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겨울 음식이었다고 해도, 냉면을 위한, 냉면에 의한, 냉면을 향한 계절은 여름이다. 하지만 ‘냉면’ 은 대체 무엇일까? 차갑다고 해도 비빔국수를 냉면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이유는 뭐지? 냉면가닥처럼 길고 긴 냉면의 취향과 자격을 둘러싼 설왕설래.



“이건 냉면이 아니야!” 부모님과 처음 이북음식 집에 갔던 날, 내 앞에 놓인 냉면을 한입 먹고 이렇게 외친 기억이 난다. 함흥냉면에 길들여진 어린 입맛에는 이건 결코 냉면일 수 없었다. 심심하고 밍밍하고 무엇보다 쫄깃하지도 않고, 소면처럼 부드럽지도 않고, 칼국수처럼 호로록한 맛도 없이 거칠게 툭툭 끊기는 면이 제일 이상했다. 그게 나와 평양냉면의 첫 만남이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게 평양냉면이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평양냉면, 그건 인생의 맛이거든. 원래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밍밍해. 첫 맛으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거든. 백석 시집처럼 말이야.”

모든 냉면이 시작된 계절 꿩과 동치미를 섞어 만든 맑은 육수. 면 위에 달걀과 편육, 오이와 무채를 소박하게 올리고 살짝 고춧가루를 쳤다. 젓가락으로 설렁설렁 저어도 면이 잘 풀어진다. 심심한 듯하지만 질리지 않고, 코끝에 스치는 메밀 향이 산뜻하다. 여기에 제육 반 접시를 시켜신김치를 얹어 먹으면 최고다. 이 평양냉면이야말로 냉면의 원형이다. 냉면이 겨울이 긴 이북에서 메밀로 면을 뽑아, 살살 언 동치미 국물을 부어 먹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건 상식이다. 이열치열, 여름에는 뜨거운 것을 먹고 겨울에는 찬 것을 먹어야 몸이 건강하다는 조상의 지혜를 들먹이는 사람도 있지만, 냉면이 겨울 음식이 된 건 냉장고도 뭣도 없던 그 시절, 냉면 육수가 겨울밖에 차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정답 아닐까. 실제로 20세기 초반 냉장고가 보급되며 사계절 음식이 되었다. 냉면은 생각보다 더 오래된 음식이다. 17세기 문장가 장유가 쓴 냉면찬가는 처음으로 문헌에 ‘냉면’ 을 남겼다. ‘노을 빛 영롱한 자줏빛 육수에, 옥 가루 눈꽃이 고루 담겼구나, 입안에 넣으니 향기롭고, 몸에 냉기가 감겨 옷을 껴입는다, 나그네 시름은 이제 사라지노라’. ‘냉면집 문턱 권세가 대단하다’ 는 18세기 기록을 보면, 예부터 우리 민족이 냉면을 엄청 좋아하긴 했던 모양이다. 학자 홍석모가 남긴 <동국세시기>에는 지금의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옛 모습이 담겨 있다. ‘겨울철에 메밀국수를 김치 국물을 섞어 말고 돼지고기를 얹은 냉면’ 이란 대목은 평양냉면‘, 온갖 채소와 배, 고기, 간장을 국수와 섞어 비빈 골동면’ 은 지금의 함흥냉면의 모태다. 또 그는 ‘관서지방의 냉면이 가장 맛있다’ 고도 했는데 관서지방은 현재의 평양 일대를 말하니, 대세는 평양냉면이었던 모양이다. 고종 황제도 야식으로 이 평양냉면을 즐겼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라이벌전 20세기 초, 냉면은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좋아하던 지금의 파스타 같은 음식이 된다. 평양냉면이 곧 냉면의 모든 것이었던 때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실향민들이 대거 서울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끝났다. 피난민들은 메밀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던 녹말로 면을 만들어 가자미회 무침을 얹어 비벼 먹었다. 불안정한 사회와 스트레스 때문에 맵고 질긴‘ 함흥식’이 더 입에 맞았다는 분석도 있는데, 그 때부터 함흥냉면의 비약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평양냉면은 우래옥, 을지면옥, 평양면옥, 필동면옥, 함흥냉면은 흥남집, 오장동 함흥냉면, 신창면옥, 강산면옥이 특히 유명했다.혈연과 지연을 기반으로 전국으로 뻗어나간 이들은 지금도 냉면계를 지배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평양냉면집에서 비빔냉면을, 함흥냉면집에서는 물냉면을 팔게 되었지만 여전히 평양냉면집에서는 비빔냉면을 잘 먹지 않는다.

