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뜨거운 순간을 찾아 <얼루어>의 뷰파인더에 담았다. 그랬더니 '2010 문화계의 가장 핫한 뉴스'가 되어 있었다. 단 한 장면도 놓치지 마세요.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정진호, 김세용, 임선우, 이지명. -헤어: 성찬(포레스타), 메이크업: 이가빈(포레스타)-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One 빌리, Two 빌리, Three 빌리, Four 빌리. 도합 네 명의 빌리가 있다. 광고 카피처럼 ‘빌리는 사람’이 아니다. 빌리는 소년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어엿한 주연배우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탄광촌 꼬마 빌리. 순수한 희망과 사랑, 열정등 인생의 필수 요소를 꼭꼭 눌러 담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범지구적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뮤지컬로 만들어지기 이른다.엘튼 존이 맘먹고 참여한 음악은 주옥같았고, 빌리 역으로 발탁된 소년들은 모두 스타가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일 매진 행진이다. 그리고 8월 13일, 비영어권으로는 최초로 우리나라의 <빌리 엘리어트>가 시작된다. 1년간의 맹렬한 연습 끝에 빌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소년들의 이름은 이지명, 정진호, 임선우, 김세용. 아이들은 다 비슷해 보인다고? 천만에 말씀. 5분만 함께 있어도 네 아이들, 아니 네 배우의 색깔이 뚜렷하게 보인다. 지금은 모두 어엿한 발레리노가 되었지만 본래 발레를 해온 건 김세용과 임선우, 둘뿐이었다. 세영은 2009년 유스 아메리칸 그랑프리 발레부문 금메달을 땄고, 선우는 형의 뒤를 이어 2010년 금메달을 목에 건 발레 신동이었다. 당시 동메달을 딴소년이 현재 시카고의 빌리다. 모두 다 함께 브로드웨이와 시카고에서 <빌리 엘리어트>를 보러 간 여행에서 다시 만난 소년들은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네 명 중 ‘중학생 형’인 세영은 의젓하게 동생들을 챙긴다. 동료들로부터‘라인은 선우’라는 말을 듣는 선우는 끼까지 넘친다. 낯선 어른들로 가득한 촬영장에서 움츠러들 법도 한데, 제법 아트 디렉터 역할까지 한다. 이렇게 하면 더 멋있어 보일 것 같다는 본능이 넘실대서 귀여우면서도 기특하다. 가위바위보에 진 까닭에 가장 먼저 촬영을 시작한 지명은 가장 좋아하는 밴드가 린킨파크다. 배우 진구를 떠올리게 하는 고우면서 남자다운 얼굴이 인상적이다. 탭댄스가 장기인 진호는 뻣뻣한 몸 때문에 처음에 고생을 좀 했단다. 지금도가장 어려운 것으로 아크로바틱을 든다. 어린 동료들은 그를 두고 ‘인간 승리’라고 부른다. 이들은 천대의 경쟁을 뚫고 ‘한국 1대 빌리’가 되었다. 게다가 운도 따르는 것 같다. 연애도 빌리도 타이밍. 이들이 아무리 출중했다고 해도 신장 150cm 이상이었거나, 나이가 13세가 넘었다면 무대에 서지 못했을 테니까. 영화와 뮤지컬을 모두 연출한 스티븐 달트리는 새로운 공연이 열릴 때마다 작품을 재점검하기에 런던과 시카고, 뉴욕의 공연은 모두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가장 최근 공연인 시카고와 서울의 공연이 최고일 수밖에 없다고. <빌리 엘리어트>의 프레스콜. 대작 뮤지컬과 네 명의 빌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은 프레스들이 오전부터 LG아트센터로 몰려들었다. 처음 관객 앞에서, 그것도 주요 장면만을 선보여야 하는 까닭에 실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했다고 배우들은 속상해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약이 된 것 같았다. 첫 공연이 떨리냐는 말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아니요!’를 외치는 것을 보면. 엘튼 존이 만든 <빌리 엘리어트>의 음악이 흐르자,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는 아이들. 이들에게 뮤지컬은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장난 삼아 “누구 공연을 보러 갈까?” 하고 물었더니 “네 명 다 봐야해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세영이 진지하게 덧붙인다. “넷이 다 다르거든요.” 하지만 첫 공연에 누가 설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뮤지컬은,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어느 빌리가 무대에 설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럼 첫 공연은 누가 하게될까? ‘기자 누나’의 호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 명의 빌리는 복숭아맛 아이스티를 반 잔씩 원 샷하고 손은 흔들며 떠났다. 발레타이츠는 벗어서 다시 곱게 가방에 집어넣은 후였다.



