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연예인이 아니라 배우였고, 잘 배운 연기자였으며,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순수 청년이었다. 드라마 <나쁜 남자> 촬영현장에서 발견한 진짜 김남길과 21시간에 걸쳐 숨가쁘게 진행된 현역으로서의 마지막 인터뷰.



조용히 지켜본 것 외에는 무엇 하나 보태준 게 없는데도,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마치 내 자식이라도 되는 양 흐뭇하고 대견했던 건, 숨은 진주를 알아본 스스로의 안목에 대한 쾌재였을 것이다. 내게 김남길은 오래전부터 주목해온 ‘나만의 폭등기대주’였고, 몰래 개척한 블루 오션이었으며, 비밀스러운 즐거움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중에겐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나타난 비담이라는 이름의 혜성이요, 이제야 겨우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은 낯선 얼굴이었다. 그러나 ‘왜 이제야 나타났니’를 숱하게 듣는 늦깎이 스타도 누군가에게는 신인 시절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고, 애초에 ‘언젠가는 무명이라는 자루를 찢고 나올 낭중지추’의 운명을 타고난 별나라 사람이었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준 <선덕여왕> 이후 오랜 섭외의 줄다리기 끝에 <나쁜 남자>라는 벼랑에서 김남길을 만났다. 군 입대를 앞두고 분초를 다퉈가며 맹렬히 촬영 중인 마지막 작품이었으니 그에게도, 나에게도 <나쁜 남자>는 벼랑 끝이었다. 파주 로케이션과 화성 세트를 오가며 ‘김남길’이라는 배우를, 사람을, 21시간에 걸쳐 지켜보고, 살펴보고, 들여다봤다. 실제로 마주한 그는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3년은 알고 지낸 듯 친근함을 느끼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고,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보다 120% 더 쾌활했다. 대기실에서는 아이폰과 책과 대본을 늘 끼고 다녔다. 촬영할 때는 NG를 거의 내지 않았고, 자신의 출연분이 없을 때도 스태프들을 격려하며 촬영장을 떠나지 않았다. 분위기가 처진다 싶을 때는 장난을 치거나 깨방정을 떨며 분위기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10년 이상 영화판 밥을 먹으며 숱한 배우를 지켜봐온,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사진가마저 그런 그를 보고 ‘저이는 연예인이 아니라 배우군요’라며 감탄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좋은 선배를 만나 차근차근 잘 배운 티가 났다. 인터뷰를 할때는 취재용 녹음기 앞에서 유쾌한 목소리로 길고도 정성 어리며 기특한 답변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21시간은, ‘배우’ 김남길의 단점을 찾아내기엔 너무나 짧았다. 서울로 돌아와 그의 이야기가 담긴 길고 긴 녹취를 풀면서, 소년처럼 빛나던 눈과 인터뷰 마디마디에 토해내던 순수한 열정을 되감아본다.





<아마존의 눈물> 내레이션이 꽤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맡게 됐는지?
<북극의 눈물>을 정말 감명 깊게 봤다. 혼자 집에서 TV를 보며 “북극곰이 먹이가 없대~” 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평소에 워낙 동물을 좋아해서 관련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편인데, 그 작품을 보고 환경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환경 파괴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이대로 가다가는 숨쉬기가 힘들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흔쾌히 내레이션을 맡게 됐다.

내레이션은 그 작품이 처음이었다고 하던데, 녹음할 때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일차적인 목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은 ‘사실’을 전달하더라도 성우의 목소리에 따라 다큐 전체의 감정 흐름이 좌우된다는 걸 많이 느꼈다. 그래서 <아마존의 눈물>을 하며 ‘장면에 목소리 톤을 맞춰서 연기하는 것처럼 대본을 읽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레이션이라는 게 생각 외로 많은 것이 요구되는 작업이더라. 광활한 들판이 펼쳐지는 장면에서는 벅찬 느낌으로 가야 한다거나 생태계가 파괴되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과 위험에 대한 경고를 확실히 전달해야 했다. 표정이 아니라 목소리만으로 느낌을 전달하는 게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생각보다 꽤 잘해서 놀랐다. 녹음할 때 분위기는 어땠나?
재미있게 녹음했다. 영상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작업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원시 부족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보고 깜짝 놀라 내레이션을 하다말고 “저거 진짜예요?” 하는 바람에 NG가 나서 스튜디오가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제목에 ‘눈물’이 들어가 슬픈 내용일 거라 생각했는데 즐거운 장면이 더 많았다. 녹음하면서 “이게 왜 ‘아마존의 눈물’이야?”라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이들의 생활터전이 없어져간다는 이야기로 결말이 흐르자 안타까운 마음이 깊어지더라. 그럴수록 목소리는 자제하려고 애썼다. 영상이 안타까운데 목소리까지 감정적으로 가면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존의 눈물> 이후로 환경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부분이 있나?
특정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일상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많이 착한 남자가 됐다. 담배 꽁초 하나도 길거리에 안 버린다든가, 물과 휴지를 아껴 쓴다든가. 예전에는 솔직히 남들이 안 보면 슬쩍 버리기도 했는데, <아마존의 눈물>이후 늘 스스로 경각심을 일깨우며 살게 됐다.

