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남자배우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배우 배해선이 오랜만에 발랄하고 엉뚱한 작가 역을 맡아 <연애희곡> 연극 무대에 선다. 무대에서의 카리스마와 달리 무대 밖에서 만난 그녀는 밝고 따뜻한 매력을 지녔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위의 모습과 달리 밝고 따뜻한 매력을 지닌 배우 배해선.

연극 <연애희곡>은 한국에서는 처음 공연되는 작품인데 어떤 작품인가요?
내놓은 멜로드라마마다 히트를 치지만 사실은 연애 한 번 못해본 여자 작가가 한계에 부딪히자 신입 PD를 불러 좋은 작품을 쓰려면 실제로 연애 감정을 느껴봐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았어요. 상황극을 만들어놓고 사랑에 빠지게 한다는 계획을 세우죠.

최근에 했던 작품들에서는 남모를 아픔을 가졌거나 슬픈 운명을 타고난 역을 주로 맡았는데 이번에 맡은 캐릭터는 좀 다른 것 같군요.
팬들이 슬픈 역할 좀 그만하라고 해서요. 보는 사람들이 더 가슴이 아팠나 봐요. 이번에는 제멋대로인 데다 배려라고는 없는 캐릭터예요. 일본의 유명작가 코가미 쇼오지가 대본을 썼는데 인간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탁월해 내용 자체는 황당하지만 절대 뻔하지 않아요. 극중극 형식으로, 현실과 극중, 극중 속 극중, 세 개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작년에 봤던 두 작품에서 배해선 씨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연극 <피카소의 여인들>에서 보여준 독립적이고 똑 부러지는 프랑수아즈 질로와 뮤지컬 <삼총사>에서 맡은 밀라디 모두 굉장했어요. 살아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그 인물이 처한 상황과 배경, 입장, 심정 등을 찾아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상상도 해보고 인물과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해요. 배우가 작품을 머리로만 이해하면 관객들이 극의 상황과 인물의 감정이나 슬픔을 공감할 수 없어요.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이 참 힘들어요. 한 인물의 삶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야 하니까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완벽히 그 인물이 되어야 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텐데요.
평소에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집과 연습실을 오갈 때 항상 대중교통을 이용해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연기하는 데 정말 좋은 공부가 되거든요. 사진이나, 그림,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도 배워요. 스물다섯 살에 전쟁 통에 쌍둥이 둘을 다른 집에 떠나 보내야 하는 엄마 역을 맡았을 때도 그 정서를 찾아내려고 전쟁 다큐멘터리와 전쟁사진집을 모아 아이를 둔 엄마들의 표정과 행동, 감정을 연구했어요.

배우의 끼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건가요?
밝고 명랑한 면도 있고, 엽기적인 면도 있고, 성향을 한가지로 정의하긴 힘들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워낙 그때그때 배역에 맞춰 살아야 하다 보니까 다양한 면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연기를 하면서 내면에 숨겨진 부분을 끄집어내기도 하고요.

워낙 연극과 뮤지컬을 함께 해와서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두 무대 모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둘 중 더 애착이 가는 걸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연극 무대에서 데뷔해서 그런지 연극무대는 제게 고향 같은 곳이에요. 무대에 설 때마다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고, 초심을 기억하게 해주죠. 연극은 춤과 노래가 있는 뮤지컬에 비해 밀도 있는 연기를 요하는데, 연출가와 배우들과 연기에 대해 토론하고 늦게까지 연습하고 그런 시간들이 참 좋아요.

연습실과 무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는 어렵겠네요. 20대 역시 지금처럼 치열하게 보냈나요?
20대에는 좋은 배우가 되려는 목표밖에 없었어요. 배우가 아닌 다른 인생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세계적인 배우가 되는 꿈도 꾸고, 해외 진출도 해보고 싶었어요. “배해선, 이 정도밖에 못해”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고 혹독하게 대했었죠. 그런데 일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서른세 살 즈음 변화가 찾아오더라고요.‘이렇게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할 게 아니구나, 여자로서,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순간순간을 돌아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일할 수 있는 것도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 커졌어요. 요즘은 “그래, 해선아 너니까 그 정도한 거야. 수고했어”라고 스스로 칭찬도 하고 위로도 하고 그러죠.

40대의 삶을 그려본 적이 있나요?
무대에 설 때 가장 빛이 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무대가 참 좋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저라서 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대사 한 마디 없는 배역이라도 기꺼이 맡고 싶어요‘. 배해선이라야 할 수 있어’ 그게 바로 지금 제가 무대에 남아 있는 이유니까요.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나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