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원을 따져보자면 잡지의 피처(Feature)는 ‘특집 기사’를 일컫는다. 패션과 뷰티, 피처 파트로 구성되는 잡지에서 피처 에디터는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담당한다. 그래서 피처 에디터의 삶은 훨씬 버라이어티하다. 그 다채로운 삶이 궁금해서 7명의 피처 디렉터에게 지난 한 달의 생활을 물었다.




김지수 | <Vogue> 피처디렉터


피처디렉터는 문화가 곧 리얼한 생활이다. 온몸의 세포가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인 자극이 손끝으로 다양하게 변주돼서 나오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요즘은 임신 중이라 자극을 선별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김복남살인 사건> <이끼> 같은 피범벅 영화들은 태교상 하나도 보지 못했다. 문득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C.S. 루이스의 일화가 생각난다. 그가 끔찍한 악마의 형상과 캐릭터를 텍스트로 풀어놨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보지도 않은 악마를 그토록 잘 그려내느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내 안에서 더 끔찍한 악마를 보았습니다” 아! 태교를 위해, 모든 인간의 마음 밖에 내재한 ‘악마성’을 잠재우기 위해, 좀 더 ‘아름다운 것’을 보도록 하자.

재단법인 아름지기에서 하는 궁궐 유니폼 전시회를 보았다. 가회동의 윤보선 고택 앞에 자리 잡은 한옥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한옥 처마에 걸린 디자이너 진태옥의 화이트 셔츠가 다정하게 인사했다. 마크 로스코와 몬드리안의 색면 배합이 색동 스트라이프로 살아나다니, 감격! 젊은 디자이너 10인이 창덕궁이나 경복궁을 거닐며 디자인한 옷들은 <신의 아그네스>에서 입는 흰 수도복 같기도 하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입은 ‘하녀복’ 같기도 하다. 전통과 현대, 고궁과 유니폼의 만남이 의미 있는 패션 해프닝을 만들어냈다. 사진작가 안웅철과 게이로 커밍아웃한 홍보전문가 황의건의 출판 기념회에도 가볍게 도장을 찍었다. 안웅철의 <스틸 라이프>는 내가 ‘그의 사진이 갖고 있는 음악성과 담백한 글솜씨’를 칭찬하는 추천사도 썼기 때문에, 마침 같이 추천사를 써준 사진 아티스트 김아타와 동행했고, 황의건의 <비트윈>은 지난달 ‘게이에게 배우는 애티튜드’ 기사에 그의 생동감 있는 조언을 활용했기 때문에, 또 당연히 가야 했다. 둘 다 패션 피플 중에서는 드물게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소 친분 있던 발레리나 김주원과 발레리노 김현웅의 초대로 국립발레단의 창작 발레 <왕자 호동>을 보러 갔다. 지난번 <라이몬다>를 러시아 캐스트로 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두 사람의 캐스트로 보고 싶었다. <라이몬다>를 볼 때는 발레가 무척 외설적인 춤이라고 생각했는데, <왕자 호동>은 의상이 갑갑해서인지, 몰입이 어려웠다. 김주원의 서정적인 상체 라인도 김현웅의 박력 있는 하체 라인도 보기 힘들었고, 전체적으로 유니버설 발레단의 <춘향> 정도로 안무를 버전업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듯싶다. 발레 공연이 끝나자마자 그랜드 하얏트 JJ에서 열린 할로윈 파티에 가서 토끼 모자를 쓰고 놀았다. 배속의 아기가 심하게 발길질을 해서 1시간 만에 집으로 왔지만, ‘아가야! 네가 토끼 띠라서 래빗 콘셉트의 파티에 간 거야~~!’

일요일 저녁엔 이병우의 기타 콘서트에 가서 그의 기타 연주와 영화 음악을 들었다. 1년에 한 번 하는 공연이라 세종문화회관이 가득 찼다. 티켓 창구에서 여배우 이하나를 만났는데, 지난번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내한 때 얼랜드를 만나서 친구가 됐다고 귀엽게 자랑한다. 영화 <여배우들>에서 함께했던 이재용 감독도 오랜만에 만나, 그의 신작 부르주아 불륜 치정극에 남편(사운드 아티스트 Zuui)의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의했다. 이병우는 기타 연주나 ‘어떤 날’ 시절의 음악도 좋지만, <스캔들> <괴물> <마더> <왕의 남자>로 이어지는 영화 음악이 훨씬 아름답다.