유난 떤다고 핀잔받은 적은 없었는지?
왜 없겠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누군가가 2층이나 3층을 누르면 “그 정도는 계단으로 가셔도 되는데”라고 소심하게 말했다가 “뭐야?” 하는 말을 듣고 냉큼 “죄송합니다!” 했던 적도 있다. 용기가 없다고해야 할지(웃음).



드라마 이야기를 좀 해보자. <나쁜 남자>를 통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원톱을 맡게 됐는데, 감회가 어떤가?
다음부턴 드라마에서 원톱은 안 하기로 결심했다(웃음). 원래는 <선덕여왕> 이후로 드라마를 자제하려고 했다. 시청률이 40~50% 나오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건 배우로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런 기회는 하늘이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드라마는 짧은 시간 동안 대본을 분석하면서 순발력 있게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원톱으로 나서기에는 아직 부담이 크다. 군대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영화를 찍고 입대하려고 했는데, 좋은 시나리오가 많았지만 아쉽게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나쁜 남자>는 캐릭터나 시기, 스태프 등 여러 가지 요소에서 최적화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주위에서는 내가 또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니까 “이제 영화계로 돌아올 때도 됐는데, 한 번 맛보더니 바람났어?” 하고 우스갯소리도 하더라.

원톱이라곤 해도 심건욱 분량이 너무 많던데 힘들지 않나?
몸이 힘든 부분은 <선덕여왕> 때 적응이 됐다. 그때는 분량이 적은 데도 촬영장에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했다. 워낙 촬영을 오래하다 보니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모든 출연진이 일주일 내내 스탠바이였다. 그보다는 너무 자주 등장해서 이미지를 소진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먼저다. 주연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주인공이 두 시간 내내 나오면 영화가 지루해지는데, 드라마는 더할 것 같다.

스태프들과는 잘 지내는지?
스태프들과는 잘 지내는 편이다. 하지만 감독님이나 프로듀서랑은 꼭 부딪히게 되더라. 작은 걸로 부딪히지는 않는다. 보통은 작품성이나 대본과 관련해서 싸운다. 스태프나 배우들이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거나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상황이 싫다.

듣다 보니 총대 메는 의리맨으로 해석되는데?
그래서 스태프들이 “이젠 너 그만 할 때도 됐다”며 말리기도 한다(웃음). 어떤 이들은 “<선덕여왕>으로 뜨더니 변했네” 하고 말하기도 하는데, 예전부터 나를 알던 사람들은 “쟤는 한결같다. 원래 싸가지가 없었다” 하고 내 편(?)을 들어준다.

아니, 주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러나?
늘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후회하지 않아>에서 비교적 일찍 주연을 했지만 그 뒤로 주연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큰 역할을 맡을 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연에 대한 욕심을 낼 수 없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보다는 좋은 선배들과 함께하면서 일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재영, 설경구 같은 선배를 만날 수 있었고 그런 분들과 현장에서 같이 숨쉬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다. 연기도 연기지만 주연배우로서 스태프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장 많이 배웠다. 주연이 되려면 첫번째로 대중과 관계자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겠지만, 동료 배우에게도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하고, 작품에 대한 책임감이나 스태프들의 노고까지다 헤아릴 수 있어야 영화 한 편을 온전히 끌고 갈 수 있다는 걸 누누이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다보니 나서서 부딪히고 싸우게 되더라.

늘 뭔가 배우려는 스타일인 거 같다.
기분 나쁜 이야기라도 옳은 말이면 빨리 흡수하고 수용하려 드는 편이다. 그러고보니 <모던보이> 때 감독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너는 영향을 잘 받는 스타일이라 좋은 배우와 좋은 스태프들과 작업을 많이 해야 너한테 좋을 거다”라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많은 것 같다. 좋은 스태프와 좋은 선배를 많이 만났다.

