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란, 영원히 깨지 않는 꿈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가상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살고, 관객들의 가슴속에서불멸의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배우들은 타인의 삶을 꿈꾸고, 관객들은 그녀들의 삶을 꿈꾼다. 20대부터 60대까지, 우리 시대대표 여배우들이 그들이 꿈꾸는 또 다른 여배우의 삶을 재연했다. 1980년대의 감성을 가득 품고 <플래시 댄스>의 제니퍼 빌즈가된 김민희, 부유층 여인의 욕망과 방황을 그린 영화 <세브린느>의 카트린 드뇌브로 분한 엄지원, <로마의 휴일>의 헤로인 오드리 헵번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채시라, 세실 비튼의 사진 속 그레타 가르보로 다시 태어난 김미숙, 삶의 희로애락을 자기만의 색깔로 표현한 윤소정.<얼루어>의 카메라 앞에서 위대한 여배우들은 나이를 잊었고, 변치 않는 아름다움은 세월을 잊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
Chae Si Ra

그녀가 오마주할 배우로 오드리 헵번을 선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촬영 당일, 메이크업을 끝낸 그녀가 검정 터틀넥 스웨터에 달라붙는 벨벳 팬츠를 입고 탈의실에 서 나왔을 때, 우리는 탄성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말로만 듣던 싱크로율 100%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너무나 똑같다며 감탄을 연발하는 우리에게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이 된‘ 오드리’가 말했다“. 사실은 어릴 때부터 오드리 헵번을 닮았다는 말을 몇 번 들었어요. 그래서 더 그녀를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요즘 집으로 유니세프 잡지가 배달되는데, 가끔 나이 든 헵번의 사진이 표지에 실릴 때가 있어요. 배우 생활을 접고 봉사 활동을 하던 시절의 모습인데 얼굴에 주름이 졌지만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죠. 그걸 보며 김태욱 씨가‘ 당신이 나이 들면 이런 모습일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해요. 여배우로서 그렇게 늙어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모든 면에서 대단하지만 그런 면에서 더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처럼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어요.” 그러면서 예전부터 꼭 한 번 오드리 헵번으로 변신해보고 싶었는데 오늘 멋진 스태프들 덕분에 소원을 이뤘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직접 표정과 포즈를 제안하고, 사진 톤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터틀넥 스웨터는 안느 퐁텐(Anne Fontaine). 진주 귀고리는 골든 듀(GoldenDew).

터틀넥 스웨터는 안느 퐁텐(Anne Fontaine). 진주 귀고리는 골든 듀(GoldenDew).

터틀넥 스웨터는 안느 퐁텐. 스키니 팬츠는 씨위(Siwy).플랫 슈즈는 본인 소장품.

터틀넥 스웨터는 안느 퐁텐. 스키니 팬츠는 씨위(Siwy).플랫 슈즈는 본인 소장품.

터틀넥 스웨터는 안느 퐁텐. 스커트는 레페토. 목걸이는 랑방 컬렉션(Lanvin Collection).

터틀넥 스웨터는 안느 퐁텐. 스커트는 레페토. 목걸이는 랑방 컬렉션(Lanvin Collection).

10대 시절 초콜릿 CF로 데뷔했던 소녀가 이제는 두 아이를 둔 40대 주부 연기자가 됐고, 그 옛날 통통하고 상큼했던 이미지는 사라지고 지금 그녀는 가냘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깡마른 중년의 여인이다. 하지만 뷰 파인더에 비친 채시라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채시라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는 삶을 택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 필요 없는 부분에 살이 찌고 필요한 부분은 살이 빠지는 게 여자들의 고민이죠. 저 역시 그런 고민이 찾아올 테고요. 하지만 당장 심각하지 않은 이상 닥치지 않은 일로 걱정하기보다 지금 상태를 잘 유지하고, 그날이 더디 오도록 관리하려고 해요.” 그녀의 긍정적인 성격과 현실에 충실하려는 태도는 외모뿐 아니라 일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분이 딱 10년만 젊었으면 좋겠다고, 그럼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들 이야기하시잖아요. 하지만 어느 나이가 돼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러니 지금이 10년 뒤의 내가 되고 싶어 했던 그때라고 생각하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을 때인 거죠. 무엇을 꿈꾸고 시작하더라도 늦지 않은 시기예요.”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꾼다.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을 만나 멋진 영화를 찍고 싶고, 해외영화제에 나가고도 싶고, 영화를 통해 국위 선양도 하고 싶다. 최근 작품의 여운을 털어 내기 위해 잠시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사극 배우의 이미지가 강했으니 이번에는 조금 경쾌한 현대물을 하고 싶다고. “제게는 배우가 운명이에요. 당연히 이 길로 올 수밖에 없는 걸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니까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은 날이 갈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 같아요.” 확신에 찬 그녀의 목소리에서 깊은 행복감이 묻어났다.

