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겨우내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꽃을 피운다. 꽃피는 봄날엔 고운 빛깔에 취하고, 싱그러운 향기에 취한다. 봄꽃의 풍경 속으로.

동백꽃 | 제주도 동백군락지
동백은 잎이 져서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꽃잎이 두꺼워 금방 시들지 않는다. 여전히 발갛고 싱싱한 자태가 초연하기까지 하다. 남원포구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참으로 독특하다. 가로수처럼 키가 큰 동백나무를 돌담이 울타리처럼 두르고 있는 형상이랄까? 제주의 봄은 꽃이다. 바닷가 해안도로는 유채꽃으로 노란 물이 들고, 갯무꽃이 핀 곳은 온통 보랏빛이다. 감귤밭에는 하얀 눈송이가 핀다. 그 향이 백서향만큼이나 향기로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취한다. -이해선(여행작가)

1 협죽도 | 제주도 한림공원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보고 자란 게 제주의 자연이다. 그것이 감성이 됐고, 작품의 모태가 됐다. 작년 4월, 작업을 하려고 한림공원으로 가는 길. 가로수길에 들어서자 진분홍 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린 꽃망울이 프리지어를 닮았다. 협죽도였다. 가로수로 심어놔서 길가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집 근처에는 절대 심지 않는 꽃. 가녀린 꽃잎에 독이 서렸다. 그새 바람이 거세졌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 속을 알 수 없는 꽃. 제주는 여전히 신비롭다. -박형근(사진가)
2 유채꽃 | 청산도
도청항에 내려 마을로 가는 길에 유채꽃과 청보리밭을 만났다. 유채꽃 사이를 걷고 있을 때 거센 바람이 불었다. 가냘픈 꽃대가 힘없이 나부꼈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달콤한 향기가 그윽하게 퍼졌다. 노란 물결이 잠잠해질 때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푸른 물결이 밀려왔다. 다음 날 새벽 일출을 보려고 오른 산행길. 아침 해가 범바위를 환하게 비추자 어둠에 가려졌던 자줏빛 철쭉에도 불이 켜졌다. 산 능선을 타고 철쭉이 군락을 이뤘다. 누가 청산도를 푸르다 했나? -안형준(사진가)

1 홍목련 |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
천리포수목원은 목련의 천국이다. 봄이 오면 400여 종의 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린다. 하얀 목련은 백옥같이 고귀하고, 분홍 목련은 사춘기 소녀처럼 여리고, 붉은 목련은 여배우처럼 화려하다. 목련의 향기는 난초에 피어나는 꽃 같다. 목련의 꽃잎은 동백꽃만큼이나 도톰하지만, 땅에 떨어지는 순간 금세 시들어버린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틈을 쉬이 내주지 않는다. 말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진다. 목련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노란 민들레 꽃대가 고개를 내민다. -정상현(사진가)
2 철쭉 | 전남 보성 일림산
깊은 밤을 날아서 신새벽에 가까스로 정상에 닿았다. 멀리 마을과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해안선과 맞닿은 하늘이 금세 붉어졌다. 해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능선을 따라 진분홍 철쭉이 군락을 이뤘다. 바람이 불자 분홍 물결이 넘실댄다. 바닷바람에 손이 시리다. 매서운 바람을 맞고 자란 철쭉은 빛깔이 붉고 선명하다. 일림산의 철쭉은 어른 키만큼 크다. 그 사이를 걷노라면 비밀의 화원으로 통하는 문을 만날 것 같다. -김현(사진가)

