고. 비슷한 분위기의 ‘골든 구스 디럭스 브랜드(GoldenGooseDeluxeBrand)’도 눈에 들어왔다. 베네치아에 본부를 둔 이탈리아 브랜드로 디자인 모토가 이탤리언의 정신과 브리티시 테일러링의 조화라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행어의 반대쪽에는 반대로 심플하고 모던한 코트와 드레스, 팬츠 등이 걸려 있었는데, 스페인 브랜드‘마스콥(Masscob)’이다. 스페인에서 꽤 인기 있는 브랜드라고. 독일 브랜드‘ 코스(COS)’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미니멀리즘 스타일이라고 하겠지만 선이 날카롭다기보단 동글동글해서 보다 여성성을 배려해주는 기분. 특히 어깨에 엠브로이더리 장식이 달려 있는 밝은 베이지 미니 드레스는 청첩장이 줄줄이 대기 중인 봄과여름을 대비해 한 벌 들여놓으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참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고, 은근히 유혹적인 포인트도 있는 전천후 리틀 베이지 드레스라고 할까. 매장의 직원이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서 보여준 것은 오헬리 비더만(Aurelie Bidermann)의 액세서리였다. 깃털 모양, 도토리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비롯한 다양한 액세서리였는데 그 안에는 진짜 도토리와 진짜 깃털, 진짜 낙엽이 들어 있어서 한 제품도 같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금 속에 박제된 깃털이었던 것. 파파라치 컷에서 예쁘다고 생각했던 백이 레베카 민코프(Rebecca Minkoff)의 태그를 달고 있었는데, 인기가 좋아서 입고되는 족족 판매되어 매장에 거의 남은 게 없다고 한다. 친절한 매장 스태프와 편안한 분위기에 반해 느긋하게 쇼핑을 했다. 매장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 좋다고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더니, 전통적인 장인 기법으로 생산된 마드에렌(Madet Len) 제품이라고 했다. 밀랍을 제외한 어떤 동물성 재료도 넣지 않은 에센스 오일로 생물학자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향초라고. 국내에서는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다고 하니 향초 마니아라면 잊지 않고 방문해보길. 그러고 보니 향초뿐만 아니라 앤티크 가구와 소품, 꽃까지 팔고 있다.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물어봐도 실례가 안 되겠다.

셀러브레이션의 옷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클래식’이다. 정통 클래식에 모던함을 조화시키거나 남자들은 몰라도 여자들은 열광하는 프렌치 시크를 더한다. 디올의 뉴룩이나 지방시의 드레스 같은 것이 아니라 방금 사 입어도 예쁘고, 10년 후에 입어도 예쁘고, 언젠가 딸이 태어나면 물려줘도 될 것 같은 타임리스 스타일이 진정한 클래식이라고 믿는다면 셀러브레이션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큼직한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내게 패션 에디터는 말했다. “선배가 여기서 꼭 뭔가 사실 줄 알았어요.”



서정적인 패션 갤러리, 인더우즈
인더우즈를 앞에 두고 잠깐 헤맸다. 분명 이 골목이라고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왜 편집숍은 다 1층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인더우즈는 2층에 있다. 길고 가는 손으로 흘려 쓴 것 같은 글씨가 새겨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금은 다른 세상이다. 편집숍 중에서 가장 작은 곳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가장 예쁜 곳이기도 했다. 진짜 빈티지 가구와 마치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것 같은 옷들. 워낙 공을 많이 들여 마스터피스에 가까운 옷이 많기도 했지만 옷 한 벌 한 벌이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아우라를 뽐내는 숍. 인더우즈는 오픈한 지 5년쯤 되었지만 계속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저희는 부티크 숍을 지향해요.” 정상구 바이어의 말이다. 인더우즈의 스태프들은 모두가 매장, 바잉, 홍보 등에 참여하는 멀티플레이어라고. 직접 골라 바잉하고, 실제로 판매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다 보니 한 벌 한 벌 스토리도 많고, 찾아오는 고객을 모두 기억한다. 스타일별로 2~3벌 들여올 뿐. 실제로 1주일의 간격을 두고 두 번 매장을 방문했을 때 마음에 둔 옷을 물어봤을 때 돌아온 대답은 모두 팔렸다는 것이었다. 인더우즈는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물론 해외에서도 신규 브랜드 위주로 바잉을 한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이곳의 브랜드 중에 알고 있었던 것은 제레미 랑 뿐이었다. 특히 라코스테의 디자이너로 데뷔하는 펠리페 올리베이라 밥티스타(Felipe Oliveira Baptista)의 인연은 꽤 오래 이어져와서, 발표가 나기 전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와 기쁜 소식을 함께 축하했다고.