TO DO LIST 11월 26일 아름지기 아카데미에서 하는 일본 디자이너 하라켄야의 강연회에 갈 생각이다. 무인양품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로 알려진 하라켄야는 또 얼마나 놀라운 역발상으로 내 굳은 머리를 깨트려줄 것인가. ‘시 읽어주는 여자’라는 콘셉트로 책 한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집을 많이 읽어야겠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과 이문재가 엮은 <꽃이 져도 너도 잊은 적 없다>.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가 5년 만에 그루브와 일로트로닉 무드를 담은 신보 ‘록더스트 라이트 스타’를 발표했다고 하니, 그의 펑키 디스코도 들어봐야겠고, 내년 1월에 내한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초기 전자 음악도 다시 들어보고 싶다.



황선우 | <W> 피처디렉터


월간지 기자의 한 달은 15일에 시작해서 다음 달 5일에 끝난다. 6일부터 14일까지는 마감이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성균관 스캔들>에서 이선준이 “김윤식은 동방생이다”라고 세뇌하듯 “나는 원고 쓰는 기계다”라고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지난 10월 6일에는 잠시 기계의 반란이 일어났다. 석 달 전에 미리 예매해둔 키스 자렛 트리오의 내한공연 날이었다. 편집장의 얼굴은 당장 내일 보지만, 게리 피콕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르니까(이분은 1935년생이시다)! 사무실 의자 대신 냅다 세종문화회관 S석에 가 앉았다. 키스 자렛의 들썩이는 건반은 막힘 없이 흐르다가 절정에서 파도 치듯 신음소리를 토했다. 잭 디조넷의 드럼은 바위같았다. 셋이란 여러모로 안정적인 조합의 수지만 함께 음악을 할 때 특히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세상 모든 삼인조가 키스 자렛 트리오 같지는 않아서 종종 모자라거나 가끔 넘치기도 하지만. 공연장 집중도에 대해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자렛은, 앙코르 첫 번째 곡에선가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은 관객에게 저주의 멘트를 선물했다. 사진 찍은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찍기 전에는 두근대서, 찍은 다음엔 저주받아 불편해서 음악이 귀에나 들어왔겠나. 아름다운 찰나는 그런 식으로 붙드는 게 아니다. 그냥 노래 하나 더 집중해서 듣고 가슴에 새길 일이지 말이다. ‘I Fall in Love Too Easily’를 들으며 눈물을 글썽댄 대가로 그 달 마감엔 눈물깨나 빼야 했다.

자유의 몸이 되자 곧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었다. 16일 토요일 티켓은 매진되었다고 했는데, 뜻이 있는 곳에 표가 있었다. 9만 명이 왔다더니 휴대폰이 먹통이었다. 소중한 시간엔 잠시 꺼두셔도 좋으니 음악이나 들었다. 드러머 제프 테인 와츠가 브랜포드 마샬리스와 함께한 ‘와츠 프로젝트’가 좋았다. 7회째인 축제를 네 번인가 다섯 번 보러 갔다. 그사이 시골 장터 같던 분위기는 많이 세련돼졌고 색소폰을 든 어설픈 캐릭터 인형 같은 건 사라졌지만 페스티벌의 라인업은 여전히 짱짱하다. 좀 더 쉽게 가도 될 텐데 반 발 정도 앞서나가는 뚝심 같은 게 9만 명을 끌어들인 건가 생각했다. 그 다음 주에는 GMF에 갔다. 재결합한 원더버드와 이승열, 아코디언 연주가 심성락과 이소라의 음악을 들었다. 아름다운 찰나는 붙잡을 틈 없이 흩어졌다. 6일부터 14일까지의 나는 돈을 번다. 15일부터 5일 사이의 나는 돈을 쓴다. 먹어 없어질 음식, 들어 없어질 음악, 결국 사라질 것들, 사라져서 내가 될 것들에 지갑을 연다. 그보다 더 가치 있게 돈을 쓰는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하겠다.