이지훈이 입은 재킷은 시스템 옴므(System Homme). 화이트  티셔츠는 바이 엘록(by Eloq). 오종혁이 입은 셔츠는 커스텀멜로우(Customellow). 베스트는 줄리아노 후지와라(Giuliano Fujiwara). 팬츠는 닐 바렛(Neil Barrett). 벨트는 시스템 옴므. -스타일리스트: 김봉법-


늦어도 11월에는


이지훈, 그리고 오종혁과 같은 시절을 보냈다. 첫 모습도, 뜨거운 팬덤 속 그들의 모습도 선명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이지훈이 발라드를 열창하던 때나 오종혁이 긴 머리를 휘날리던 때를 꺼내면 괜히 추억담으로 흐를 것 같아서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뮤지컬 <쓰릴미>의 새로운 주연이 된 이지훈과 오종혁이 궁금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으니까. 그들의 현재가 궁금했다. <쓰릴미>는 1924년 시카고에서 법대생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처드 롭이 소년을 유괴해 살해한 실화다. 백만장자 집안에서 태어나 8개 국어에 능할 정도로 천재적 지능까지 갖춘, 겨우 19살의 소년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만으로도 센세이션이었다. 살인의 동기는 달랐다. 니체에 심취한 리처드는 완전범죄로서 ‘초인’이 되고자 했고, 네이슨은 리처드에 심취해 있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자”는 유명한 변론으로 사형을 면한 그들은 같은 감옥에 갇혔다. 뮤지컬 <쓰릴미>는 34년이 지나 가석방 심사대에 오르는 것에서 다시 시작된다. 심사원들은 홀로 살아남은 세기의 살인자, 네이슨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 공연을 앞두고 매일 자정까지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두 사람. 네이슨처럼 오종혁은 조용히, 리처드 역의 이지훈은 카리스마 있게 성큼성큼 스튜디오에 차례로 들어섰다. “오종혁이 상대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아니 이 자식이…라고 생각했어요.” 리처드 역으로 먼저 캐스팅된 이지훈의 말은 그만큼 <쓰릴미>가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과 오종혁이 이 역에 도전할 만큼의 실력혹은 배짱을 갖췄다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즉 네이슨 역의 오종혁은 반대로 “지훈 형이 상대역이라 안심이 되었어요”라고 한다. “어려운 작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형이 잘 이끌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쓰릴미>는 누구나 도전하고 싶은 작품일 거예요. 어렵지만 그만큼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작품이죠.” 그동안의 연기 활동으로 자신감을 보이는 이지훈과 달리 오종혁은 작품이 자신에게 조금 빨리 왔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놓치고 싶지 않았죠.” 더 이상 남자와의 스킨십이 어색하지 않다며 농담도 건넨다. <쓰릴미>는 단 두 명의 배우가 피아노 선율과 상대에게만 의지해 끌어가는 뮤지컬이다. 그래서 배우마다 해석이 다르고, 관객은 또 다른 해석을 찾아 여러 번 공연을 관람한다. “우리의<쓰릴미>는 다를 거예요.” 이지훈은 말했다. 변호사 찰스 대로우는네이슨 레오폴드에 대해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돌아가는 똑똑한 기계’라고 말했다. 그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실제 네이슨 레오폴드는 리처드 롭에 대해 ‘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하는 남자’라고 말했다.그는 남자의 카리스마를 가진 남자였다. 신기한 건 실존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두 배우와도 겹친다는 것이다. 둘의 관계를 분석한 정신과 의사는 두 사람이 ‘왕-노예’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왕은 노예가 있을 때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 권력자는 노예다. 살인을 주도한 건 리처드였지만 네이슨은 리처드에 대한 열망으로 살인까지 하게 된다. 그들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극중 심사원은 “당신과 그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종혁과 이지훈은 오히려 <데미안>의 관계에 가까울 것이다. <쓰릴미>의 그들이 서로를 파괴했다면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서로를 성장시킨다. 두 사람의 얼굴과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이 배우의 진지한 눈을 가지게 된 것은 몰랐다. 그러니 두 사람은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 11월까지 무대에 올려지는 <쓰릴미>는, 과거와의 결별이자 재발견이 될 것이다.