부티크 숍을 지향한다는 말처럼 인더우즈에는 코트나 재킷, 드레스가 많았다. 그중 알레산드로 델라쿠아(Alessandro Dell’Acqua)의 새 브랜드 No.21의 블랙 드레스를 입어보았는데 건축 모형에 비할 만큼 구조적인 라인이 일품이었다.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는 이탈리아 니트 디자이너로 시작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는 접고 지난 시즌부터 No.21으로 다시 론칭했어요. 특히 이번 시즌 꽃무늬 프린트의 룩이 참 예뻐요!”라며 후배가 강력 추천한 브랜드이기도 했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는 하늘하늘한 봄옷을 권하건만, 데코티스(Decotiis)의 블랙 코트는 겨울을 묶어놓고 싶게 만들었다. 이 코트는 입는 사람으로 하여금 잉그리드 버그만이나 그레타 가르보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스콧 피츠제럴드가 <내가 마지막 본 파리>를 쓰던 시절로 날아갈 법한 느낌을 주는 트렌치코트의 가장 아름다운 해석이라고 할 법했다. 이건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인더우즈는 슈즈 바잉에도 꽤 애정을 기울이는 듯했는데, 신발만은 나름 알고 있다는 나이기에 전체 편집숍에서 유일하게 내가 모르는 슈즈 브랜드를 바잉하고 있었다. 특히 신인 디자이너 프랭크 텔(Frank Tell)의 슈즈는 어떤 슈즈홀릭도 감동하게 할 만했는데 이 신발을 만든 사람은 한국계인 라파엘 영이라고. 그는 네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그의 삼촌이 1950년대 말 입생로랑에 신발 스튜디오를 설립한 앙렉상드르 나르시였어요. 라파엘 영은 그 공정에 어릴 때부터 꽤 열중해서 삼촌으로부터 라스트부터 굽까지 일일이 나무를 직접 깎아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을 배울 수 있었고 지금은 차세대 하이엔드 슈즈 디자이너로 평가받고 있죠. 저흰 그가 아주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라파엘 영의 슈즈가 작품에 가깝다면,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샤넬의 수석 슈즈 디자이너를 겸임하는 로렌스 데케이드(Laurence Decade)의 슈즈는 로망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한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신발은 보석과 조각처럼 매우 육감적인 오브제라는 거예요. 프렌치 감성이 담긴 섹시한 신발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요.”

인더우즈는 다른 편집숍이 하나의 콘셉트를 잡고 매 순간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 것과 달리 매 시즌 콘셉트를 정해 바잉을 진행한다. 그러니 반년 전 인더우즈와 지금이 다르고, 지금과 반년 후가 달라질 수 있는 곳이다. 인더우즈는 항상 같은 곳에 있지만 그 안에서 상영 중인 패션 영화는 늘 다르다는 것. 우아하고 느릿하며 아름답다는 점만 한결같다.