TO DO LIST 음악이 당근이면 책은 채찍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이대로여도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고, 새 책을 잔뜩 사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달의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교양 노트>와 <팬티 인문학>. 앤 페디먼의 새 책 <리아의 나라>와스티븐 킹의 <죽음의 무도>도 카트에 담았다.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박민규 소설집 <더블>과 김훈의 새 장편 <내 젊은 날의 숲>도 읽어야 한다. 11월 20일에는 플레이밍 립스, 29일에는 욘시의 내한공연을 예매해뒀다.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에 못 간 게 아쉬워서라도 서울 아트 시네마의 다음 기획전에는 꼭 갈 작정이다. <우리시대의 아시아영화 특별전>이라는 제목으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최양일의 <피와 뼈> 같은 작품이 상영된다.



장우철 | <GQ> 피처디렉터


문막에 있는 8백 년 된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그 풍만한 몸매를 널찍하게 찍고, ‘Old & Wide’라 제목 붙일 생각하니 저 혼자 미지근하게 좋았더랬다. 은행나무 앞 배추밭에 재를 뿌리던 농부가 “올핸 물도 안 들고 다 떨어졌어요”라고 대답하기 전까지만. 11월 6일, 문막 반계리 은행나무는 입을 다 떨군 채였다. 바닥엔 테두리만 겨우 노란 연두색 잎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음악을 껐다. 좀 걸었다. 다시 오마는 약속은 대수롭지 않았다. 10월 말엔 간송미술관 가을 전시에 기껏 가서 뒤뜰의 파초만 만지다 온 셈이 되었다. 간송미술관은 공간이며 전시 방식이며 그곳의 모두를 옛날 사람으로 돌려놓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너무 많아 어디 좀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이고 싶어서, 연신 미술관을 주위를 돌며 ‘그놈 참 잘생겼다’ 싶은 파초를 보다 만지다 했다. 전시된 그림 중엔 오이를 업고 가는 고슴도치가 기억에 남았다. 먹으로 그린 여럿 중에 고슴도치와 오이는 그 자체로 호젓했다.

얼마 전 파리에 출장 갔을 때, 패럴 윌리엄스가 표지로 나온 잡지 을 사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거기서 본 어떤 화보가 떠올라서인데, 한 남자가 아름드리 나무 밑동을 장갑 낀 손으로 안고 있는 장면이다. 잡지 자체는 심심하니 밍밍한 쪽이지만, 딴 건 관두고 하필 그게 생각나니, 취향이란 언제나 의심해 마땅한 일이 아닌가 한다. 그루퍼(Grouper)의 내한공연은 결국 가지 못했다. 아쉽진 않다. 소위 모던록이라 불리는 것들의 갈래 중에 ‘노이즈’에 대해서만큼은 아직도 영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결국 공연 가는 길을 막아선 것이겠다. 알아듣고 집중하는 척하는 게 그나마 나은 방법이긴 한데, 그럴 생각하니 가기도 전에 졸렸다. 공연 다음 날부터 “그루퍼 끝내줬어요”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기획사인 텍스처프레자일이 다음엔 누굴 데려올는지 좀 궁금하다.

토요일에 가회동 이도갤러리로 그릇 사러 갔다가 평소보다 열 배는 많아진 인파에 놀랐다. 국그릇 두 개를 포장하던 직원은 <1박 2일>에 북촌이 나오고 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심사가 복잡해진다. 싫은가 하면 그럴 수도 있지 싶고, 좋은 게 좋은 거다 싶다가도 ‘우르르’ 몰려다니는 풍경에 속한 것이 영 마뜩찮다. 와룡동 우일요에도 갔다. 세 개 샀다가 두 개 깨뜨린 포도 접시를 다시 샀다. 저녁 때 거기에 호박나물을 담아 먹었다.