함흥냉면의 승승장구 함흥냉면의 맛은 풍요롭다. 자리에 앉으면 쇠고기를 푹 고아 만든 육수를 주전자째 식탁에 턱 올라온다. 회냉면은 꼬독꼬독하게 뼈가 씹히는 가자미회무침을 듬뿍 올리고, 비빔냉면은 간 쇠고기가 넉넉히 들어 있다. 잘 비벼서 입에 넣으면 가늘고 쫄깃한 면이 경쾌하게 입안을 휘젓는다. 무뚝뚝한 평양식과 달리 애교가 있다. 이처럼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냉면’ 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공통점이 없다. 가장 큰 차이는 면이다. 평양냉면이 메밀면을 쓰고, 메밀 함량으로 고급과 저급을 가린다면 함흥냉면은 고구마 전분으로 만들어 질깃질깃하다. 그래서 평양냉면은 육수 대신 따끈한 면 삶은 물을 내주고,함흥냉면 집에서는 고기육수를 내주는 것이다. 다만 전분을 사용하는 함흥냉면은 맛을 규격화하고 저장하는 데 훨씬 유리했다. 함흥냉면이 승승장구하며 대중적 기반을 닦는 사이 평양냉면은 같은 맛을 지켜내며 특히 이북 출신의 실향민에게는 진정한 소울 푸드가 되었다. 멋을 낸 할아버지들이 혼자서 냉면을 잡숫는 풍경은 그래서 가끔은 슬프다.

내 입맛이 최고예요 희소성 때문인지 평양냉면을 즐기는 사람들은 더 까다롭다. 을밀대 마니아는 을밀대만 가고, 필동면옥, 평양면옥도 그렇다. 가끔 불고기 때문에 우래옥에서 바람을 피울 때도, 서로 자기 취향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포섭하려 한다. 뒤늦게 평양냉면에 눈뜬 나는 필동은 이래서 맛있고, 평양면옥은 저래서 맛있다는 양비론을 펼치는데, 그런 나도 평양냉면의 맛에 눈뜨게 해준‘ 평래옥’에 마음이 간다. 평래옥은 이름난 평양냉면 집 중에서 비교적 고기 맛이 강한 육수를 쓰고, 육수를 빼고 건진 닭살을 새콤하게 무쳐 함께 내줘 그중 가장 대중적이라는 평을 듣는 집. 명동 중앙시네마 건너편에 있다가 재개발에 밀려 사라진 평래옥이 2년 만에, 드디어 다시 문을 열었다. 평래옥을 좋아하던 할아버지들은 어서 돌아오세요.



