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 시행을 놓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울시의회가 첨예하게 맞섰던 지난해 연말, EBS에 서 방송된 5분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무상급식 시행을 놓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울시의회가 첨예하게 맞섰던 지난해 연말, EBS에서 방송된 5분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공짜밥’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이다‘. 하필이면 왜 날까? 이런 생각에 밤낮 고민합니다. 선생님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요’라는 자막으로 시작된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레이션 없이 음악과 스냅사진을 배경으로 결식아동들의 고민을 전한 뒤 끝을 맺는다. 이날 방송된 영상은 유튜브와 트위터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무상급식 문제를 한낱 정치 공박으로 치부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한 김중한 PD는 한 언론비평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무상급식과 관련해 정치권 논쟁이 뜨겁지만 정작 중요한 당사자인 아이들의 목소리가 소외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아이들의 고민을 찾아보다 무상급식 논쟁이 불거지기 전부터 이 문제가 아이들에게 심각한 고민거리였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적 논리를 내세우는 대신 아이들의 고민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지식채널e>의 힘이다. 5분짜리 영상과 자막을 통해 지식을 담지만, 지식을 전달하는‘행위’가 아니라 지식을 바라보는‘시각’에 주목한다. 설득을 하기보다 화두를 던지고 생각할 여지를 제공하는 역할에 충실한 대신, 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일은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열린 지식’이라는 화두는 EBS의 대표적인 다큐 프로그램인 <다큐프라임>과도 일맥상통한다.‘교육 다큐 프로그램’을 표방하고 지난 2008년 2월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과학, 역사, 환경, 자연, 사회 등 환경 다큐와 인문 다큐를 넘나들며, 다방면의 지식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특히 세계곳곳의 환경 이슈를 취재한 프로그램은 깊이 있는 취재와 사실적인 영상으로, 매회 방송 때마다 큰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8월 방송된 <인류를 향한 은밀한 역습, 햄버거 케넥션>도 그중 하나다.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되는 햄버거용 쇠고기 생산에 필요한 목초지 조성을 위해 대규모의 열대림이 불타고 있는 중남미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 햄버거, 더 나아가 육식을 하는 것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8개월간의 제작 기간과 약 50억원의 제작비를 투자한 <한반도의 공룡>은 완성도 높은 CG로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 뒤로 <한반도의 인류>, <한반도의 매머드>라는 후속편이 연달아 제작되기도 했다. 환경 다큐에서 보여준 탁월한 기획력은 생활밀착형 인문 다큐 제작에서도 빛을 발한다. 다양한 실험과 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사춘기의 뇌와 수면, 관계에 대한 편견을 깨고 새로운 시각을 던진 <10대 성장보고서>와 노력을 통해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기억력의 비밀>이 대표적이다. <다큐 인생 2막>과 <극한 직업>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더욱 깊게 파고든다. <다큐 인생 2막>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여행과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던 20년 경력의 전직 기자는 헤이리에 게스트 하우스를 열고 낯선 방문객들과 살아온 경험을 나누고, 전직 CEO 출신의 한 남자는 평생을 준비해온 북 카페를 아내와 함께 운영하며 20대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다. 이들의 삶은 20~30대에게는 삶을 어떻게 설계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고, 중년을 앞둔 40~50대에게는 남은 여생을 어떻게 행복하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극한 직업>은 항만 건설, 댐 건설 현장, 난로공장처럼 극한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밀착 촬영해 생동감 넘치는 현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시때때로 터지는 난관을 팀워크와 리더십을 통해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올해는 EBS가 독립적인 교육 전문 공영방송사로 출범한 지 11년째 되는 해다. 그 동안 지상파와 차별화되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구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내며‘교육방송’, ‘수능방송’이라는 꼬리표를 떼고‘지식채널’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어쩌다‘13’번을 틀면 반사적으로 채널을 돌리던 이들의 상당수를 시청자로 확보했다. 나 역시 3년 전 <다큐프라임>을 시작으로 EBS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지켜봤는데, 재미도 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이 많아 열혈시청자 중 한 명이 됐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새 임원진 선임을 앞두고 EBS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 사건이 있었다.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사교육비 감축이라는 목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새 임원진을 꾸리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 지난 10년간 EBS는‘교육’과‘방송’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제법 균형을 잘 잡아왔다. 오락과 흥미 위주의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현실에서, EBS만큼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의미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