영향을 많이 받은 선배를 꼽는다면 누구일까?
연기 부분은 정재영 선배의 영향이 컸다. 촬영하다 “힘들어요” 하고 말하면 “매번 너한테 좋고, 너랑 맞을 수는 없다. 맞지 않더라도 그걸 잘 헤쳐나가야 한다. 결과적으로 욕을 먹든 칭찬을 먹든 모두 네가 가져가는 거다”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러면서 배운 게 영화배우는 핑계가 안 먹히는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연기에 대해 변명을 할 수가 없다. 스크린에 자막으로 ‘이 장면 찍을 때는 몸이 안 좋아서 연기가 이 정도밖에 안 됐음’ ‘이때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음’ 하고 띄울 수는 없지 않나. 연예인으로서 외적으로 대처하는 부분은 김혜수 선배가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것들을 배워가는 과정이 행복했다. 물론 지금도 배우는 입장이고.

이렇게 말을 잘하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인터뷰를 안 했나? 신비주의 작전이었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드라마 촬영을 하다 보니 스케줄에 쫓겨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원래 말하는 걸 좋아하고 기자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인터뷰 자체가 근황에 대해 알리는 부분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과 서로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하면 인터뷰어가 김남길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고 정말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질문을 하는 건지 느낌이 온다. 인터뷰할 때는 정말 즐겁게, 서로를 이해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간혹 내가 했던 말들이 왜곡 보도될 때는 정말 상처받는다. 그런 것만 없다면 언제든 인터뷰는 환영이다.

데뷔 초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지금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눈빛도 그렇고. 혹시 일부러 이미지를 계획한 건가?
내가 의도한 건 아니다. 아마도 한 살 한 살 나이 들어가면서 연기가 조금씩 늘고, 사회생활을 통해 경험이 축적되다 보니 그런 것들이 눈에 담기면서 다른 모습이 묻어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외모 부분을 말하자면 내 얼굴은 개성이 강한 얼굴이 아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어떻게 스타일링하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우로서 그런 부분이 고민이 됐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내가 눈에 안 띄는 얼굴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다른 배우들은 주연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눈에 딱 띄는데, 난 뒤에 서 있으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왜 그럴까 고민을 했다. 어리고 약해서인지, 연기에서 힘이 떨어지는 건지, 외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지. 한번은 내가 출연한영화 세 편이 동시에 개봉했는데 아무도 동일 인물인 줄 모르더라.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싶기도 하고, 이젠 인지도를 좀 쌓았나 했는데 여전히 몰라주니 서운하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서 차라리 캐릭터에 철저히 몰입하는 걸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면 관객들이 김남길이란 배우는 몰라도내가 맡았던 역할 정도는 기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앞으로 배우를 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름 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았다고나 할까(웃음).



경기도 화성 세트장에서의 김남길. 촬영 직전까지 대사를 외워야 할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촬영이 시작된 뒤에는 NG 한 번 내지 않았다. 는 , 를 연출한 이형민 감독의 2010년 야심작이다.

그동안 출연한 작품들은 장르도 그렇고, 흥행 성적도 그렇고 뭔가 일관 성이라는 게 없다.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이 대체 뭔가?
김선아 선배가 말한 것처럼 잘하는 걸 계속 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아직 그게 뭔지 찾지 못했다. 그래서 기존의 캐릭터에서 탈피한 새로운 인물을 찾게 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새로운 캐릭터를 하면서 작품이 어떤지도 따져봐야 하니 고민해야 할 부분이 또 생긴다. 가령, 예전에 10편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면 그중 대중성과는 별도로 두세 편은 정말 좋은 작품이다. 인지도가 좀 높아진 뒤 100편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치자. 그래도 좋은 시나리오는 똑같이 두세 편이다. 늘 좋은 작품은 한정돼 있다. 문제는, 내게 좋은 작품은 다른 배우들에게도 좋은 작품이라는 점이다.

머리는 왜 길렀나? 피부도 그을렸고. 물론 매우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미인도>를 찍다가 탔을 뿐인데 사람들이 나더러 태닝 좀 그만하라고 한다. 이제 다시 하얘질 때도 되지 않았냐며. 조만간 훈련소에 가면 더 까매질 텐데(웃음). 머리도 일부러 기른 건 아니다. 사극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르게 됐는데, 중후한 느낌이 들어서 그대로 놔뒀다. 어릴 때는 서른살 넘은 남자의 중후한 느낌이 너무 갖고 싶어서 일부러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때는 어설프고 안 어울렸는데, <모던보이> 제작발표회 때 처음으로 머리를 묶었더니 반응이 괜찮아서 유지했다.