중국냉면의 아성 평양냉면 마니아와 함흥냉면 마니아가 서로 우리 냉면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동안, 그 틈을 타 중국냉면과 메밀국수도 당당히 냉면으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에는 중국냉면이 없다는 설도 있지만 팔선의 장금승 셰프의 말은 다르다. 산시성, 허남성 등 차가운 면요리가 지방마다 있다는 것이다. 신라호텔의 중식당 ‘팔선’ 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 냉면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중국냉면이 인기를 끌면서 흔해
지긴 했지만, 시판용 냉면육수에 중국식 고명을 얹고, 땅콩잼을 뿌린 것에 불과하다. 반면 팔선은 직접 만든 땅콩소스는 물론 토종닭과 양지를 6시간 푹 우려내 만든 육수를 쓰는데, 맑고 개운해서 고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좋아한다. 밀가루로 만드는 면도 쫀득거리면서도 뻣뻣하지 않도록 좀 더 부드럽게 반죽하고, 해삼과 새우, 해파리 등 해산물 고명을 올리는데 마지막에 올리는 ‘가죽 나물’ 고명이 맛을 완성한다. “첫봄 전라도에서 나는 가죽 나물의 새순을 염장해 1년 동안 숙성시킨 것입니다. 살짝 싱겁게 만든 육수에 이것으로 간을 맞춥니다. 같이 일했던 셰프들도 정확한 비법은 모릅니다.” 장금승 셰프의 말이다. 너무 차가우면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얼음 없이 차게 식힌 육수만을 부어 내는 팔선의 단아한 중국냉면. 먹을 때마다 육수를‘ 원샷’하게 되는 건 결코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 아니라 남기고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냉면의 인기는 변종 ‘짬뽕냉면’ 으로 이어졌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입맛을 따라 생긴 일종의 퓨전 냉면인 셈인데, 맛이 궁금하다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짬뽕냉면을 개발했다는 역삼동 ‘마담 밍’ 에 가볼 것. 아찔하게 매운 육수와 쫄깃한 면, 그 위에 오이채와 무순, 해파리를 가득 올리고 새우, 어린 갑오징어를 더했다. 어찌나 중독성이 있는지, 먹을 때마다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매운데도 종종 찾아가서 먹는다. ‘덜 맵게’ 를 주문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눈물이 고이는 건 막을 수 없다.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고요? 냉면이라고 불리지 않아도 냉면이 될 수 있는 사례는 메밀국수가 증명한다. 메밀국수는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이 20세기에 등장한 화학조미료에 오염되는 동안, 순수성을 지켜서 살아 남았다. 이 무렵, 냉면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긴 시인 김남천은 이렇게탄식했다. “시골 외에는 순수한 메밀로 만드는 국수가 매우 드물다. 국숫발이 질기고 끊어지지 않는 것은 녹말가루를 섞는 탓이라고 한다. 이것이 어디 냉면과 친척 간이나 되겠는가!” 표준어 개정 전까지‘ 모밀’로 불리던 메밀을 얼마나 넣었냐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메밀 함량이 높을수록 촉감은 거칠지만 향이 좋다. 국수가 거칠고 툭툭 끊기는 식감이 아니라 쫀쫀한 맛을 낸다면 메밀만큼, 어쩌면 그 이상 밀가루가 들어간 것이다. 메밀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요즘은 다시 메밀 함량이 높은 메밀국수가 주목받고 있는데, 신사동에 위치한 ‘멧돌소바’ 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메밀 100% 함량의 국수를 먹을 수 있다. 매장 앞에 거대한 멧돌식 제분기를 두고, 그때그때 갈아 만든 신선한 메밀로 만들어 향이 좋다. 육수는 다시마와 멸치를 베이스로 한 한국식과 가쓰오부시로 만든 일본식 중에서 고를 수 있다. 냉면 마니아라면 한번쯤 메밀가루가 냉면으로 변신하는 모습도 궁금하지 않을까? 웨스틴 조선호텔 일식당 ‘스시조’ 의 ‘라이브 소바’ 는 언제 봐도 신통방통하다. 여름 시즌 주말에만 선보이는‘ 라이브 소바’는 손
님이 보는 앞에서 직접 메밀을 반죽하고 썰어서 면을 만들어 제공하는 메뉴다. 정갈한 나무 도마 위에, 셰프가 봉평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8대 2로 섞은 ‘니하찌 소바’ 를 연한 녹색이 날 때까지 반죽하고 써는 동안 옆의 다른 셰프는 스시조의 자랑인 꽃처럼 예쁜 스시를 쥐어준다. “우동과 달리 향으로 먹는 소바는 숙성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만드는 데 20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대신 그날의 날씨에 따라 반죽할 때는 물 네 번에 나누어서 넣습니다. 메밀의 향은 금방 날아가기 때문에 재빨리 먹어야 해요.” 스시조 한석원 셰프의 조언이다. 그 말처럼 눈앞에서 갓 만들어낸 면의 맛은 기막히다. 일본 에도식 육수는 우리나라보다 좀 더 짠 편인데, 면 끝만 살짝 담가 먹는 게 일본 자루 소바의 방식“. 일본에서는 국수를 다 먹고 남은 육수에 소바 삶은 물을 부어서 다 마셔요.” 진짜 메밀 국수를 만들어야 나오는 이 소바 삶은 물을 주는 곳은 너무나도 적다. 기회가 된다면 꼭 시도해보길.

세상의 모든 냉면주의자를 위하여 단지 차가운 면이라는 이유로는 ‘냉면’ 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쫄면도 콩국수도 냉면일 테니까. 하지만 냉면을 대표하는 함흥냉면과 평양냉면도 역시 따지고 보면 닮은 점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냉면이고 어떤 것이 냉면이 아닌가? 김치찌개 맛이 다 다르다는 건 인정하면서, 냉면에 대해서 더 까다롭게 구는 이유는 뭘까? 김치찌개가 가정식이라면, 냉면은 17세기 선비들이 기생을 끼고 놀던 시절부터 모던 걸의 시대, 장발족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싸지 않으면서도 혀끝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별식’ 이기 때문이 아닐까. 늘 먹던 것이 아니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 그것이 우리가 냉면을 사랑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올여름, 당신이 찾아 갈 냉면집은 어디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