1 들장미 | 경남 하동 섬진강변
2008년 4월, 소규모아카시아밴드와 전국 일주를 떠났다. 하동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일찍 잠이 깼다. 시골장터에 갔다 섬진강을 따라 돌아오는 길. 멀리 무성한 수풀 사이로 빨간 점이 보였다. 한 떨기 장미를 보았다. 들녘에 피어나는 주인 없는 장미. 그래서 꽃말도 고독과 외로움인가 보다. 가까이 가자 은은한 향이 풍겼다. 달콤하기보다 풋풋하고 향긋한 향기다. 햇살이 비쳤다. 가냘픈 꽃잎 사이로 드러난 꽃술이 눈부시게 노랗다. -표기식(사진가)
2 왕벚꽃 | 충남 서산 개심사
개심사는 왕벚나무 천지다. 어림잡아도 스무 그루는 족히 넘는다. 왕벚꽃은 꽃이 겹겹이 핀다 하여 겹벚꽃이라 불린다. 꽃망울이 팝콘처럼 톡하고 터진다. 해탈문으로 들어서는 길, 왕벚나무 아래 연분홍 꽃이 낭자하다. 가지에 매달려 시들고 있던 왕벚꽃이 스치는 바람에도 후드득 떨어진다. 꽃이 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명부전 앞을 걷다 꽃잎 가장자리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꽃을 보았다. 청왕벚꽃. 개심사에만 있는 꽃이라 했다. 개심사의 봄은 왕벚꽃과 함께 온다. -김연미(여행작가)

1 유채꽃 | 전남 나주 영산강 동섬
영산강의 봄은 유채꽃으로 해 유채꽃으로 끝난다. 강가도, 섬도, 물길도 유채꽃 차지다. 동틀 무렵, 유채꽃밭을 둘러싼 개울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시야가 온통 뿌옇게 흐려지면 몽환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모습이랄까? 옅은 노란 빛이 안개에 스민다. 안개가 걷히고, 날이 밝아오자 물길을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유채꽃밭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채꽃만 가득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남인근(사진가)
2 백서향 | 제주도 무릉 곶자왈
2009년 3월에 올레길을 걸었다. 무릉에 다다랐을 때 비밀의 숲, 곶자왈을 만났다. 가시덤불과 바위가 뒤섞여 어수선한 숲이라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 겹겹이 쌓인 바위틈으로 겨울에도 따뜻한 바람이 스며 곶자왈은 사시사철 푸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백서향을 보았다. 옛날에 한 스님이 꿈결에 맡은 상서로운 향을 잊지 못해 발견했다는 꽃이다. 숲의 향이 뒤섞여 신비롭고 오묘한 향이 났다. -이해선(여행작가)

1 홍매화 | 경남 양산 통도사
통도사는 한국 3대 사찰 중 하나다. 봄이 되면 사찰 곳곳에 매화가 핀다. 홍매화를 보려고 통도사를 찾았던 날은 비가 촉촉이 내렸다. 붉은 홍매화가 가지에 매달렸다. 수줍게 피어난 꽃망울이 새색시처럼 곱다. 아직 채 피지 않은 꽃망울은 붉은 구슬 같다. 조리개를 열어 떨어지는 비를 담고, 비에 젖은 홍매화를 담았다. 사찰과 홍매화를 한 컷에 담으니 한 폭의 동양화다. 촉촉하게 젖은 공기에서 향기가 났다. 단아한 생김만큼이나 향기도 참 곱다. -남인근(사진가)
2 토종목련 | 전남 진도
진도에 갔다. 봄을 만끽하려고 남쪽으로 가다 생긴 일. 진도대교를 건너자, 멀리까지 들판이 보였다. 섬 같지 않았다. 차를 멈추자 어지러웠다. 아지랑이에 아지랑이가 겹치고 있었다. 실은 목련나무 한 그루 때문에 진도에 갔다. 석교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다는 100년 된 하얀 목련. 그런데 이제껏 알던 목련과 사뭇 달랐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토종목련이라고 했다. 밤에 보면 점, 점, 별 같을까? -장우철( 피처 디렉터)
3 개나리 | 전남 진도
진도는 겨울에도 푸르다. 봄동배추밭이 푸르고, 대파밭이 푸르다. 남도석성까지 가는 길 내내 푸르렀다. 호젓하게 석성 한 바퀴를 돌다가, 개나리를 보았다. 어느 집 대문 옆 아무렇지도 않은 개나리. 가까이 가자 벌 소리가 났다. 진도는 따뜻했다. 들판이, 그 사이의 시냇물이, 물가의 꽃들이, 마침 결혼식이 열리던 교회 풍경이, 그리고 읍내‘ 그냥경양식’의 잊지 못할 돈가스까지 온통. -장우철(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