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슐랭 별 셋을 반짝이는 셰프도, 진시황도 벌떡 일어나게 할 산해진미도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이길 순 없다. 여덟 사람의 추억을 듣다 눈물이 핑 돌았고, 그 어느 때보다 배가 고팠다. 솜씨가 좋든 안쓰럽든 엄마가 해준 밥이 최고다. 엄마니까.

엄마의 파종
가끔 생각한다. 만약 엄마가 음식을 엄청 못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뚱땡이가 되지 않았을 거야. (변명치고는 참으로 감읍스럽고 효성스럽군.)

엄마는 음식을 잘한다. 요리라고 쓰지 않은 건, 모든 전 세대의 엄마처럼 우리 엄마 역시 무슨 요리학원이나 스승을 사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있다고들 알려졌거나, 기절초풍 비싸거나, 고스란히 전통적이거나, 유행의 최전선에서 널을 뛰는 음식점에 그렇게 들락거려도, 그때마다“ 에이, 엄마가 해준 게 더 낫잖아”라고 생각하는건 단지 입에 맞는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엄마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자랑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집에 불러, “열무김치 먹어봐. 엄마가 달 초에 아픈 몸 이끌고 장 봐서 만든 거야. 맛 있지?” “고등어 조림 어때? 무부터가 다르지? 죽이지?” “잡채는 왜 안 먹어? 엄마가 해준 게 맛없나 보지? 엄마한테 이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걔, 밥 좀 편히 먹게 그만 좀 해라. 아니, 사람이 바로 코앞에서 맛있지? 맛있지? 그러는데 어떻게 맛없다 그러니?” 그러나, 사실을 전하는 일이 나의 생업솜씨라서 나는 맘에 없는 소리는 안 한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 음식의 궁극은 된장찌개다.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아끼는 맘에 스믈스믈거리면, 나는 꼭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해준 된장찌개를 먹어보라고 권유한다. 엄마의 된장찌개를 맛본 사람은 냉담한 그 누구라도 감탄사의 황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그 된장은 엄마가 집에서 직접 만든 것이다. 요즘 세상에, 어느 누가 마당도 없는 아파트에서 콩을 삶고 메주를 띄우고, 그 세월을 기다려 된장을 만든단 말인가.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직접 장을 만들지 않은 적이 없다. 따라서, 해마다 어느 한 철만 되면 청결한 우리 집에서 쿰쿰한 냄새가 요동쳤다. 그런 민속적인 냄새 속에서 고추장과 간장도 함께 익어갔다.

나는 번번이 불평했다. 마트나, 어디 이름난 된장 공장에서 사 먹으면 되지, 한 번 하고 나면 며칠을 끙끙 앓을걸, 뭘 그렇게 장 담그느라고 그 수고를 해? 그건 진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장 담그는 건 엄마의 파종(播種)이며 추수이자, 뺏길 수 없는 지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된장을 만들 땐 나도 조금 거든다. 적어도 콩 담은 큰 양동이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거나, 삶은 콩을 푸대자루에 넣고 질겅질겅 밟는 단순명료한 일은 한다. 콩을 네모나게 탁탁 다져 메주로 만든 건 두 번밖에 없었지만.
오늘 아침엔 엄마하고 모처럼 된장찌개를 먹었다. 엄마는 말했다. “난 다른 게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된장찌개가 최곤 것 같아.”그게, 하고많은 음식 중에 된장찌개라는 메뉴가 최고라는 건지, 엄마가 만든 된장찌개가 최고라는 건지 미처 확인할 새가 없었다. 진짜, 너무나 맛있어서.
– 글 이충걸 [GQ KOREA] 편집장

