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조용히 내뿜는 아웃사이더의 미묘한 분위기와 달리 배우로서 정재영은 모범생이다. 열일곱 번째인지, 서른 번째인지 자신도 헷갈리지만, 그 많은 필모그래피 중에서 한 번도 미끄러진 적이 없는 이 배우는 영하 10도의 공기에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따뜻한 영화라서 내가 고마웠다고.

감색 더블재킷, 흰색팬츠, 차이나 칼라의 스트라이프셔츠, 밤색 슈즈는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Ermenegildo Zegna), 포켓치프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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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을 기다리며 정재영을 생각했다. 곱씹을수록 영리한 배우였다. 희극과 비극, 독립 영화부터 대작 영화까지 모난 데 없이 잘 어울리는 배우는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온갖 영화에서 ‘감초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이 가끔 여기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정재영은 늘 캐스팅 리스트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곤 하는 주연 배우 아닌가. 야구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고, 농구와 당구까지 잘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배우가 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재영이야말로 천재가 아닐까. 꼬리에 꼬리에 무는 생각을 알 턱이 없는 정재영은 겨울바람과 함께 스튜디오에 들어섰고, 자연스럽게 난로 앞에서 불을 쬐며 소탈하게 말했다.

“이 스튜디오 정말 독특한데요. 밑에 막 도끼가 있고, 나무를 때는 오래된 난로도 있고…. 호러 영화 세트장인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뭔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생기긴 생겼다. 최고의 스태프와 일하는 최고의 배우가 자기 손바닥만한 조연 배우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게 될 줄은 그땐 몰랐을 거다. 6개월 된 치와와와 5개월 된 앵무새가 바로 그 주인공. 관록의 배우 정재영은 자연스럽게 견공과 조공을 리드했지만 수많은 ‘컷!’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을 무척 따르는 편인 앵무새와는 유독 연기 호흡이 착착 맞았는데, 특히 정재영과 앵무새의 미세한 표정 연기 연작은 사진을 파노라마로 싣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앵무새가 자신의 컷이 끝났는데도 그의 어깨에서 좀처럼 내려오려고 하지 않아 시간은 좀 걸렸지만.

조연 배우들을 퇴장시킨 후 계속된 촬영은 반대로 유독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포토그래퍼도 에디터도 더 요구할 것이 없었다. 정재영이 통나무 위에서, 혹은 우산을 탕탕 내려치거나 빙빙 돌리며 보여준 일련의 연기는 한 편의 마임 같았고, 베케트의 부조리극 같기도 했다. 배우의 여러 순간을 아무런 방해물 없이 지켜볼 수 있다는 건 막상 눈앞에 펼쳐지면 꽤 감동적이다. 정재영의 모든 표정에는 인생이 있었다. 들여다보면 표정을 크게 바꾸는 것도 아니었다. 방금 웃고 난 표정, 웃을까 말까 한 표정, 다음에 웃을 거라는 표정과 웃어서 머쓱한 웃음까지 촬영하는 동안 수백 가지 표정을 봤다. 카메라 앞에 서면 천생 배우였다.

“예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요, 내 얼굴이 애매하다는 거였어요. 잘생긴 것도 아니고 못생긴 것도 아니고 웃기게 생긴 것도 아니라고 했죠. 왜 내 얼굴은 임팩트가 없을까. 그땐 그게 고민이었죠. 그러다 그냥, 무개성이 개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개성이 없어 괴로웠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정말 근사한 배우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잘생겼다. 작년 한 해는 배우 정재영에게 특별한 해였다. 원작 만화의 인기와 30대로서 70대를 연기한다는 부담은 그에게 난생처음으로 안티팬까지 안겨줬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작품 <이끼>가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영화의 성적도 좋았으니 표현은 하지 않아도 가슴이 벅찼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또다시 강우석 감독과 함께 촬영한 영화가 1월 20일 개봉하는 신작 <글러브>다. 청각장애인들로 구성된 충주성심학교 고교야구부의 실화를 소재로 한 <글러브>는 오랜만에 다가온 따뜻한 영화. 그는 한때 잘나갔지만 지금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충주성심학교로 귀양을 내려오게 되고,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의 감독이 되는 퇴물 투수 김상남 역을 맡았다.

“<이끼>로 타락한 마음을 <글러브>로 정화한 셈이죠.” 정재영은 농담조로 말했지만, 악하디 악한 인물이었던 <이끼>의 이장과 이번 역할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는 대목. 하지만 헬렌 켈러를 기른 설리번 선생처럼 따뜻하기만 한 인물이라면 오산이다. 고집 세고, 오만하며, 꼬인 인물이기도 한 것. 하지만 <코치 카터>보다는 <그들만의 리그>와 더 가까울 이 김상남 감독은 아이들과 함께하며 야구라는 인생과, 인생이라는 야구를 함께 알게 된다. 자세한 설명은 스포일러가 되니 자제하겠지만, 선수들이 귀가 들리거나 말거나 마구 말을 하던 그가 스케치북에 ‘야구하자’라고 써서 내보이는 장면은 <러브 액추얼리>의 스케치북 고백만큼이나 찡하고, 밟히면 밟힌 만큼 또 일어나면 된다. 우리를 불쌍하게 봐주는 상대가 가장 무서운 상대다. 싸울 의욕조차 없애기 때문이다”란 대사가 빛나는 장면은 정초부터 눈물을 뚝뚝 흘리게 한다.