패션의 우아한 세계, 분더숍
분더숍은 우리나라 편집 매장의 상징 같은 존재다. 분더숍이 처음 생겼을 때 패션계에서 울려 퍼지던 팡파르가 여전히 귀에 선할 정도다. 그러나 분더숍은 자주 찾게 되는 곳은 아니었다. 기억 속의 분더숍은 직선적이고 미니멀한 옷이 많았던 것 같은데 역시 트렌드가 바뀌면서 더 아름답고 로맨틱해진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촬영을 위해 픽업을 온 선배 패션 에디터를 우연히 만났다. ‘땡땡이’를 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브랜드를 공부하기 위해 근무 시간에 합법적으로 쇼핑 중이라고 말하자, 유쾌하게 웃으며 비오네(Vionnet)도 꼭 보라고 말해줬다. 비오네는 정갈한 라인과 루스한 핏의 드레스, 팬츠, 재킷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이엠러브>나 <세이빙 그레이스>의 여주인공을 떠올릴 만했다. 좀 더 웨어러블한 브랜드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카우프만 프랑코(Kaufman Franco)였는데, 할리 베리와 에바 롱고리아 같은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드레스로도 유명하다고. 분더숍의 매장에서는 카키색을 주제로 한 모던한 밀리터리 룩과 애비에이터 룩을 볼 수 있었다. 제이멘델(J. Mendel)은 여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디테일을 모두 가진 듯했다. 펀칭 디테일의 스웨이드 숄이나, 레이스, 시스루를 가득 수놓은 시퀸. “필로소피와 비슷한 분위기인 하이패션 브랜드”라는 후배의 설명처럼 섬세한 쿠튀르적인 터치가 장점인 듯했다. 분더숍이 주로 고가의 하이패션 브랜드를 바잉하긴 하지만 젊고 트렌디한 새 브랜드도 만날 수 있었다. 알렉산더 맥퀸 못지않게 해골 모티프에 집착하는 듯, 온통 해골이 프린트된 것만 빼면 매우 여성스러운 블라우스와 해골 티
셔츠를 선보이는 토마스 와일드, 록 시크가 강하게 느껴지는 일본 브랜드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분더숍은 가장 고급 백화점 같은 쇼핑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편집숍의 개성이나 자유로움 대신 가장 조용한 쇼핑을 원한다면 놓칠 수 없는 곳. 그리고 쇼핑이 끝난 뒤 1층 베키아 앤 누보에서 간단한 커피와 샐러드를 먹는 재미도 빠뜨릴 수 없다.