빈대떡씩이나 부쳐 먹지
기독교 가정이라 제사도, 차례도 없는 우리 집임에도 불구하고 명절이면 엄마가 꼭 하는 음식이 있었다.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옛 유행가 가사로 유명한 바로 그 빈대떡. 그 노래 때문에 이 요리가 상당히 싸구려같이 느껴지지만 알고 보면 적지 않은 재료비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는 사실을 나는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비장의 아이템인 맷돌을 꺼내 녹두를 갈았다. 그 시절에도 맷돌은 이미 구세대의 것이었다. 1년에 한두 번 목격할 수 있는 그 멧돌을 나는 재미있어하며 엄마를 도와준답시고 돌려봤다. 엄마는 내가 맷돌질을 하는 동안 가늘게 썬 돼지 등심에 밑간을 하고 또 고사리며 숙주를 다듬었다. 그리고 냉장고 깊은 곳에서 꺼낸 김치를 물에 씻어 썰어놓았다. 노릇노릇하게 씻은 김치들이 줄을 지어 놓여 있는 모습은 김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던 나에게도‘ 맛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장 중요한 시퀀스는 모든 재료가 프라이팬 위로 올라간 직후였다. 달궈진 프라이팬, 끓고 있는 기름에 빈대떡 재료가 닿는 순간, 기름이 튀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냄새는 이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명절의 특식을 맞이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고사리에 발암 물질이 들었다는 뉴스 때문에 고사리가 빠진다거나 돼지 등심 대신 삼겹살이 들어간다거나, 실고추로 데커레이션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조금씩 변주되는 엄마의 빈대떡 레시피는 몇 번이고 전수받았지만 나는 아직 엄마의 빈대떡을 제대로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재료는 어떻게 비슷하게 맞춘다 해도 전을 부치는 시퀀스에서 그 차이가 결정된다. 내가 엄마의 빈대떡을 흉내 낼 수 없는 것만으로 엄마의 빈대떡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과 부산 시내는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유명하다는 빈대떡, 녹두전을 제법 먹어봤지만 단언컨대 단 한 곳도 엄마의 빈대떡 맛에 80%도 근접하는 곳이 없었다. 나는 요리 솜씨에 있어서 제법 엄마를 닮아 엄마의 야채수프, 엄마의 갈비찜, 엄마의 소고기 무국을 전승받는 데 성공했지만 빈대떡만큼은 성공하지 못했다. 엄마의 빈대떡에 대체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가 만든 것만큼 맛있는 빈대떡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우리 이거 장사하면 떼돈 벌 거예요. 아니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빈대떡을 잘 부쳐요? 엄마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답했다. 네가 몇 살 때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언젠가 네가 어느 잔칫집에서 빈대떡을 먹어보곤 하도 좋아하기에 집에 돌아와서 부쳐 줘봤는데, 잘 안 먹기에 잘 먹을 때까지 만들어봤지. 그렇다. 나는 엄마 때문에 빈대떡을 좋아하게 된 게 아니었다. 빈대떡을 좋아했던 나 때문에 엄마가 최고의 빈대떡을 만들게 됐을 뿐이라는 사실을 마흔이 넘어서야 알았다.
– 글 조원희 칼럼니스트 겸 영화감독