검은색 슈트는 타임 옴므(Time Homme). 흰색 셔츠는 닐 바렛(Neil Barret), 검은색 슈즈는 캠퍼(Camper). 붉은색 코르사쥬와 양말, 보타이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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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아는 여자>에 이은 두 번째 야구 영화인 셈인데, 이번에는 본격 야구 연기가 필요했다. <김씨 표류기>에서 손톱, 발톱, 수염, 머리카락을 사정 없이 기르고, 흙 바닥을 맨발로 밟고 다녔을 정도로 리얼리티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정재영이기에, 야구 연기 준비도 철저했으리란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는 여자>가 야구 선수가 겪는 멜로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딱 봐도 ‘프로 야구 선수구나’라는 걸 알 수 있도록 3개월 동안 훈련을 했죠. 공을 하나 던질 때도, 아이들에게 펑거볼이라는 노크볼을 쳐줄 때도 정확한 동작을 하도록 신경을 많이 썼죠. 하지만 야구 선수가 되는 과정에서의 고생은 어린 친구들이 다 했어요. 전 감독으로서 폼 잡는 거에 신경 썼죠. 하하.”

그 과정에서 야구가 정말 어려운 스포츠라는 걸 알았다.

“타석에 들어서면 헛스윙 3번에 20초 만에 내려가요. 재미없죠. 영화에선 이런 모습을 안 보이려고 연습했어요.”

“오랜만에 한 따뜻한 영화예요. 어제 기술 실사를 봤는데 정말 가슴이 따뜻하더군요. 출연하기 잘했다 싶었어요. <이끼>로 개인적으로 상도 받았고, 센 캐릭터를 하면서 배우로서 더 성장도 했지만 따뜻하거나 만인의 공감을 받긴 힘든 영화였죠. <글러브>는 누구나 좋아할 거예요.”

모든 영화 배우는 촬영장의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재영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촬영장 분위기는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

“영화 현장은 일할 때 열심히 하고, 놀 땐 열심히 노는 분위기가 많아요. 촬영장 분위기, 중요하죠. 서로 촬영하다 보면 짜증날 때도 있고 추울 때도 있고 더울 때도 있잖아요. 촬영장 분위기가 좋으면 덜 피곤하고, 덜 춥고, 덜 더워요. 하지만 분위기가 안 좋으면? 서로 흉보고, 영화의 단점을 찾아내게 되죠. 그래서 영화 촬영장은 무조건 분위기가 좋아야 해요. 좋은 분위기 속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작업을 해야, 설령 그 영화가 생각보다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아도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되죠.”

따뜻한 영화이기에 영화 촬영장 분위기도 남달랐다고. 스포츠 영화라는 특성상, 훈련과 합숙이 길었고 고교 야구 선수를 연기하는 어린 배우들로 매일 북적였다.

“일 년에 한 작품, 또는 한 작품 반을 하는데 이 작업이 가족을 제외하고 제가 느끼는 유일한 행복이에요. 달리 취미가 있거나 몰두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현장이 즐거워야 돌이켜봤을 때 하루하루와 1년 1년이 보람차요. <글러브> 현장은, 정말 최고였어요. 함께 연기한 친구들도 다 잘될 것 같아요. 난 그 나이 때 아무것도 몰랐죠. 하지만 그 친구들은 벌써 사회에 나와서 큰 영화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잖아요? 아주 열정적인 친구들이에요.”

“강우석 감독님은 촬영할 땐 열심히 촬영하고, 끝나면 열심히 술 마시고, 다시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이에요. 주 종목은 소주 더하기 막걸리, ‘소막, 아니면 ‘소맥’이죠.”

요즘 정재영이 가장 자주 마주하는 질문은 ‘강우석사단’에 관한 것이다. 제작 보고회에서 강우석 감독은 말했다.

“정재영이라는 배우와의 연속된 작업에 대해서 요즘 많이 물어봐요. 저는 사람하고 친해지면 헤어지는 걸 싫어합니다. 설경구도 5년 동안 연달아 4편을 찍었죠. 요즘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 아예 정재영을 염두에 두고 읽어요. 어떤 연기자가 되었든 나랑 영화를 하면 어떤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싶어요.”

정재영은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편안하게 답했다.

“몇 년 전에는 ‘장진 사단’이라는 이야길 항상 들었죠.”