 

세실 비튼 사진 속의 여인, 그레타가르보
Kim Mee Sook

결혼해서 아쉬운 여배우 1위, 여자가 닮고 싶은 여자 1위, 함께 차 마시고 싶은 여자 1위. 50대의 김미숙은 아직도 동경의 정점에 서 있다. 시청자들에게, 관객들에게 그녀는 여전히 잘나가는 배우이고, 닮고 싶은 롤모델이며, 한 번쯤 마주하고픈 근사한 여자다. 브라운관 속의 그녀는 엄마나 아줌마가 아니라, 아직도 남자들의 시선을 받고 연하의 제자와 파격적인 사랑을 하는‘ 여자’로 출연한다. 20살 연하의 남자라니, 허구라곤 해도 과하다. 하지만 김미숙이니까, 사람들은 주홍글씨 대신 응원과 시청률로 화답한다. <찬란한 유산>, <바람 불어 좋은 날>, <이웃집 웬수> 등 50이 넘어 출연한 작품 속에서도 매번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했고, 모두‘ 대박’이 났다.
<얼루어> 화보 촬영장에 나타난 김미숙은 바쁜 드라마 일정에 쫓기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넘쳤다. 조용하고 까다로울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그녀는 소탈하고 솔직하며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쇼 프로그램 진행자처럼 능숙하게 좌중을 빨아들였고, 카메라 앞에서는 완벽한 눈빛 연기와 포즈로 경탄을 자아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50대라는 게 실감이 안 나요. 아마도 50대 초반이라서 그렇겠지만. 30대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어요. 소위 말하는 전성기였죠. 모든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고, 이상형이라고 말해줘서 고맙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아요. 결혼, 출산, 육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을 요즘 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감사하고요.” 일 욕심이 많아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계속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그녀. 지적인 느낌의 깊고 잔잔한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일으키는 마법을 지녔다.

 

블라우스는 리버티(Liberty). 귀고리는 마조키라(Majorica).

블라우스는 리버티(Liberty). 귀고리는 마조키라(Majorica).

블라우스는 퍼블리카(Publicka). 귀고리는 비바 셀(Viva Sell).

블라우스는 퍼블리카(Publicka). 귀고리는 비바 셀(Viva Sell).

206-211 we-never a chore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라디오 진행자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라디오 DJ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요. 어떻게 보면 라디오가 지금의 김미숙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죠. 제가 처음 DJ를 맡았을 때 많은 선배님은 연기자가 외도한다며 뭐라고 하셨지만,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었어요.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만 살다가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으니까요. 연기자로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표출할 수 있도록 내 욕구를 채워주었어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죠. 20년간 인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며 김미숙을 조각했다고나 할까요.” 지금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생의 황금기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하며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인생의 고민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50대의 여자는 그 어느 때보다 신체적 변화가 현격히 찾아오는 시기다. 어쩌면 여자로서 가장 위기를 느낄 수 있는 나이, 김미숙은‘ 지천명(知天命)’에 다가갔을까“. 글쎄요. 천명이 뭔지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50대는 가장 바쁜 나이예요. 심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건이 일어나거든요. 그렇게 닥친 변화를 극복하고, 고민하고, 알아가는 시기인 것 같아요. 소망이 있다면, 좋은 작품들을 통해서 관객들과 추억을 같이하면서 신뢰감을 주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나만의 뚜렷한 색깔과 이미지가 있어서‘ 김미숙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도 그녀만의 특색이 있어. 그녀가 출연한 작품이라면 왠지 믿음이 가’ 하고 평가받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최근의 추세로 볼 때 김미숙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관객의 신뢰는 꽤 오랫동안 유효할 듯하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관객들은 배우 김미숙이그레타 가르보처럼 훌쩍 떠나는 건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소정의 네 가지 얼굴
Yoon So Jung

 

니트 원피스는 제인 송(JainSong).