마지막 한 술
부산에서 제일 높은 산동네 영도, 많은 사람에게는 해운대나 광안리, 동래온천, 자갈치 시장이 친숙하겠지만 나는 부산 하면 영도가 떠오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 밑으로 부산항과 남포동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영도구 청학동에서 우리 할머니가 사셨기 때문이다. 웬만한 승용차는 부르릉 힘겨운 소리를 내고도 겨우 올라가는 부산 최고 산동네.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부산이라지만 혹여 서릿발이라도 날리는 겨울날이면 온 동네가 발이 묶여버리는 영도! 자식들 모두 서울로 출가시키고 조부모께서는 영도 꼭대기에 있는 자그마한 집에서 남은 생을 보내셨다. 대학 다닐 때 전화도 안 넣고 제일 좋아하시는 원비디 드링크 한 박스를 들고 문 앞에 들어서면 아이처럼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셨지. 우리 강아지라고 나를 부르시던, 남보다 특별히 뛰어날 것도 없는 내가 꼭 대통령이 될 인물이라면서 온 동네 할머니들에게 자랑하시던 우리 할머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는 원래 전라도 분이다. 손맛이 있어 모든 음식을 잘하시지만 특히 우리 할머니가 담근 고추장은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깊은 맛이 난다. 달착지근하면서도 구수하고 매콤하면서도 새콤하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도 난 할머니 고추장만 먹었다. 한국에 나올 때마다 플라스틱 랩으로 수십 번을 감아 공수할 만큼 좋아하던 우리 할머니의 고추장. 어느 날, 집에 들어와 보니 어머니께서 이 많은 고추장을 어디에 다 넣냐며 냉장고와 씨름하고 계셨다. 당신이 이제 얼마 못살 것 같으니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았을 때 손주 먹을 고추장을 해줘야겠다며 정말 몇 년을 먹고도 남을 고추장을 손수 담가서 택배로 올려 보내신 것이다. 유독 덜 익힌 생 고추장을 좋아하는 난 좋다고 얼른 ‘계란 후라이’에 덤으로 보내신 참기름까지 듬뿍 넣고 뜨거운 밥을 싹싹 비벼서 순식간에 철없는 한 그릇을 해치웠다. 할머니 고추장을 항상 먹을 수있던 때였다. 유난히 짧았던 올봄 아침상에 고추장이 올랐다. 아들 주려고 아끼고 아꼈는데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며 어머니께서 고추장 한 술을 내어 주셨다. 순간 콧날이 시큰해지는 느낌. 할머니는 그 많은 고추장을 보내놓고, 정말 자신이 언제 가실지알고 계셨던 것처럼 석 달 후 조용히 하늘 나라로 가셨다. 이제 어느 누구도 할머니 고추장을 만들지 못한다. ‘레시피라도 있었더라면…’ 생각도 해보지만, 그런 게 있다 한들 그 누가 그 맛을 낼 수 있을까? 유난히 맛있었던 할머니의 손맛은, 마지막을 직감한 것처럼 손주에게 보낸 마지막 정성과 마음이었을 텐데 말이다. 요리사로 일하면서 문득문득 고추장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내게 만들어 준 그 마음으로 음식을 만든다면 최고의 요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자식 사랑보다 절대적이다. 내 기억 속의 엄마의 맛은 대부분 할머니의 고추장을 토대로 한 거였다. 마지막 고추장 한 술은 계란도 없이 그저 맨밥에 비벼 먹었다.
– 글 백상준 ‘컬리너리아’ 오너 셰프

엄마 찌개, 순간 이동!
고추장찌개란 음식이 있다. 냄비에 자작하게 물을 붓는다. 돼지고기 몇 조각과 한입 크기로 썬 감자, 마늘을 넣고 불에 올린다. 감자가 살캉살캉하게 익었으면 고추장과 고춧가루, 된장, 간장을 푼다. 역시 한입 크기로 썬 감자와 양파, 애호박 따위 그때그때 흔한 채소를 더해 바글바글 끓인다. 짜다 싶으면 물을 더 붓고, 싱겁다 싶으면 소금으로 간하거나 졸아들게 한다. 모든 재료가 다 익고 간이 맞았다 싶을 때 납작하게 썬 두부를 넣으면 얼큰한 찌개가 완성된다.