그도 알고, 나도 알듯이 그런 규정은 영화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정재영은 ‘사단’이라는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정재영은 그 감독이 아니면 연기를 못해’라는 의미라면 스스로 더 분발을 해야 하고, ‘정재영은 그 감독하고 하면 더 빛을 내’라는 의미라면 좋은 이야기일 거라고 그 두 의미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 말했다.

“장진 감독과 강우석 감독과는 세 편, 네편 계속 작업을 하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에요. 가장 속상한 건, 한 번 작업했는데 나와 두 번 다시 안 하는 거죠.”

그에게 물었다. 그럼 쟁쟁한 감독들이 왜 정재영을 찾느냐고.

“감독은 냉정해요. 한편으로 주역부터 단역까지 모든 걸 결과를 생각하면서 결정해야 하죠. 같은 사람을 계속 찾는다는 걸 팀워크가 잘 맞았거나, 배우가 감독의 의도를 잘 파악했거나, 잘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다는 걸 거예요. 아니면 혹시 내가 싸서? 가격 대비 좋아서? 하하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흥행 감독인 강우석 사단이 된 것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는 건 아니다. 일부 영화인은 배우가 가진 것을 끝까지 끌어내고 마는 강우석 감독의 방식이 배우에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자칫하면 배우의 수명을 단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재영의 대답은 묵직했다.

“배우는 늘 자신을 소모하고 소진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 그건 배우의 숙명이에요. 다 소진되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는 존재예요. 그 다음 수순은 정해져 있죠. 관객이 먼저 배우에게 질리게 됩니다. 그걸 깨는 과정이 배우가 생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소진되는 만큼 채우거나, 아니면 끝없이 새로운 것을 꺼내야겠죠. 매번 새영화를 들어갈 때마다 내가 다짐하는 건 이거예요. 1mm라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붉은색 터틀넥 니트는 CP. 컴퍼니(CP. Company). 뿔테 안경은 ALO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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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부터 연극 무대와 단역 시절을 거쳐, 가장 치열한 시즌에 개봉하는 영화의 주연이 된 지금까지 늘 한 길만 걸어온 배우. 공식적인 필모그래피는 17편이지만 단편 영화부터 독립 영화까지 세어보면 30편이 넘는다.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보면 배우 정재영이 어떠한 방식으로 스크린을 장악했는지 보인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내놓은 적이없다. <피도 눈물도 없이>나 <이끼>처럼 과장되고 변칙적인 인물도, <김씨 표류기>처럼 희극적인 인물도, <아는 여자>, <글러브>처럼 일상적인 역할도 있었다. 이 모든 역할에서 그는 배우 정재영을 지워내고 캐릭터만 남겨놓는다. 그렇게 신출귀몰하기에 그의 연기는 질릴 틈이 없고, 다작을 해도 과작을 한다는 느낌이 없다.

“그게 배우의 일차 목표죠. 영화는 영화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죠. 이렇게 화보나 인터뷰를 할 때만 나를 보여주는 게 가능해요. 영화에선 내 이야기를 하면 안 되요. 영화의 특색에 녹아드는 게 첫 번째고, 배우의 매력을 보여주는 건 그 다음이죠.”

영화와 배우에 대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논한다면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그 다음에 배우가 평가를 받을 수 있으며,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배우만 좋은 평가를 받는 건 반쪽짜리라고. 공교롭게도 1월 20일은 <글러브>의 개봉과 차기작 <카운트다운>의 크랭크업이 동시에 이뤄진다. 일복 많은 배우는 다시 1mm만큼 변신을 바라며 새로운 영화에 뛰어든다. 전도연의 복귀작으로도 화제를 모으는 작품의 감독은 신인. 시나리오가 좋았고, 감독의 생각이나 느낌이 좋아서 선택했다.

“싫은 건 티가 확 나요, 저는. 과거엔 까칠하고 모났다는 말도 많이 들었었어요. 하지만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건 분명해요. 아니, 현실적이라는 말이 더 맞겠군요.”

정재영이 몸을 일으켰다. 강우성 감독과 영화인들과의 다음 약속이 없었다면 타닥타닥 타는 난로에 나무 조각을 던져 넣으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시계도 보지 않은 채, 이따금 생각난 듯 담뱃불을 붙이며 인터뷰를 든든하게 발판으로 삼은 나의 끝없는 질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답을 또박또박 해주었을 것이다. 전 세기의 문인은 통찰력 있는 구절을 남겼다.

“세상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며,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This World is a Comedy to Those That Think, a Tragedy to Those That Feel).”

배우는 많은 감정을 뇌와 심장에 모두 눌러 담는다. 정재영의 세계에는 희극도 비극도 일상도 다 있다. 비극은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린 듯 너무나 강렬하고, 희극은 문득문득 떠올리면 배가 간지러울 정도로 웃기고, 일상은 아는 오빠처럼 친근하다. 이렇게 여러 세상을 살 수 있다니, 배우 정재영의 인생은, 야구로 치면 3할 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