김효진이 입은 베스트와 부츠. 벨트는 나인아울즈(9owls). 한정수가 두른 스카프는 데어(Dare). 조동혁이 입은 베스트는 H&M. 김정화의 벨트는 나인아울즈. 가죽 장갑은 에르메스(Hermes). -스타일리스트: 김봉법-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연극 무대가 이토록 뜨거웠던 적이 있나 싶다. 지금 연극은 새로운 트렌드를 예고하고 있다. ‘연극 열전’, ‘감독, 무대로 오다’ 시리즈로 조금씩 연극으로 옮겨지는 연극 지형도가 ‘무대가 좋다’에서 못을 박는다. 나무액터스와 CJ엔터테인먼트, 악어 컴퍼니가 준비한 이 연극 페스티벌의 첫 번째 작품 <풀포 러브(Fool for Love)>의 출연진의 얼굴은 놀랍다. 김효진, 김정화, 한정수, 박건형, 조동혁. 영화와 브라운관, 뮤지컬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다섯 배우가 대학로의 소극장에 설 줄이야. 특히 연극은 배우의 모든 것을 원하는 예술. 9월 12일막이 내릴때까지 오로지 연극에만 모든 것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그들을 이곳에 데려다 놨다. 관객과 배우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맨 뒷자리에 앉더라도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각본가이며 연출자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한 샘 셰퍼드가 <풀포러브>를 썼을 때부터 이 작품은 문제작이었다. 이 작품을 ‘이복 남매간의 사랑’이라는, 단 한 줄로 요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건형은 거듭 강조했다. “수백 편의 논문이 있을 정도로 어렵고 난해한 작품입니다. 그만큼 많은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에요.” 15년간 사랑을 할 수도 없고, 헤어질 수도 없는 연인의 마지막 장면 같은 <풀포러브>. 감정의 진폭도, 서로 던지고 부딪히는 몸의 반동도 큰 작품은 배우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흡입한다. “무대에 서 있는 내내 격앙되어 있는 메이의 캐릭터에 두려움이 앞선 것도 사실이에요.” 김효진의 말이다. 하지만 오래된 연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익숙함,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그런 것을 그리움이나 다정함이 아닌 미움과 사랑으로 세밀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고. 김효진은 조동혁과, 김정화는 한정수와 박건형 모두와 무대에 오른다. 두 여배우와 세 남자배우는 각각의 개성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한눈에도 메이 역에 푹 빠진 것처럼 보이는 김효진의 메이는 절절하다. 어느 새 연극 무대에 서는 게 더 이상 어색해 보이지 않는 김정화의 메이는 노련하다. 한정수의 에디는 숨이 막히는 연극에서 종종 웃음으로 숨통을 틔워준다. 조동혁은 가장 교과서적이라<풀포 러브>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에디다. 박건형의 에디는 강하면서도 유들유들해서, 그 앞에 선 메이가 더 연약하게 느껴진다. <풀포러브>의 연습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수십 번을 본 스태프들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연습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극의 매력이기도 하고, 배우들의 매력이기도 하고, 작품의 매력이기도하다. ‘이복 남매’라는 설정은 사랑할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남녀 관계에 대한 극적인 은유다. 연극은 사랑에 대한 가장 밑바닥 감정을 끌어올리고, 배우들은 자신이 가진 가장 날것의 감정을 길어 올리느라 여념이 없다가 연극이 끝나고 나선 탈진하고 만다. 많은 사람이 이 연극을 힘들다고 표현한다. 마치 영화 <도그빌>처럼,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 치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의 기억쯤은 있다. 운이 좋다면 끝까지 손에 쥐고 살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묻어두고 살기도 한다. <풀포러브>는 끔찍하면서도 황홀했던 사랑의 기억이다. 에디는 소리친다. “너를 찾아 4,000km를 달려왔어!”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심장이 사막이 된 후다. 마지막 장면, 노인은 모자에 사막의 모래를 가득 담아 머리에 쓴다. 쏟아지는 모래알은 중력의 힘을 따라 제멋대로 낙하하던 중 조명에 부딪혀 순간 반짝한다. 사랑이라는 게 다 그렇다. 윤상의 오래된 노래처럼 ‘결국 모두가 흔한 사랑 얘기’라는 걸 알면서도, 극장에서 빠져 나오는 내 손이 바스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