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1등을 하는 ‘핑크’에게 묻는다. 어떻게 공부했니? 대답은 한결같다. 기존의 핑크 교과서 중심으로 매 시즌 다양한 톤과 텍스처를 변형해서 ‘나만의 새로운 핑크’를 만들어냈어요. 그런 제가 이번 시험에 적어낸 답은 ‘가벼움’이에요.



에디터는 핑크가 좋다. 엄밀히 말하자면 좋아졌다. 크리스마스 아침, 분홍색 롱드레스를 입은 ‘라라 인형’(그 당시 엄마는 바비 인형의 존재를 모르셨다)과 삼단의 문이 열리면 내부 집기가 온통 핑크색인 ‘미미의 집’이 머리맡에 있었을 때도, 햇살 끝내주는 날 배우 유승호처럼 예쁜 남자아이가 얼핏 봐도 스페셜 에디션인 크림 핑크색 클래식 스쿠터에서 내리는 것을 처음 봤을 때도,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의 노란 바나나 CD를 떼어내면 핑크색 바나나 알맹이를 마주한다는 사실을 목격했을 때도 별 감흥은 없었다. ‘그에게 핑크는 세상을 향한 조롱일까? 에로의 가치를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일까? 그냥 자극적인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지금에 솔직해지라는 일침일까?’ 하고 생각할 뿐,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핑크에 대한 이렇듯 삐딱한 취향이 선호로 바뀐 건 고백컨대 순전히 화장품 때문이었다. 뷰티 에디터가되고서 매 시즌 봄이 되면 쏟아져 나오는 핑크 섀도, 핑크 블러셔, 핑크립스틱의 물결을 촬영하고, 매장에 나오지도 않은 따끈따끈한 신제품의 ‘핑크 아가들’을 테스트하는 일은, 고달픈 삶 속에서 진통제처럼 잠시나마 행복감을 맛보게 해주었고 더불어 말랑말랑 예쁜 마음마저 들게 만들었다. 물론, 그 순간만!

사진들을 보면서 눈치 챘겠지만 몇 시즌 전, 구찌 쇼에서의 미니멀한 원피스가 딱 그러했듯이 지금은 파스텔 핑크 혹은 라이트 핑크라고 불리는 ‘가벼운 핑크’의 시즌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핑크 아이템’ 하면 핫 핑크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푸시아 핑크, 벽돌 핑크, 인디언 핑크, 체리핑크, 코랄 핑크를 거쳐 다시 파스텔 핑크로 돌아왔다.

파리의 런웨이는 어김없이 이를 증명했다. “칼 라거펠트와 나는 메이크업을 굉장히 아름답게 표현하기로 했어요. 그가 산호빛 볼을 원했고,과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소녀 같은 입술을 바랐기 때문이죠.” 칼 라거펠트 쇼의 백스테이지에서 메이크업에 열중하던 엠마뉴엘 사만티노는 입술에 닿는 순간 녹아버릴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핑크 립스틱을 묻힌브러시를 든 채, 모델의 입술을 응시하면서 콘셉트를 묻는 에디터의 질문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뉴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마크 바이 마크제이콥스 쇼에서 핑크컬러를 선택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딕 페이지역시 유독 눈에 띄었던 핑크 의상 콘셉트에 조력하는 데 충실했다. “만화에서 나올 법한 입술색이죠? 굉장히 날렵하게 그려졌고, 펑키한 핑크컬러가 의상과 잘 어울리지 않나요?” 그런가하면 엷은 핑크와 핫 핑크를 입술 위아래로 반반씩 나누어 메이크업한 팻 맥그래스는 그녀만의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윗입술에는 립스틱을, 아랫입술에는 글로스를 택한 감각이 그것이었다.