톰 그레이하운드 다운스테어즈 즐겨찾기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편집숍이란 핑계로 톰 그레이하운드 다운스테어즈에 자주 들른다. 주변에 르 카페, 그랑씨엘, 마이쏭 등 자주 들르는 레스토랑이 많은 것도, 위층에 무이의 아웃렛이 있는 것도 톰 그레이하운드를 자주 찾게 되는 이유 중 하나지만 적당한 가격에 늘 가장 핫한 트렌드를 픽업할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톰 그레이하운드 덕분에알려진 브랜드도 많다. 칩먼데이나 앤소피백도 그렇고, 1년에 두 번 발행하는 <아크네 매거진> 때문에 호감도와 호기심도가 모두 최고에 달했던 아크네(ACNE)의 실물(?)을 볼 수 있는 곳도 이곳이었다. 언뜻 남자에게 더 이로운 숍 같지만 알고 보면 여자를 위한 아이템도 많다. 특히 S/S 상품의 일부가 발 빠르게 도착해 있었는데 올 시즌 첫 바잉을 시작했다는 아쉬시(Ashish)도 그것. 인도 디자이너 아쉬시 굽타(Ashish Gupta)의 브랜드라고 하는데 모든 아이템에 스팽글 장식이 뒤덮여 있다, 굉장히 화려했는데 이 화려함이 아쉬시의 매력이 분명했다. 이국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강렬한 색상의 대비도 눈길을 끈다. 또 그 뒤쪽에는 아직 패셔니스타의 지위를 잃지 않은 것이 분명한 클로에 셰비니의 작품이 있었는데, 오프닝 세레머니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고. 호피무늬도 이렇게 경쾌하고 귀여울 수 있다고 증명하는 호피 프린트의 드레스는 소매가 없고 아랫단이 풍성하게 퍼지는 것과 소매가 있고 A라인으로 떨어지는 것 두 가지가 있었는데 어느 쪽을 사야 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 호피 패턴의 드레스에 검은색 카디건과 플랫 슈즈 또는 재즈 슈즈를 매치하는 것이 평소의 나의 스타일이라는 걸 너무 잘 아는 후배는 검은색 카디건 대신 가벼운 흰색 집업 점퍼를 입고 흰색 스니커즈나 옥스퍼드화를 신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후배의 스타일링이 훨씬 어려 보이고 봄옷 같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편 또 한 명의 셀러브리티 디자이너가 대기 중이었는데 시에나 밀러의 언니 사바나 밀러와 시에나 밀러가 함께 만든 브랜드 트웬티8트웰브(Twenty8Twelve)가 그것이었다. 아쉽게도 아직 도착하지 않아 실제로 입어보진 않았지만, 후배의 증언에 따르면 사지 않고는 못 배길 옷이라기에 살짝 런던 컬렉션 사진을 찾아보았다. 과연, 이 먼 한국에도 ‘시에나 밀러 스타일’을 전파한 주인공 다웠다. 마지막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새 액세서리 추리 게타(Tzuri Gueta). 도대체 금속인지, 털실인지, 산호인지 눈으로만 봐선 소재를 맞히기 힘든 액세서리인데, 답은 바로 실리콘. 껴보면 아주 말랑말랑하게 손가락에 착 달라붙는다. 프랑스 디자이너가 만드는 주얼리 브랜드라고. 독특한 질감을 살린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이 있었는데 10만원대의 반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올봄에도 톰 그레이하운드로 가는 발길이 제법 분주할 것 같다.

남자로 환생한다면, 애딕티드
다시 애딕티드가 있는 압구정동의 길을 걸었다. 가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스태프들의 분주한 손놀림을 목격하곤 했는데 이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방금 연 듯한 상자가 몇 개쯤 열려 있었다. 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행어에 빽빽이 걸린 옷들과 조금은 자유롭게 개어서 층층이 포개놓은 프린트 티셔츠가 창고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매장 한쪽에는 아트북과 사진집 그린색 가죽 커버를 씌운 소파가 놓여 있었다. 판매하진 않고 그냥 보라고 둔 책이다. 스칸디나비아 무드의 넓은 책상에선 스태프들이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고, 게다가 매장을 유유히 노니는 커다란 견공이 있었다! ‘스모키’라는 이웃집 견공으로 늘 매장에 놀러 온다. 개도 패션과 이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아는 거다.

매장의 2시 방향부터 시계 방향으로 옷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걸려 있는 퀼팅 장식을 곁들인 피플스 마켓(People’s Market)의 베이지색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슬림한 핏에 넉넉한 길이, 무엇보다 색깔이 마음에 들어 가격표를 보니 의외로 너무 저렴한 22만원! 구스다운이 아니라 솜 점퍼라곤 하지만 정말 마음에 들었고 지퍼로 소매를 분리하면 조끼로 바뀌는 트랜스포머였다. 이 점퍼도 40% 가까이 세일 중. ‘피플스 마켓’은 영국 디자이너 덱스터 왕(Dexter Wong)이 론칭한 중저가 브랜드로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최근 톱숍과의 협업으로 한층 주가가 높아졌다고. 애딕티드에는 런던과 북유럽의 브랜드가많았다. 특히 우드우드(Wood Wood)와 피터 젠슨(Peter Jenson), 벨루어(Velour)의 옷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우드우드는 활기찬 컬러와 프린트가 매력적이었고, 피터 젠슨은 셔츠가 보는 족족 맘에 들어서 자꾸 사이즈를 확인하게 되었다. 스웨덴에서 왔다는 벨루어도 슬림한 라인의 치노 팬츠와 위트 있는 셔츠에 손이 갔다. 바이어와 패션 에디터의 제보에 따르면, 패션 피플의 스트리트 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이 치노라고. 치노 팬츠 입는 남자가 질색이라는 친구에게 소개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드우드는 ‘북유럽에서 온 브랜드’의 대표격인데. 특히오가닉소재의 비중이 높아요.” 패션 에디터의 소개처럼 우드우드 역시 감각적인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기가 높단다. 특히 우드우드는 애딕티드와 독점 계약을 맺었다고 하니 우드우드의 옷이 궁금하다면 꼭 둘러보길.