만드는 과정을 읽었으니 짐작하겠지만, 고추장찌개는 별다르거나 호사스러운 음식이 아니다. 단, 어떤 고추장과 된장, 간장을 쓰느냐는 중요하다. 집에서 만든 혹은 재래식으로 만든 고추장과 조선간장을 사용해야 제 맛이 난다. 공장에서 만든 고추장은 그냥 먹기엔 맛있지만 찌개를 끓이기엔 너무 달다. 양조된장과 양조간장은 깔끔한 것 같지만 집된장과 집간장의 깊이와 폭이 부재하다. 제대로 만든 고추장찌개를 먹어보지 않았다면 그저 양조 고추장과 간장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다고 느낄 것이다. 미각이란 어차피 각자의 경험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고추장찌개가 대단한 별미는 아니지만 쉬 맛볼 수는 없다. 당신이 서울토박이라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가진 김정자 여사(동생과 나는 엄마를 이렇게 부른다)에 따르면 고추장찌개는 서울 음식이란다. 집밖에서 이 음식을 맛본 적이 없는 걸로 미루어 엄마 말이 맞는 듯하다. 그리고 고추장찌개는 내 머릿속에 여름 음식으로 각인돼 있다. 고추장찌개를 여름 아닌 다른 철에 먹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추장찌개를 왜 여름에만 끓이냐고 물어봤지만, 우리 김정자 여사께서도 딱 떨어지는 이유를 대지는 못했다. 그저 당신 어머니 때부터 여름이면 먹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이탈리아 파르마로 연수를 왔다. 슬로푸드협회에서 세운 미식학 대학(University of Gastronomic Sciences)에서 음식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대학원 과정을 수강하고 있다. 여름방학 동안 부모님이 오셨다. 누군가 음식을 차려주고 치워준다는 게 대단한 호사란 걸 태어나 처음 실감했다. 점심 먹고 침대에 누웠다가 깜박 졸았나. 눈을 떴을 때, 한국에 있는, 서울에 있는 우리 집 내 방에 누워 있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너무나 강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탈리아 음식 연수는 행복한 꿈이었나. 둘러보니 다행히도 이탈리아가 맞았다. 거실에 나가 보니 김정자 여사께서 뭔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거실 한켠에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붙어 있는, 유럽의 전형적인 소형 아파트다. 엄마는 “슈퍼마켓에서 애호박하고 양파, 감자 사왔다”면서 “너 좋아하는 고추장찌개 끓여”라고 했다. 여기가 이탈리아 파르마인지 서울인지 헷갈리게 한 건, 그러니까 고추장찌개 냄새였다. 엄마가 고추장찌개와 갓 지은 밥을 저녁으로 차려줬다. 엄마와 아빠가 서울에서 애써 들고 온 고추장과 간장이 제 역할을 했다. 고추장찌개는 우리 집 맛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나마 집에 돌아와 있었다.
글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 담당 기자, <세계인의 밥> 저자

최초의 요리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단 한 번이었지만 내가 어머니에게 음식을 해다드린 일부터 말해야겠다. 그때가 한 33년 전쯤? 정확하진 않다. 대략 일고여덟 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연금술에 한창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물을 계속해서 끓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과연 그 물이 무엇으로 변할 것인가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가졌었다. 급기야 하루는 그것을 직접 실천해보게 되었는데, 그때 가스레인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연탄불 아궁이에 냄비를 가져다 올려놓고는 바가지로 물을 퍼다 부었던 것 같다. 한 십분쯤 지나니 물이 끓기 시작하는데 그때의 내 기분은, 예를 들어 온도계의 빨간 액체가 눈금의 최고조로 치달아도 멈추지 않고 가열을 계속하면 대체 그 절정 너머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나는 물이 증발해서 공기 중으로 날아가버린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고 그것이 꼭 물이 아닌 무언가로 변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삼십분을 애태우며 지켜보았지만 냄비만 누렇게 타버리고 물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결과만 얻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고 이제는 온갖 음식물을 섞어서 가열해보는 일에 착수했다. 식초도 끓여보고, 미원과 소금을 섞어보고, 그러다 최후에 완성한 요리가 내 나름의 ‘고기지짐’이었는데 이미 엄마가 양념을 다 해놓은 소불고기에 설탕과 계란, 소금 같은 것을 적당히 섞어놓고는? 이번에는 극한까지 가지 않고 잘 익혀서 무슨 맛일까 먹어보니 상당히 맛있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그 길로, 내가 수많은 그릇을 태우고, 부엌의 온갖 양념을 절단 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게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그 고기지짐을 가져다 드렸다. 엄마는 한입 드시고는 “세상에 우리 석원이가 엄마를 위해서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해다 줬네”하시면서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나머지는 전부, 나 혼자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기억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사십 평생을, 바로 오늘까지도 얻어 먹고 있는 나로서는 그 많은 맛과 노력의 향연에 대해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엄마가 내게 해 주신 온갖 음식 중 가장 맛있는 걸 꼽아보라면 최근 몇 년간 내가 ‘마약국수’라고 부르는 비빔국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요즘도 그걸 이틀에 한 번씩은 졸라서 얻어 먹곤 한다. 김치를 조금 썰고, 흰 샘표 국수를 잘 삶아서 엄마가 직접 만드는 특제 다대기와 참기름을 적당히 버무려 싹싹 비벼 먹는 그 국수야말로 어머니가 내게 주시는 힘과 응원, 맛과 영양의 공급 그 모든 것이라 하겠다. 나는 오늘도 걸어서 삼십분 거리에 있는 엄마 집까지 산책도 할 겸 걸어가서는, 국수 한 그릇을 부탁해 먹고 온다. 그 국수를 먹으며 요즘 나 사는 얘기, 엄마 사는 얘기를 서로 도란도란 나누는 시간이 무엇보다 즐거운 일상이다.
– 글 이석원 <보통의 존재> 저자