TO DO LIST 서강대교를 넘으면서 보니, 아직 밤섬의 버드나무는 무성하다. 사계절 밤섬을 촬영하는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유람선을 타고서, 흐르듯 곁을 스치며 사진을 찍겠다는 계획이 일년째 표류 중이다. 11월에 칼로 긋는 바람을 맞으며 뚝섬에서 배를 타고 절두산까지 가고 싶다. 월말엔 플래밍 립스의 내한공연에 간다. 챙겨 먹는 한약이 그날 효과를 발휘하길 기대하고 있다. 어어부 프로젝트의 새 음반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이우성 | 피처디렉터


요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문장은 ‘사람과 시간의 저쪽 6천 피트’와 ‘텍스트는 다차원 공간으로, 그곳에서는 다양한 글이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 부닥치지만 그 어느 글도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다’이다. 앞은 니체, 뒤는 롤랑 바르트의 것이다. 며칠 전, 책꽂이에서 문학잡지(<현대시학>2003년 8월호)를 한 권 집어 들었는데 게재된 산문에 둘의 문장이 인용돼 있었다. 처음엔 누가 썼는지 모르고 읽었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시인 허만하의 글이었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외국 작가가 쓴 글 같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는데, 그런 느낌이 있다.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인용은 말 그대로 인용이어야 한다. 어떤 작가들은 인용에 기댄다. 그건 인용이 아니다. 허만하는, 허만하 선생님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이 노작가의 생각은 글속에서 주체적이었다. 노작가는 ‘텍스트는 독자를 잡고 낯선 상태를 교신한다’고 적었다. 다른 글도 읽고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산문집이 있었다. <길과 풍경과 시>, <길 위에서 쓴 편지>다. 니체와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 내내 남아 있는 건 미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내 고민 때문이다. 흔히 미는 감동에 기댄다. 아름다운 것은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감동은 대중적인 언어다. 지극히 예술적인 것의(범박하게 말해 지극히 작가주의적인 것)대부분은 대중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다. 시인 원재훈은 <나는 오직 글 쓰고 책 읽는 동안만 행복했다>는 본인의 책에 적었다. ‘문학에 대한 논쟁은 부질없다. 읽고 나서 감동을 받았느냐. 세상이 좀 새롭게 보이느냐.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기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맞다, 맞는 말이고, 맞는 말 같다. 이 말이 그르다면 대체 문학이, 예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 그럼 보들레르는? 고흐는? 모딜리아니는? 그들은 죽은 후에 추앙에 가까운 인정을 받았다. 동시대사람들을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은 미적인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시대를 막론하고 화두는 소통일 텐데 작가가 소통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게 과연 옳을까? 소통과 예술적인 것 혹은 미적인 것 사이를 명징하게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까? 글을 쓰면서 그리고 매달 기사를 기획하면서 나는 고민하고 있다.

아까, 낮에 소격동에 갔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인도 작가 전시가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바빠서 못 가고 있던 차였다. 갤러리 홍보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했었다. “인도 작가는 생소하잖아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보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듀오 작가였고 이름은 지텐 투그랄과 수미르 타그라다. 전시명은 <중산층의 꿈>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작품을 볼 수 있다. 색이 독특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집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잘 팔릴 것 같았다. 돈 있는 아주머니들이 요즘, 밝고 위트 있는 회화를 좋아한다고 한다. 팝아트의 영향인 것 같은데 아주머니들 수준도 확실히 높아졌다.

양혜규의 전시가 아직 열리고 있으면 한번 더 보려고 아트선재센터에 갔는데 끝나 버렸다. 양혜규는 워낙 유명해졌고 많은 전문가가 그녀를 인정한다. 그런 평가와 상관없이 나는, 나도, 양혜규가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 고민은 위에서도 말했듯 ‘미적인 것이 무엇일까’이다. 어찌됐건 소통을 빼고 미술을 이야기할 순 없다. 양혜규와 관련한 글을 찾아보면 그녀 역시 소통을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양혜규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려졌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관심이 엄청나다. 전시 오프닝 날 아트선재 앞은 인산인해였다. 그들은 양혜규와 양혜규의 작품과 소통이 되는 걸까? 내가 양혜규를 좋아하는 건 도대체 ‘모르겠어’서다. 양혜규의 작품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김소라의 작품도 좋다.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12월 5일까지 김소라의 전시가 열린다.