<선덕여왕>에 출연하는 바람에 머리를 자를 겨를도 없지 않았나?
사실 처음에는 <선덕여왕> 출연을 많이 고민했었다. <미인도> 이후 사극이미지로 굳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동안은 사극을 안 하려고 했기때문이다. 그런데 ‘비담’이라는 이름이 묘하게 끌렸다. 다중적인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고,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는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점도 좋았다. <미인도>의 강무가 순수하고 해맑은 느낌이라면 비담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악한 기질이 자라면서 후천적으로 생긴 선한 기질과 충돌하는 부분을 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재미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이 작품만 하고 군대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어떻게 보면 비담은 그동안 내가 여러 편의 영화에서 조금씩 연기했던 캐릭터를 다 응집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연기할 수 있었다.

<나쁜 남자>의 건욱은 비담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로 보인다. 어떻게 차별화할 생각인지?
처음에 출연을 제의받았을 때 비담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사극에서 과장됐던 부분을 현대극에서 절제하며 깊이 있는 캐릭터로 이끌어내면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시청자들이 좋아했던 부분을 이어가면서 <선덕여왕>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들이 조금씩 나오기 때문에 비담과도 차별화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까지가 내 한계다. 그래서 실은 군대에 가게 돼서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배우로서 바닥을 드러낸 시점에 마침 군대를 가게 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핑계가 어디 있나. 2년 동안 연기 부분을 잠가두고 다른 부분에서 성숙해져서 더 좋은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을 만큼 다시 채운 다음 돌아오면 좋을 것 같다. 다시 복귀했을 때 내가 인간으로서 얼마나 깊어져 있을지, 어떤 작품 속에서 어떤 캐릭터로 태어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내게는 그 2년이 정말 중요하고, 그래서 밖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더 바쁜 나날이 될 것 같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공인이라는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우가 갖고 있는 파급 효과라는 게 있다. 소위 대중을 움직이는 힘이다. 인구가 1억도 안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힘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어린 친구들이나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좋은 배우이자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게 내 목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나와 뜻을같이하는 사람들과 한국 영화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을 차근차근 실천해나갈 생각이다.

<선덕여왕> 이후 배우로서 긍정적인 변화를 꼽는다면?
그간 영화 관계자분들이 “너는 연기는 그럭저럭 하는 편인데, 대중성이 없어서 네 이름으로는 영화 투자받는 데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는데,나도 그걸 알고 있어서 안 하고 못 했던 작품들이 꽤 있었다. 작품이 좋아도 투자가 안 되면 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러면서 참 아쉬웠던 게 소재의 다양성이었다. 할리우드에서는 규모를 떠나 다양한 작품이 쏟아지는데, 우리나라는 드라마든 영화든 결국엔 멜로로 흐른다. 전문직을 소재로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힘을 갖게 되면 소재의 다양성을 넓힐 수 있는 작품을 하겠노라고 다짐했었다. <선덕여왕> 이후 그꿈을 이룰 수 있는 출발선상에 왔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군대에 가기전에 나름 마무리를 잘했으니 앞으로는 뛰는 일만 남았다.

할리우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일본에서도 꽤 인기가 많아진 걸로 아는데.
나는 할리우드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한국에서나 똑바로 하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과 일본 영화가 아시아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고, 글로벌화된 시점에서 굳이 말도 안 통하는 데서 연기할 필요가 뭐가 있나. 연기라는 건 말이 통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나라, 그 시대,그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적확한 감성을 전달할 수가 없다. 흔한 말이긴 해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미국에 가서 미국 3대 영화사사장들과 이야기도 해봤지만, 그들은 아시아인에게 멜로 주연을 호락호락하게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할리우드의 B급 영화나 액션 영화에 출연하는 것보다 우리 영화를 잘 만들어서 그들이 우리를 찾아오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지금도 훌륭하게 진출한 분들이 있지만 막연히 할리우드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할리우드 진출을 좀 더장고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영어 공부할 시간에 연기 공부 더 하고, 우리 영화에 대해 더 고민하고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납골당 로케이션. 이날 김남길은 소각장에서 죽은 선영의 유품을 태우는 장면을 촬영했다. 감정신이라 굉장한 집중을 요하는 촬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남길은 감독의 ‘컷’ 소리가 끝나자마자 현장의 스태프들을 챙기는 등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