가볍고 모던해진 핑크의 변신
일본에 출장 다니는 아빠나 친척을 둔 친구들, 혹은 간혹 변태(!)로 오인받는 소수 마니아 어른층만 탐닉하던 1970년대생 ‘헬로 키티’가 대한민국으로도 건너와 카시트며 운전대 커버에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친구들의 파우치와 백 속에는하다못해 핑크색의 키티 손거울이라도 들어 있었고, 그만큼 그 컬러는 소녀뿐 아니라 다 큰 처자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더 지나 그 키티는 불과 몇 개월 전 ‘맥’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또 한번 폭풍 같은 인기를 구가하며 그 위력을 과시했다. 아무래도 핑크와 가장 가까운 브랜드는 단연 맥이다. 가끔 용감하게 한국 여자들 앞에‘푸시아 핑크’ 같은 컬러의 립스틱을 내놓는 걸 마주할 때면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이 내 품절되는 사태를 어김없이 목격하면서 한국 여자들의 핑크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끼곤 한다. 맥은‘엔젤’이라는 크리미 핑크 립스틱 하나로 톱 셀러를 기록했으면서도 계속되는 여전히 핑크 사랑을 전파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번 시즌 맥과 전설적인 리조트 브랜드릴리 풀리처와의 만남을 핑크로 푼 신제품 립젤리가 이를 증명한다. 이 핑크 계열 립글라스들은 가벼운 질감과 투명함으로 핑크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고 있다.

바통을 이어받은 브랜드는 슈에무라. 슈에무라의 핑크 립스틱은 한국시장에서 모델 이혜영의 덕을 톡톡히 봤다. 품절사태를 빚은 핫 핑크 립스틱에 탄력을 받은 슈에무라는 이번 시즌 루즈 언리미티드 수프림샤인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다채로운 핑크컬러를 선보이고 있다. 메이블린은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가수‘서인영’의 이름을 딴 컬러인 인영 핑크, 핑크 코랄, 핑크, 핑크 푸시아 등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많은 핑크컬러의 립글로스를 론칭했다. 핑크 색 입술의 향연에 동참한 라네즈 스노우 크리스탈 인텐스 립스틱 오나 먼트 핑크도 이번 시즌에 주목할 만한 아이템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파스텔 핑크 립스틱을 고르는 것은 올봄 트렌드세터로서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상위권에 진입하기를 원하는 수험생을 위해 에디터는 샤넬레 티사쥬 드 샤넬의 트위드 로즈 섭틸 컬러를 포함한 이번 시즌의 달콤한 핑크 블러셔들을 추천한다. 1970년대 느낌을 풍기면서도 가벼운 블렌딩 기법을 선보인 니콜 파히 쇼에서의 마키나, 지워진 듯한 컬러 연출로 파스텔 분위기에 충실했던 리처드 니콜쇼의 샘 브라이언트의 영향 때문일까? 글로벌 트렌드와는 별개로 한국형 핑크 붐이 섀도와 블러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나탈리 레테와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부르조아의 랑데부 아 파리 컬렉션 중 로즈 도르 컬러나, 파스텔 핑크 파우더가새틴 글로스왁스와 만나 우아한 느낌을 주는 끌레드뽀 보떼 옹브르 꿀뢰르 솔로 중 114번, 핑크색 벚꽃을 연상시키는 겔랑 블러쉬 에끌라 체리 블러섬 컬러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랑데부 아 파리 로즈 도르 컬러 아이섀도는 부드러운 파리지엔의 감성이 느껴지는 컬러로 자연스럽게 혈색 있는 건강한 피부톤을 표현한다. 겨우내 창백했던 얼굴에 생기를 되찾아줄 아이템이다.

이제는 아무도 ‘핑크’를 좌파경제학자를 뜻하는 단어로 떠올리지도 않을 뿐더러 ‘핑크 리더십’라는 신조어를 통해 핑크의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다.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처럼 방 안을 온통 핑크로 물들이는 것은 물론 가전제품까지 핑크를 고집한다 한들 공주라고 비난받을 일도 없다. 별 관심 없이 친구 따라 들른 사주카페에서 핑크가 애정운을 불러오니 어쩌구 하는 말이라도 들은 날에 인터넷 숍에서 핑크색 동전 지갑이라도 찾게 되는 자신을 독려해도 좋다. 그리고 지난 시즌의 딸기 우윳빛 립스틱이라는 공식에서 약간은 자유를 얻은 따근따끈한 핑크 립스틱을 둘러보라. 여력이 된다면 블러셔와 네일 래커까지. 지금, ‘에지’라는 무게를 덜어낸 가벼워진 핑크는 ‘내추럴’이라는 가장 세련된 트렌드에까지 도달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