무한변신 샐러드
그 요리는 간단했다. 양배추를 잘게 썰어서 마요네즈와 버무린 뒤 거기에 이름을 붙이면 되는 것이었다. 내 키가 지금의 1/3만했을 때, 밥상 위에 늘 빠지지 않던 반찬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양배추샐러드, 그러나 그때는 한 젓가락에 한 번씩, 이름이 달라지는 음식이었다. 나는 엄마가 젓가락으로 양배추 샐러드를 한 움큼 집어 내 앞으로 내밀 때마다 물었다. 엄마 이건 뭐야?

신데렐라, 백설공주, 난장이1, 난장이2, 난장이3…. 한 입 한 입 샐러드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의 동화 속을 순회한 후, 콩쥐팥쥐나 떡 하나만 요구하면 안 잡아먹지를 반복하던 호랑이로 흘러갔고, 전래동화를 다 거친 후에는 동식물로도 흘러갔다. “이거 뭐야?”의 답이 좀처럼 흥미롭지 않으면 입을 벌리지 않던 아이 때문에 엄마는 세상의 모든 이름을 후보에 올려야만 했다.

젓가락으로 양배추샐러드를 집는 것은 젓가락으로 김치나 달걀말이를 집는 것과는 달라서 변신에 용이했다. 평범한 양배추샐러드도 젓가락으로 조금 많이 집느냐 적게 집느냐에 따라서 정말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에 적합하게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었는데, 만족스럽게 입을 벌려 그들을 잡아먹은 적보다는 “또 그거야?”라며 입을 꾹 다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바빴다. 나는 엄마의 입에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들떴고, 어린 제비처럼 입을 벌렸다. 그리고 금방 신이 나서 다음 젓가락의 이름을 보챘다. 엄마 이건 또 뭐야?

보통 한번 식사에 여섯 명 정도, 혹은 일곱 명 정도, 그들을 잡아 먹었다. 때로는 동생과 나란히 앉아 서로 경쟁하듯이, 경매하듯이 젓가락 끝을 탐내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그것을 백설공주라고 부르면, 정말 백설공주 맛이 났고, 홍길동이라고 부르면 정말 홍길동 맛이 났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음식 중에 양배추샐러드를 손꼽은 것을 알면, 엄마는 조금 억울해할 것 같다. 나중에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을 때 내 아이에게 꼭 해 주고 싶은 음식이라고 말한다면 조금 위로가 되실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음식인 동시에 대화였고, 현실의 대화인 동시에 상상 속의 대화였다. 누군가와 함께 먹지 않으면, 누군가 먹여주고 받아먹는 관계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양배추샐러드라고 부르기엔 미안할 정도로 재미있는 맛을 가진 음식, 귀도 쫑긋, 혀도 쫑긋, 위도 쫑긋, 귀를 기울였던 맛이다.
– 글 윤고은 소설가 <1인용 식탁> 저자

된장구이를 아십니까
어머니 음식이라 뭘 그런 걸 다 묻나. 생각 좀 해봅시다. 그래, 된장구이가 있었지. 우리 집에선 그걸‘빵장’이라고 불렀어요. 아니, ‘깡장’ 말고‘빵장’. 어떤 음식이냐면 내가 설명해줄게. 된장에다 양념을 해가지고, 그걸 둥글 납작하게 빚어서 구워요. 된장에다 뭘 넣는지는 이제 와서 알 수가 없네. 고기는 안 들어가고 갖은 양념이랑 야채는 좀 들어갔던 것 같은데. 정말 된장을 구워서 된장구이인 거지. 생긴 건 떡갈비랑 비슷한데 좀 더 작고 통통하고. 그걸 구워서 조금씩 떼어가며 갓 지은 밥이랑 먹으면 고소하고 담박하고 맛있었어.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데 그때도 지금도 그 음식을 다른 곳에서 먹어본 적이 없어요. 어쩌면 우리 어머니의 고유하고 특이한 음식이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런‘빵장’이 있고, 돼지고기를 삶아서 부엌에 걸어놓고, 파리가 못 들어가게 채반으로 덮어놓고선, 끼니 때마다 조금씩 잘라 먹곤 했던 기억도 난다. 우리 부모님이 다 이북 분이거든. 어머니가 국수 삶는 솜씨가 좋았어. 국수를 삶아서 이북식으로 달걀을 부쳐 썰어서 얹어 먹으면 최고였지.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내가 가수 할 땐, 여름에는 아침 점심은 무조건 국수를 먹고, 겨울에는 무조건 떡국을 먹었지. 어머니 음식은 중학교 때까지였던 것 같네. 그래, 가끔씩은 정말 생각난다.
– 조영남 가수