TO DO LIST 조만간, 용감하고 거침없는 젊은 소설가 김사과의 새 책이 나온다고 한다. 표지 디자인을 모임 별에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이태원에 자주 간다. 최정화가 하는 꿀, 홍성민이 디렉터로 있는 공간 해밀턴(www.podopodo.net이 관련 웹사이트인데 볼게 많다) 그리고 테이크아웃 드로잉이라는 카페, 꽃당이라는 바에 관심을 갖고 있다. 미술가들과 관련 있는 곳이어서 가면 느끼는 게 많다. 아, 꼼데가르송 Six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단편영화를 상영한다. 최근에 작업한 회화 7점도 전시한다. 내년 1월 2일까지다. 축구만화 <에어리어의 기사>를 볼 예정이다. 후배가 그 만화 보고 나서 축구 실력이 늘었다.





정윤주 | <Vogue Girl> 피처디렉터


모든 시작은 할머니 댁 다락방이었다. 2층 적산가옥 꼭대기에 있는 작은 다락방에서 책을 보는 게 가장 즐거웠던 유년의 기억은 ‘오래된 건물에 대한 애정 혹은 애착’을 유산처럼 내게 남겼다. 시간이 흘러 흥미가 취향이 되어버린 요즘, 그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하루를 통째로 내놓을 수 있을 때에는 적산가옥이나 오래된 건물이 많은 도시에 다녀온다. 군산이나 목포, 광주, 대구가 그렇다. 가끔은 새벽부터 서둘러서 당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저 한가하게 산책이나 하고 싶을 때에는 서울의 궁에 간다. 대개는 창경궁이고 때때로 운현궁이다. 궁 자체의 풍경도 좋지만 그 안에 좋아하는 건물이 하나씩 숨어 있기 때문이다. 창경궁 안에는 일제강점기에 건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대온실’이 있다. 하얀 철제 온실 안에 열대 식물이 늘어져 있는 걸 보는 건 사계절 중 겨울이 가장 매력적이다. 거기다 눈이라도 쌓이면 아름다움은 배가된다. 운현궁 안에는 1910년에 지어졌고 대원군의 손자인 영선군이 거주했던 ‘양관’이 있다.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 지은 르네상스식 2층 건물인데, 문이 열려 있을 때 살짝 내부에 들어가보면 반질반질한 옛날식 마루와 나무 계단에 더욱 마음을 뺏기고 만다. 지난번에 갔을 때에는 가방 안에 있던 필름 카메라를 꺼내 몰래 셔터를 눌렀다. 산책을 하다 배가 고파질 때쯤에는 시청에 있는 ‘라 칸티나’에 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인 이곳은 머리를 포마드로 매만진 아저씨 웨이터들이 극진한 태도로 파스타를 서빙한다. 강남의 레스토랑처럼 세련된 맛은 아니지만, 재료를 아끼지 않고 양도 많은 이곳의 봉골레는 이따금 문득 생각난다.

대학로의 ‘학림 다방’도 자주 가는 곳이다. 1956년에 옛 서울대 문리대 앞에 문을 열었고 김지하와 김승옥, 전혜린이 드나들었다 해서 한국의 ‘카페 드 플로르’로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학림 다방에서는 꼭 로얄 블렌드를 마셔야 한다. 로얄 블렌드는 한국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없던 시절, 초기 유학파 학생들이 에스프레소를 찾았을 때 오랜 고민 끝에 7인분의 커피를 1인분의 물로 내려 만들었다는, 학림 다방만의 메뉴다.

오래된 카페를 찾는 촉수는 해외에서도 발동해 파리를 갈 때면 반드시 ‘카페드 플로르’에 가고 지난여름, 피렌체에 갔을 때에도 오래된 문학 카페인 ‘카페질리’를 찾아갔었다. 그 역사에 감격하며 기념으로 커피잔도 하나씩 사왔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들 역시 ‘공간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사진가들인데, 미국 사진가 워커 에반스와 프랑스 사진가 베르나르 포콩은 특히 아낀다. 몇 년 전에는 베르나르 포콩의 작품 중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어 과도한 자금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갑을 열었다. 내 방 안의 고즈넉한 포콩을 볼 때마다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한남동의 ‘포스트 포에틱스’에서 빈 테니스 코트만 촬영하는 스위스 사진가, 지아스코 베르톨리의 사진집을 샀다. 그의 사진을 보며 텅 빈 공간과 가득 찬 공간이 가지는, 다른 매력에 대해 생각한다.

