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추>의 두 주인공 탕웨이와 현빈은 시애틀에서 처음 만났다. 크랭크인하기 전, 탕웨이와 현빈으로 만나 60일을 보냈고, 영화 촬영이 시작된 후 ‘애나’와‘훈’으로 또 60일을 보냈다. 늦은 가을의 운명적인 사랑을 얘기하고, 얘기하고, 또 얘기한 두 사람과 김태용 감독의 기록.

어떤 자리에서도 천연덕스럽게 유머를 구사하는 밝은 여자 탕웨이와 농담 한마디도 진지하게 건네는 남자 현빈은 <만추>에서 실제와는 다소 다른, 아무도 믿지 않는 우울한 여자 ‘애나’와 바람둥이‘ 훈’을 연기한다. 김태용 감독은 탕웨이와 현빈의 어떤 모습에서‘ 애나’와‘ 훈’을 발견했던 것일까.

김태용 감독이 탕웨이를 캐스팅한 이유는 역시 영화 <색, 계> 때문이었다. “<색, 계>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저 배우가 나이가 들면 어떨까’라는 기대가 있었다. ‘애나’는 쓸쓸하고 외로운 여자지만, 실제의 탕웨이는 사교적이고 밝고 긍정적이고 건강하다. 그 언밸런스한 점이 재미있었다. 만약 탕웨이가 유약하고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었다면 ‘애나’라는 캐릭터가 지금과는 좀 달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탕웨이는 에너지가 많은 배우이고, 그 에너지를 애써 억누르고 있을 때의 느낌이 좋았다고.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서‘ 애나’가 7년 만에 사랑했던 남자를 만나 오열하는 연기를 더 실감나게 촬영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애나’가 탕웨이라서 참 좋았다”고 덧붙였다.

현빈에게서는 쓸쓸함을 발견했다. “현빈의 첫인상은‘ 멋지고 잘생겼다’였다. 반항기도 있어 보이고 젊음이 가지는 자신감도 있는데, 이상하게 그 뒤로 쓸쓸하고 슬픈 느낌이 있었다. ‘훈’이 껄렁껄렁하면서도 슬픈 느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훈’이라는 캐릭터에 신경이 쓰였다. ‘애나’같이 마음을 꽁꽁 닫은 여자를 확 무너뜨릴 수 있는 남자는 어떤 매력을 가졌을까, 하고. 오히려 어이없을 정도로 실없고 귀여운 남자가 아닐까 싶었다. 멋 부리고 센 척하지만 기본적으로 약간 여리고‘ 세상아, 덤벼라. 나는 간다’식의 호기로운 느낌은 있으면서 세상을 향해 뛰어가는 도중에도 할머니가 쓰려져 있으면 또 일으켜 세워주는, 본질적으로 정이 많은 인물일 것 같았다. 연민이 많고 속이 깊다는 점에서 현빈은 ‘훈’과 닮았다. 소년이 가지고 있는 불안함과 야심이 남자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가지는 쓸쓸함, 현빈은 그 양가적인 느낌을 다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추>의 ‘애나’와 ‘훈’은 태어났다.

캐스팅이 완료된 후,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 현빈은 시애틀에서 처음 만났다. 무려 크랭크인 두 달 전이었다. 두 스타가 도시의 분위기를 익히고, 상대 배우와 서로 친밀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며 시애틀로 자청해 날아왔던 것.