겨울의 식탁
얼마 전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갔다. 그곳에 어머니가 즐겨 해 주던 ‘고추지’가 있었다. 그 고추지를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신경성 치매로 많이 편찮으시다. 내가 아들인 것도 잊으셨지만, 나를 볼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을 지어준다. 어머니가 치매를 앓으니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도 사라졌다. 그 사라진 맛을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반갑고 신났다가, 이내 목이 메었다.

전라도에서는 김치를 재료에 따라 ‘무슨무슨지’라고 말한다. 파김치는 ‘파지’, 갓김치는 ‘갓지’. ‘고추지’는 무와 고추로 만든 김치다. 김치는 집집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니 다른 집도 그렇게 먹는지는 모르겠다. 먼저 깍두기보다 무를 좀 더 크게 썰고, 푸른 고추도 큼직하게 썬다. 여기에 양파까지 넣어서 국물을 자작하게 담근다. 이 고추지는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익었을 때 맛있다. 무의 시원한 맛, 고추의 쌉쌀하고 매콤한 맛 뒤에 양파의 단맛이 다 나는데 특히 이 맛이 다 우러난 김치국물이 정말 맛있거든. 이 국물에 밥을 비벼서 김 한 장 싸 먹으면….

우리 어머니는 교사였다. 일을 하는 엄마이니 다른 집보다 저녁 시간은 조금 늦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곧장 와서 또 정신없이 저녁을 차리셨다. 짧은 시간에 만드는데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먼저 두부를 송송 썰어 넣은 청국장을 바글바글 끓인다. 우리는 일곱 식구였는데 보통 누나가 옆에서 어머니를 거들면, 연탄불에 김을 굽는 건 내 몫이었다. 들기름을 고루 발라 소금을 뿌려서 석쇠를 올려놓고는 한 장 한장 김을 구웠다. 연탄불이 아니라서 그런지, 김 맛이 달라졌는지 그 이후에는 그렇게 맛있는 김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사이 엄마는 신기하게도 참기름이며 깨소금, 고춧가루를 뿌려가며 멸치도 볶고, 보들보들한 달걀찜도 만들고 그랬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고추지도 올려놓고. 그렇게 한 상 차려서는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저녁을 먹었다. 청국장을 먹을 때는 거의 겨울이었던 것 같다. 진눈깨비가 내릴 때부터 청국장은제 맛이 난다.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눈이 폭폭 내릴 때 창호지문을 반쯤 열어놓고 먹던 맛이 그렇게 그립고 그렇다.

이 모든 게 어머니의 병환과 함께 사라졌다. 많이 서운하다. 하지만 나만 보면 웃는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 너무 좋다. 이 환한 얼굴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 박철민 배우

김씨 만두
집에서 만두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엄마가 이북 분인가봐?” 한다. 하지만 엄마는 경기도 여주 분이다. 외갓집에선 예전에는 술도 담가 먹었다. 할머니할아버지가 외출했을 때 7남매가 몰래 술독을 열고 오빠가 찍어 먹고, 키 안 닿는 여동생도 찍어 먹여주다 다같이 취해서 대청마루에 누워 잤다는 미담이 전해질 정도로 외갓집은 좀 먹고 마실 줄 안다는 집안이다. 술을 담글 정도로 쌀과 온갖 야채가 풍족한 여주 사람이 왜 밀가루로 만드는 만두를 즐겨 먹는가에 대해서는 엄마의 엄마, 또 엄마의 엄마의 엄마… 증조할머니까지 올라가는 집안 식성이겠지만.