TO DO LIST 11월 17일부터 12월 12일까지, 통의동의 갤러리 팩토리에서 젊은 사진가 에릭 페이야드의 전시가 열린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입양된 1980년생 작가로, 거리의 단면을 하나의 그래픽 또는 건축물처럼 촬영하는 사람이다. 11월 17일까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제2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도 놓치면 안 된다. 건축을 소재로 한 보석 같은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특히 보고 싶은 작품은 <비주얼 어쿠스틱스>와 <쿨하스 하우스라이프>. 그중 <쿨하스 하우스라이프>는 학창 시절, 건축가 렘 쿨하스를 아이돌 그룹 보듯 했던 한 사람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박소영 | <Elle> 피처디렉터


늘 기웃거리게 된다. 새로운 것, 뜨끈뜨끈한 것, 확 뒤집어질 만한 뭔가 없을까. 갓 오픈한 레스토랑에서 일부러 점심 약속을 잡고 취향이 아닌 전시회에 굳이 찾아가 전시 장 입구의 노란 단풍에 오히려 위안을 얻는 뻘 짓을 하는 건 분명 에디터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느라 몸에 익은 습관들. 하지만 비슷한 주기로 오래된 영화를 돌려보곤 한다. 주로 어딘가 방전됐다고 본능적으로 느낄 때다. 지난 주말, 감기몸살로 물먹은 스펀지 같던 몸을 얇게 모로 세워 눕고는 온종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를 1편부터 3편까지 뜬금없이 돌려본 것도 어쩌면 그런 방어기제가 작용했을 거다. 그리고 그 한 장면, 영겁을 반복해온 꿈처럼 너무 익숙해서 사실은 어떻게 느껴야 할지조차 너무 빤한 그 한 장면을 기다렸다. 마침내 가슴에 붉은 피를 머금은 소피아 코폴라가 정지 화면처럼 쓰러지고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이 흘러나오던 그 순간. 자신을 대신해 총에 맞아 쓰러진 하나뿐인 딸을 안아 든 알파치노의 소리 없는 오열이 폭발하던 그 한순간, 마치 처음이라는 듯 나는 또 한번 감동했고 긴 여운을 즐기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힘을 뺀 <부당거래>도 소문만큼 괜찮았고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도 끝내줬지만 20년 전 영화 속 이 한 순간만큼 나를 위로하진 못한다는 걸. 뭐든 다 괜찮다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론이나 걱정을 빙자한 참견 대신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칼날 위에 서 있는 알파치노의 바로 그 표정이 필요했다는 걸. 누구나 이토록 무방비하게 삶의 바닥과 마주할 수 밖에 없음을, 그건 노력이라거나 의지의 문제가 아님을, 버티고 버텨도 가끔은 넘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만드는 그의 표정과 함께 나를 둘러싼 나의 사람들이 오버랩됐다. 5년쯤 전이었을까,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던 돌체 앤 가바나의 20주년 쇼를 마주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마침 집에 코폴라 와인이라도 있으면 딱이었을 텐데 늘 필요한 건 그 순간엔 닿질 않아서 입안이 텁텁해졌다. 나의 바깥을 둘러싼 절반쯤이 현란한 트렌드라거나 자아 과잉의 사람들이라면 나의 안을 채우는 나머지 절반쯤은 대부분 트렌드와 무관한 오래된 영화와 오래된 음악과 추리소설과 적막과 작은 오솔길들이다. 특히 텍스트 중독은 세상의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쉽게 끊을 수 있는 병은 아니어서 이달에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루시아, 거짓말의 기억>에 홀딱 반해 한 권 더 집어 든 로사 몬테로의 <데지레 클럽, 9월 여름>. 손이 시릴 만큼 매섭게 추운 날 여전히 새파랗기만 한 겨울하늘 같기도 했고 끈적끈적한 여름날의 오후 같기도 했다. 취향 따라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온다 리쿠는 어느덧 책장 가장 좋은 자리에 두 칸을 차지할 만큼 좋아하는 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가득한 신작 <여름의 마지막 장미>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오른손>은 솔직히 명성만큼의 감흥은 못 느꼈다. 사실 전부터 합류하려 벼르던 추리소설모임에서 선정한 이달의 책이었으나, 결국 갑작스러운 촬영 스케줄로 어긋나버렸다. 요즘 읽고 있는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이 다음 모임의 책인데 과연 이번엔 재야의 추리소설마니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빼먹을 뻔했다. 드라마의 소박한 감성에 반해 뒤늦게 원작 만화를 구해 봤는데 넘어가는 책장이 아쉬워 미적미적 넘기는 걸로는 성에 차질 않아 결국 새벽 한 시 반, ‘버터 라이스’와 라면을 먹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니. 책에서 배운 대로 김이 솔솔 나는 따끈한 밥에 버터를 한 스푼 얹은 후 잠시밥에 녹아들길 기다렸다가 조금, 아주 조금씩 간장을 떨어뜨렸다. 마침내 한술 떴을 때의 그맛이란.

