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꼭 다문 입술과 깊은 눈을 지워내는 데 꼭 1년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고요한 표정으로 새 작품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이요원은 자주이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과 볼을 움직이지 않아도 눈으로 희로애락을 전하는 얼굴을 보며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라고 운을 떼는 오래된 시와 한 잎의 영혼, 한 잎의 눈을 생각했다.

블랙아이보리 컬러의 원피스 모스키노 칩앤시크(Moschino Cheap&Ch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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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그해의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드라마와 의미있는 영화 한 편을 끝내고 휴식기를 가진 배우에게 건네는 첫마디는, 쉬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할 때가 많다. 아마 이요원은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 질문을 반복해서 받을 텐데, 어쨌든 <얼루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답했다. 가까운 아시아를 많이 갔지만 역시 가장 좋았던 건 몰디브였다고. 문득 예전에 그녀와 함께 해외 촬영을 떠났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물가에도 못 갈 것처럼 얌전해 보이는 이요원이 수상 레포츠에 상당히 소질이 있으며, 함께 스카이 다이빙을 했을 정도로 용감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녀라면 온통 초록빛 바닷물인 그곳을 정말 즐겼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간혹 화보를 찍는 것 외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긴 휴가가 끝나고 그녀는 다시 카메라 앞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로맨틱 판타지물로 알려진 <49일>. 조현재, 정일우, 남규리, 배수빈 등과 함께 출연하는 이 드라마에서 이요원은 1인 2역을 연기한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혼수상태에 빠진 ‘신지현’의 영혼이 ‘송이경’의 몸을 빌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는다는 내용. 신지현 역은 남규리가, 송이경 역은 이요원이 맡지만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밝고 긍정적인 신지현은 모든 걸 다 가진 여자예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 사람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거예요. 반면 송이경은 고아원에서 자랐고, 평생을 의지해온 친구이자 약혼자를 교통사고로 잃은 다음 마음이 죽어버린 인물이죠.” 신지현은 송이경의 몸을 빌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세 사람의 눈물을 얻어야 회생할 수 있다. 즉, 송이경과 신지현의 두 영혼 모두를 그녀 혼자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제가 송이경과 신지현을 연기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송이경의 역을 남규리 씨가 연기하면서 와, 이건 정말 어렵겠구나 싶었어요. 다르게 연기하면 되는 거 였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연기를 해야 하는 거죠.”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색다른 느낌이어서 좋았고, 로맨틱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에도 끌렸다. “보통 1인 2역 스토리는 아버지의 영혼이 아들에게 들어간다거나, 아내의 영혼이 딸에게 들어간다거나 하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이 내 몸을 쓰는지 몰라요. 성격도 다르고, 상황도 다른 인물을 한 몸으로 연기해요. 송이경은 안쓰럽고, 신지현의 억울한 마음도 이해가 가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그렇게 인생을 배우고 철이 드는 거죠. 현실에서 생각해볼 법한 판타지가 아닌가요? <선덕여왕> 이후에는 현대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이 가진 다양한 요소가 마음을 움직였어요.”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대체로 뜬구름잡는 이야기가 되곤 한다. 그럼에도 작품에 기대가 가는 건, 그것이 이요원이 선택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좋은 작품을 골라왔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왔다. “작품 고르는 눈이 있다는 말을 가끔 듣지만, 저 혼자만의 결정은 아니죠.” 소속사의 의견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 “우린 너무 오래되어서, 정말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어요.” 이요원은 자신이 세상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것으로 ‘인복’을 말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인복이 있었어요. 저는 사람과 사람의 신뢰를 많이 생각해요. 그래서 기대 이상은 못하더라도 기대만큼은 충족해줘야겠단 생각으로 열심히 해요.” 모델의 이미지가 더 강했던 그녀에게 주연을 맡긴 <푸른 안개>와 <고양이를 부탁해>는 지금도 각별한 작품. “두 작품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고양이를 부탁해>의 감독님은 굉장히 섬세한 연기를 바랐죠. 스티커 사진을 붙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손만 나오는 장면도 굉장히 많이 찍었어요.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어요. 경험이 없었을 때니까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냥 사진 붙이는 건데 무슨 연기를 하라는 걸까. <푸른 안개>에서도 표민수 PD님이 손 연기를 많이 강조했어요. 저는 그때 배운 게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그녀는 촬영장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멘토였던 것 같다면서 말을 이었다. “<푸른 안개>를 촬영할 땐 이경영 선생님이나 김미숙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깜짝깜짝 놀랐어요. 조금 전까지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웃었는데, 바로 진지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죠. 그때의 전 그게 안 됐었거든요. 그러고 보면 전 늘 연기를 잘하는 사람하고만 작품을 해온 거예요. <화려한 휴가>의 김상경 선배, <선덕여왕>의 고현정 선배도 그랬죠. 현장에서 항상 배우는 입장이었다고 생각해요. 늘 쟁쟁한 선배하고 해왔는데, 이번 드라마는 배수빈 씨를 빼고선 제 또래 아니면 후배라는 게 조금 두렵긴 해요. 저도 아직 모자라고 부족한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