엄마가 일을 하고, 어릴 적부터 아파트에서만 살았으니 집에서 김장김치를 담가 먹은 기억은 별로 없다. 대신 만두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만들어 먹었다. 하도 만두를 빚었더니 나도 이제 만두 하나는 장인 못지않게 만든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서 만두를 배웠을 테지만, 눈물 쏙 빠지게 칼칼한 할머니 만두하고도 조금 다르다. 당면 싫어하는 엄마 입맛(잡채는 잡스러운 음식이라며 싫어한 외할아버지 입맛일거다. 점잖지 않다고 생전에 비빔밥도 안 드신 분이니), 고기 좋아하는 내 입맛, 너무 매운 건 싫어하는 남동생 입맛을 조금씩 반영해 만든 진짜 우리 집 만두다.

먼저 잘 익은 김치를 다진다. 깍두기가 있으면 함께 다져 넣으면 맛이 더 시원하다. 유기농 짠 두부를 사고, 여기에 숙주를 나물하듯 양념해 넣고 잘 섞는다. 기본 재료는 이게 전부다. 먹어보고 너무 안 맵다 싶으면 외갓집 고춧가루를 좀 넣어서 고루 버무린다. 그럼 만두소 완성이다. 그 다음에는 얼리지 않은 돼지고기 목심을 칼로 작게 썬다. 절대 다짐육을 사지 않는 건 식구들이 씹히는 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김치찌개나 카레에도 돼지고기 안 들어가면 큰일나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 목심에 생강, 마늘, 파, 참기름으로 양념해, 만두소와 고기 몇 점을 함께 넣어가며 만두를 빚는다.

만두와 관련한 우리 집 가훈은 ‘속 먹자는 만두, 피 먹자는 송편’인데, 해석하면 만두피를 얇게 밀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냉동 만두피를 사서 쓰는 게 낫다는 것이다. 만두를 하도 많이 먹으니 반죽을 밀어서는 당해낼 재간도 없다. 한장 한장 잘 떨어지고, 삶으면 야들야들하고, 잘 터지지 않아야 좋은 만두피다. 시중에서 파는 만두피를 다 먹어본 결과 칠갑농산 제품이 으뜸이요, 오뚜기가 그 다음이다. 이렇게 만두를 다 빚는다고 끝이 아니다. 솥을 두 개 걸고 말린 표고버섯과 황태, 다시마, 양파, 대파뿌리를 넣고 국물을 만든다. 한 국물에는 만두를 삶고, 한 국물은 삶은 만두를 담은 그릇에 한 국자 뿌려, 국물에 만두를 적셔 먹는다. 여기에 고춧가루와 소금, 참기름으로 버무린 파채를 곁들여야 비로소 김씨 만두가 완성된다. 만두를 많이 먹기 위해 설날이 아니면 떡 같은 건 넣지 않는다. 우리 집 만두는 매콤하고, 진하며, 끝 맛은 개운하다.

만두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집안 만두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내 손은 점점 커지고, 엄마 손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 어깨가 아프다는 엄마 대신 김치를 다지는 일도 내 몫이고, 목살을 저미는 것도 내 몫이고, 덩어리 없이 두부를 잘 으깨고 갖은 재료로 국물을 만드는 것도 내가 한다. 엄마는 숙주를 양념하고, 간이 어떤가 퀄리티 체크를 한다. 엄마가 헤드 셰프가 되자, 나는 수석 셰프로 승진했다.

바쁜 양반이지만 먹을거리에는 꽤 까다로워서 내가 어릴 적엔 아이스크림도 만들어먹일 정도였다. 이제는 귀찮기도 하고, 힘도 들고, 너희도 집에서 밥 잘 안 먹지 않냐면서 음식 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문득 “만두 할까?” 하면 엄마는 내심 좋아하는 것 같다. 모든 가족에게는 흩어진 온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게 하는 맛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우리 집은 그게 만두다. 엄마가 안동 김씨라서 김씨 만두. 난 허씨지만이 만두만큼은, 영원히 김씨 만두다.
– 에디터 허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