애딕티드는 절대적으로 남자 옷의 비율이 높은 곳. 그러나 이곳에서 두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남자로 태어나서 입고 싶은 옷과 여자인데도 입어도 될 것 같은 옷이 여기 가득하다는 것을! 피터 젠슨의 옷도 그 이유가 되었다. 수염이 긴 검은 토끼 태그가 옷마다 붙어 있다면 피터 젠슨 것이 맞다. “피터 젠슨은 덴마크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예요.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위트 있게 풀어내는 매력적인 룩으로 정평이 나 있죠.” 애딕티드의 여성 바이어는‘ 입고 싶은 남자 옷’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해줬다. “실제로 S사이즈가 빨리 품절되고 있어요. 그리고 좋은 소식은, 피터 젠슨이 여성복 라인을 론칭했다는 거예요. 저희도 바잉을 했는데 아직 도착을 안 했죠. 우드우드도 여성복을 몇 피스 주문했어요.” 애딕티드의 옷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단정함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는 것에 끌렸다. 패션 피플과 너드의 교집합 같은 곳. 제각기 캐릭터에 맞는 멋진 패션으로 화제를 모은 영국 드라마 <스킨스>도 떠올랐다. 또 애딕티드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웹사이트를 충실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것. 거의 모든 제품의 사진을 올려놓은 온라인숍도 활성화되어 있고 낯선 브랜드에 호기심을 가질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브랜드와 디자이너 설명도 친절하게 해두었다.

F/W 상품이 일제히 세일을 하고, S/S 신상품이 속속 도착하거나 대기 중인 편집숍은 쇼핑욕에 불을 댕기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많은 브랜드를 만났음에도 여전히 편집숍에는 아는 브랜드 반, 모르는 브랜드가 반일 것이다. 편집숍은 결코 만족을 모르고, 또 각자 맹렬하게 새로운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찾아내기 위해 눈을 빛내고 있으니까. 그 패션 전쟁에서 승리한 그들의 의기양양한 미소는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쇼핑을 하고, 다양한 브랜드를 입어보면서 이건 정말 멋진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광고라는 일종의 세뇌 과정을 거치지 않고, 브랜드 네임에 유혹받지 않은 채 어떤 한 벌의 옷과 나의 정직한 대화를 한다는 것. 옷과 나 사이에 아무런 방해물도 없는 그 느낌과 화학 작용이 마음에 들었다. 또 대량생산하는 거대 브랜드의 디자인보다 디자이너 직접적인 손길이 느껴지는 작은 브랜드들이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며, 비범한 구석이 하나쯤 꼭 있다는 것도 거부할 수 없는 요인이다. 이 긴 쇼핑에서 나는 앞으로 늘 기억하고 들여다볼 것 같은 몇 개의 브랜드를 찾았고, 당장 구입할 계획은 없지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진 디자이너의 이름을 얻었다. 아는 게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다는 어른들의 놀라운 지혜는 쇼핑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는 게 많으면 사고 싶은 것도 많다. 휴대폰의 새 메시지가 깜박거렸다. “Current Elliott의 편한 티셔츠와 데님, Philipp Plein의 블링한 블라우스 입고.” 이달, 나는 내 무덤을 판 게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