니트 원피스는 제인 송(JainSong).

주름 장식의 톱은 이상봉(Lie Sang Bong).

주름 장식의 톱은 이상봉(Lie Sang Bong).

“섹시하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상황에 따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죠. 과연 그게 칭찬일까? 난 잘 모르겠어요. 좀 위험할 수도 있는 말이거든.” 섹시한 입술의 배우는‘ 섹시하다’는 에디터의 말에 메이크업을 받으며 거울 앞에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섹시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칭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이 배우가 이다지도 섹시한 것을 어쩌랴. 나는 지금껏 이토록 관능적인 60대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윤소정이 연기한‘ 여자’는 다른 배우들의 그것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큼직한 이목구비와 카리스마 있는 눈빛, 고급스럽고 지적인 이미지는 동년배들이 주로 도맡아오던 동네 아낙이나 희생적인 어머니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녀는 좀 더 다양한 캐릭터를 맡을 수 있었고 다른 배우들이 하지 못했던 여자의 희로애락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어머니 역을 맡아도 윤소정은 엄마가 아닌 여자였고, 할머니 역을 맡아도 연애를 했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몸매를 가진 그녀는 외모 때문에 데뷔 시절 외국인 역할 전담 배우였다고 했다. “지금이야 외국 배우를 쓰지만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외국인 역할은 제 담당이었어요. 노란 가발을 쓰고 러시아 여자 역할도 하고 그랬죠. 한 번은 스페인에 갔을 때 스페인 사람이라고 저를 소개했더니 그대로 믿은 적도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는 엄마를 의심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를 쏙 빼닮았으니 뭐(웃음).” 그녀의 아버지는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고 윤봉춘 선생이다. 날 때부터 배우의 DNA를 갖고 태어난 탓에 솟아오르는 끼를 감출 수 없어 예술이나 창작과 관련한 일은 안 해본 게 없다. 배우가 되기 전에는 고전 무용을 했고, 결혼하고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태교 삼아 동양화를 배웠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20년간 함께 경영한 의상실은 인기가 좋아 문을 닫은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옷을 입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칠 정도다. 방송국에 헤어 메이크업 전문가가 거의 없던 시절 동료들의 메이크업은 언제나 그녀 차지였고, 강부자 씨 결혼식 때는 신부화장을 맡기도 했었다“. 저는 가만히 있는 걸 못 참는 사람이에요. 몸이 아파도 책을 보고, 멀쩡할 때는 서랍이라도 뒤집어서 안에 있는 물건들을 끄집어내죠. 오현경 씨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평생 윤소정 뒤치다꺼리 하며 산다”고(웃음). 남편은 이조시대 사람이라서, 내가 밖에서 연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절반 정도 밖에 못했죠. 그래도 하고 싶은 건 꼭 해요. 견딜 수가 없는 걸 어떡해. 무대 위가 좋고, 예술이 좋고, 내가 배우인 게 좋아요.” 최근 그녀는 노년기의 사랑을 그린 만화가 강풀 원작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촬영을 마쳤다. 올 하반기에 개봉되는 이 작품에서 그녀는 평생 제대로 된 이름도 가져본 적이 없는 송이뿐 할머니를 연기했다. 지금까지 맡았던 강한 캐릭터와는 꽤 다른 인물이다“. 나이가 드니까 잔잔한 게 좋아요. 젊었을 때는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는 옷은 입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조용히 묻히는 것도 좋더라고요. 60이 넘으니까 그게 달라지더라고.” 온화하게 웃는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옛날에는 그저 열심히만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연기를 즐겨요. 내가 즐겨야 관객도 즐긴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언제까지 연기를 할 거냐고 묻곤 해요. 그래서 얼마 전 시상식 때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무대 위에서 여자로 보일 때까지만 연극을 하겠다고.” 글쎄, 지금으로 봐선 배우 윤소정의 외출은 한동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터틀넥 스웨터는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 검정 팬츠는 자딕앤볼테르(Zadig-Et-Voltaire). 신발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터틀넥 스웨터는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 검정 팬츠는 자딕앤볼테르(Zadig-Et-Voltaire). 신발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검정 원피스는 보브(Vov). 하얀 가죽 목 장식은 제이미앤벨.

검정 원피스는 보브(Vov). 하얀 가죽 목 장식은 제이미앤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