현빈은 무엇보다 영어 연기에 대한 압박감에 대해 얘기했다. “영어 선생님 두 분과 학교 수업을 받듯이 매일 영어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감독과 대본 작업을 병행했다. 한국에서 한국어 대본을 받았는데, 미국에 가니 영어 대본이 있었다. 스크립터와 감독님,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영어 대본으로 리딩을 했다. 그러면서 그 영어 대본을 다시 한국말로 바꿔보았다. 그리고‘ 훈’이라면 이 상황에 어떤 영어를 사용할까를 생각하면서 다시 영역 작업을 했다. 매일 그 작업을 반복했다. ‘훈’이 쓰는 언어와‘ 훈’이 능력치의 영어 단어를 찾았다. 감독님이 배우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주셨다”고 김태용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탕웨이는 시애틀에 매니저 없이 혼자 왔다. 김태용 감독에 따르면, 탕웨이는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탕웨이는 호기심이 굉장히 많고 <만추>에 대한 생각과 배우로 산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캐릭터를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 자체를 좋아했다. 그녀는 거리낌이 없다. 소녀 같고, 감수성도 풍부하지만 배우가 가져야 할 당당함을 가졌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김태용 감독은 왜 <만추>를 시애틀에서 촬영했을까? “로맨틱하면서도 쓸쓸함이 배어 있는 도시, 언제 비가 올지 모르고 늘 안개가 짙게 깔려 있는 시애틀은 감정을 갖는 게 사치라고 생각하는 ‘애나’를 닮았다”는 것이 김태용 감독의 설명이다. 멜로 영화는 둘이 어디를 같이 가고, 무엇을 같이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만추>에서도 탕웨이와 현빈이 함께 거니는 시장통의 좁은 길, 그리스 레스토랑, 놀이공원의 풍경 등은 그저 작품의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 깊어지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이 과정은 모두 철저한 리허설을 통해 이루어졌다.

현빈은 “감독님과 아직 서먹한 상황에서 함께 라이브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공연을 봤다. 그리고 극장 무대 같은 이런 공간에서 연극 연습을 하듯이 카메라와 미술감독, 스크립터, 감독님, 탕웨이, 그리고 나까지 동선을 그리면서 철저히 리허설을 마쳤다. 그런 작업이 낯설었지만, 신선하고 재밌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빈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시애틀에 대한 감상을 덧붙였다 “시애틀에 다시 가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힘들고 외롭고 쓸쓸했다. 겨울에 가면 ‘왜 자살률이 1위의 도시인지 알겠다’ 싶을 것이다. 매일 보슬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고, 음악은 발달이 돼서 좋은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그런데 요즘은 다시 생각이 난다.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를 달리다 보면 시애틀이랑 비슷한 야경이 펼쳐
지는 부분이 있다. 시애틀에 다녀온 사람은 공감할 것이라고, 매니저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은 다 좋은 추억이 되고 행복한 추억이 됐다”고.

<만추> 개봉을 앞두고 두 배우와 김태용 감독은 다시 만났다. 그 사이 현빈은 <시크릿 가든>으로 스타덤에 올라 <만추>의 흥행보증 수표가 되었고, 탕웨이는 <만추>를 본 영화계의 호평을 얻고 있다. <만추>를 통해 두 배우가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김태용 감독은 영화 흥행과 상관없이 흐뭇할 것이다.

김태용 감독은“ 현빈은 배우 입장에서 가장 힘들지도 모를 섬세한 멜로 연기를 영어로 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텐데‘, 훈’을 흔쾌히 선택해주었다. 촬영 내내 진지한 자세는 더 고마웠다. 욕심이 대단히 많은 배우다. 섹시한 듯 귀엽고, 가벼워 보이지만 속 깊게 배려하는, 스크린에 보이는‘훈’의 매력은 현빈의 공이다”라며, 연출의 공을 배우에게 돌렸다. ‘애나’의 매력을 탕웨이에게 돌렸듯이 말이다.

<만추>의 미술을 맡은 류성희 감독은 “김태용 감독은 서른 페이지 정도의 스크립트를 가지고 기본 방향의 틀만 잡은 후 직접 문젯거리와 고민을 부딪혀가면서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굉장히 치열하게 작업하고 누구보다 본인을 괴롭히며 작업한다”고 평했다. 현빈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만추> 시나리오에는 여백이 많다. 여백을 채워가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막상 채우기까지 굉장히 힘들고 또 즐거웠다. 시애틀에서 촬영하는 동안 많은 감정을 보고 느끼고 배웠다”고.

김태용 감독과 현빈, 그리고 탕웨이는 확실히 세 번의 전작과는 전혀 다른 컬러로 그 여백을 채웠다. 신성일-문정숙, 김지미-이정길, 정동환-김혜자가 보여준 감성과는 다른 사랑을 보여준다. 좀 더 희망적이고 덜 신파적이다. 세련되고 담담하다. 무엇보다 시애틀은 아름답고, 탕웨이와 현빈은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