TO DO LIST 좀 괜찮군 하는 인정과 꽤 멋진걸 하는 감탄을 넘어 어떤 사람, 어떤 존재, 어떤 작품들은 야속하게도 마음을 빼앗는다. 빼앗긴 쪽은 속수무책으로 응원할 수밖에. 세상의 기준 따위 아무 상관도 없어지는 것이다. 저절로 피가 끓어오르는 해롤드 사쿠이시의 유쾌한 밴드 만화를 원작으로 드디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벡>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빼놓을 수 없는 11월의 기대작. 존 레논 사망 30주기를 맞아 12월 개봉할 <노 웨어 보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샘 테일러 우드의 작품이어서 더 기대가 크다. 12월 14일 발매될 마이클잭슨의 새 앨범을 기다리는 마음도 비슷하다. 그의 팬은 아니지만 이제는 고유명사 같기만한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어느덧 서걱거리는 그리움만 마주하게 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오래 전부터 눈여겨본 뮤지컬 배우 조정석과 오만석이 형제를 연기하는 연극 <트루웨스트> 또한 마감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갈 리스트 맨 꼭대기에 있다. 뮤지컬 <넌센세이션>도 마찬가지. 지난달 이맘때쯤 양희경, 이태원, 홍지민, 김현숙 등 세 명의 말띠 여배우와 한 명의 소띠 여배우들과 나눴던 수다가 참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다시 한번 언니들의 에너지를 받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 소피아 코폴라의 <썸웨어>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녀에겐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기만 했을 영화판과 삶의 풍경을 어떻게 또 한번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담아냈을지 직접 확인해야겠다.



박지호 | 피처디렉터


‘문화생활’이라고까지 거창하게 이름 붙일 건 없겠으나, 어찌되었든 내가 즐기는 유희의 처음이자 끝은 ‘책’이다. 요네하라 마리처럼 하루 4권씩 너끈히 읽어 치우는 다독가도 아니요, 장정일처럼 독서를 통해 인생을 통찰하는 ‘공부’ 수준에는 더더욱 미치지 못하건만, 내가 세상과 접속하는 제 1코드로 굳이 책을 꼽는 건 그저 ‘활자 중독 증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아니면 거침없는 헤드뱅잉으로 무대를 엄습하고도, 하루 10시간씩 드넓은 갤러리를 활보하고도 말짱하던 허리와 무릎, 그 ‘청춘’을 가슴 깊이 묻은 지 이미 오래라서? 아, 또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지극히 게으른 본성 탓에 신간은커녕, 읽기로 마음먹은 지 몇 년은 지났을 책 리스트가 다이어리 한구석에 빽빽이, 정확히는 136권이 여전히 휘갈겨 있다는 것까지 염두에 둬주시길.

10월 15일 이후 가장 먼저 손에 든 책은 정윤수의 <클래식, 시대를 듣다>다. 그간 지나친 지식 자랑, 또는 작곡가의 불우한 사생활(?) 파헤치기에만 몰두하는 클래식 입문서들에 진저리치던 차에 제대로 된 클래식 ‘인문서’를 만났다. 당시의 시대상과 작곡가의 개인사를 마치 캐시미어 니트를 짜듯, 변증법적으로 오롯이 교차해 직조해낸 작가의 깊은 식견이란. 단연코 올해 최고의 책이라 칭할 만하다. 내러티브가 실종된, 오로지 음악의 힘만으로 꿋꿋이 밀고 나가는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건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내친김에 간만에 예술의전당에 나갔다. 차이코프스키의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코코 주제 변주곡 Op. 33’의 혼절할 듯한 떨림의 정체를 왜 교과서에서는 미처 배우지 못했을꼬.

2년 전에는 들뢰즈, 지난해에는 라캉이었다면, 올해 가장 관심 있게 읽고 있는 사상가는 발터 벤야민이다. 그 방대함에 눌려 한없이 미뤄두기만 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첫 권<파리의 원풍경>을 절반쯤 읽었다. 광화문 광장이 무참하게 망가진 이후 서울이라는‘ 도시’의 새로운 형식에 대해 아이디어를 얻어볼 요량으로 펼쳐보기 시작했으나 당분간은 도시의 냄새와 소음에 끌린 최초의 모더니스트, 멜랑콜리와 알레고리적 사유를 넘나드는 ‘20세기 최고의 서사시’에서 그저 헤어 나오기 힘들 듯.

게으름 탓에 구석에 밀어두었다가, 노벨상을 탔다는 뉴스에 다시금 떠올린 마리오바르가스 요사의 <새엄마 찬향>은 그나마 신간에 속한다. 바르가스 요사는 5년 전 페루를 횡단할 당시, 마추픽추의 선연한 풍광조차 뒷전이게 했던 <세상종말전쟁>의 아우라를 뛰어넘을 작품을 더 이상 써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확정적인 예감이 들어 조금 슬펐다.

진중권 인터뷰를 진행한 지 3개월이 지나고서야 간신히 <교수대 위의 까치>를 완독했다. 르네상스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깊은 식견과 동시대 최고로 꼽히는 문체에 흠뻑 빠져들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아이러니를 이번 저작에서는 완벽히 해소할 수 있었다. 아마도 ‘푼크툼’이라는, 특정한 경험과 사고 탓에 ‘혼자만이 느끼는 감동’을 중심으로 미술 작품을 설명했기 때문이겠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런던 사치 갤러리 소장전 [Korean Eye: Fantastic Ordinary]에서 발견한 작가 이림의 몽환적인 이미지는 나만의 ‘푼크툼’인가?

박근형의 신작 연극 <아침드라마>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빈정거림이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속에서 무언가 스멀거리며 올라올 정도로 온몸이 뒤틀리는 느낌이지만 외면하기에는 그 마력이 너무나도 깊다. 그리고 공간 해밀톤에서 <리버풀-도시교환展>이라는 흥미로운 전시를 보고 왔다. 상대편의 도시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그 도시의 이미지를 물어보고, 그 결과물을 드로잉과 도시 모형, 심지어 소설로도 만들었다.

TO DO LIST <파리의 원풍경>과는 다른 각도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19세기의 파리를 다룬, 데이비드 하비의 <파리 모더니티>를 읽으며 도시 탐구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려 한다. 이번 주 발간 예정인 <뉴욕열전>또한 필수 리스트. 발터 벤야민의 ‘복수의 과거 기억, 복수의 시간이 교차하는 장소’라는 개념을 ‘도시라는 종(種)을 대표하는 도시’ 뉴욕을 통해 탐구한 책이라 한다. 장정일의 인문학적 감성이 새롭게 담긴 <빌린책 산책 버린책>, 오랜만에 한국 사회학자가 제대로 쓴 저작이라는 <마음의 사회학>, 히가시노 게이고의 <탐정클럽>은 가장 기대하고 있는 책. 또한 <왜 말러인가>로 클래식 ‘인문’서에 대한 지평을 조금 더 넓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