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즌, 이미 한차례 불황의 한파를 겪어낸 밀란 패션위크는 상업적인 패션 도시답게 빠르게 활기와 안정을 되찾았다. 컬렉션 전반에 깔린 ‘자연주의’ 감성은 쇼, 그 이상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24TH September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밀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 시즌, 경기 불황으로 저스트 카발리 쇼가 이틀 전에 돌연 취소되고, 지안 프랑코 페레는 쇼 직후 법정 관리에 들어가는 등 안타까운 소식이 이어지지 않았나! 다행히도 이번 시즌 밀란패션위크 일정표는 빽빽이 채워져 있었고, 도시 분위기도 염려했던 것보다 활기찼다. 오전 11시 30분, 첫 쇼는 블루걸. 런웨이 한쪽 벽면에 그려진 커다란 꽃 한 송이가 쇼의 콘셉트를 알려주는 동시에 밀란 컬렉션에 대한 이제까지의 우려를 기분 좋게 날려주었다. 서정적인 첼로 선율이 울려 퍼지고, 드디어 밀란에서의 첫 쇼가 시작되었다. 연한 핑크색 시폰 블라우스에 유연한 실루엣의 새틴 하이웨이스트 팬츠를 입은 모델이 사뿐사뿐 런웨이를 걸어 나왔고, 무대 위는 점점 강렬한 컬러 팔레트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산뜻한 오렌지색의 호피무늬 점프슈트, 박수 갈채를 받은‘I Love You’가 새겨진 수영복, 만개한 꽃송이를 엮어 만든 붉은색 원피스, 피날레를 장식한 깜찍한 미니 웨딩드레스까지! 화사하기 그지없는 블루걸의 컬렉션을보고 있노라니 ‘봄처녀 제 오시네~’ 입안에서 흥겨운 노랫말이 맴돈다. 엔딩 곡으로‘맘마미아’가 흐르는 가운데 각양각색 헤어밴드와 붉은색으로 입술을 치장한 모델들이 걸어 나오는 피날레까지 쇼의 흥을 돋웠다.

다음 쇼는 안토니오 마라스. 지난 시즌피카소의 도라 마르 초상화에서 영감 받아 남성적인 룩을 선보였던 그는 이번 시즌, 대반전을 펼쳐 보였다. 마카롱을 닮은 달콤한 컬러들을 수놓은 레이스 소재의 향연! 런웨이를 채운 수줍은(발그레한 치크 메이크업으로 그 느낌을 더욱 강조했다) 소녀들은 레이어드 룩을 통해 로맨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이번 컬렉션 중 최고의 엔딩 장면으로 꼽히는 피날레. 창고처럼 닫혀 있던문이 열리면서 레이스가 달린 풍선 베개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쇼장 이리저리를 둥실둥실 떠다닌 레이스 베개와 그 속을 걷는 모델들,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압권이었다. 환상적인 피날레의 여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삐 다음 쇼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지난 시즌 갑작스럽게 쇼를 취소하고 프레젠테이션으로 대신했던 터라이번 시즌, 저스트 카발리 쇼에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프레스와 바이어들의 반짝이는 눈초리는 날카로운 스모키 아이 메이크업에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모델로 향했다. 절개를 많이 사용한 재단과 해진 소재, 티셔츠 위에 덧입은 브라 등 반항적인 느낌을 강조한 그런지 룩이 메인 테마. 보다 밝고 건강한 컴백을 원했던 탓일까? 브랜드의 경제 사정이라도 반영하는 듯 약간은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져 다소 아쉬웠던 쇼! 3개의 쇼가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 터라 여유로웠던 오전 시간이 끝나고 조르지오 아르마니 쇼를 보기 위해 부리나케 이동했다. 밀란에 가면 꼭 가보고 싶었던 아르마니의 전용 극장.푹신한 흰색 소파에 앉아 있으니,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에게도 이런 예술적인 소통의 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심 부러워진다. 암전이 되고, 모델의 워킹을 좇는 조명이 켜졌다. 노장 디자이너가 이번 시즌 새로운 돌파구로 선택한 것은 ‘커팅’. 날카로운 에지가 살아 있는 앞섶과 헴라인 등의 기하학적인 커팅은 퍼플, 다크 그린, 블루 등의 고급스러운 색감과 어우러져 쿠튀르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은 킬 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유일한 쇼였다는 것! 모델들은 플랫슈즈를 신고 한결 편안한 워킹을 선보였지만, 프로포션이 짧아 보이는 숙명은 피해갈 수 없었다.

카우보이 걸로 분한 D&G 모델들의 힘찬 워킹으로 다시 신나는 쇼가 시작되었다. 근사한 워싱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유감 없이 보여준 듀오 디자이너의 데님 컬렉션에 먼저 박수를! 쇼츠, 와이셔츠, 롤업 팬츠, 점프슈트까지 다양한 워싱의 데님 아이템과 여기에 믹스된 아일릿 러플 스커트, 미키마우스 티셔츠, 웨스턴 부츠와 가죽 복서 쇼츠 등은 모조리 사랑스러웠고, 제대로 웨어러블했다. 호텔에 도착한 인비테이션카드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모스키노 칩앤시크의 종이 꽃 선글라스를 들고 다음 쇼장으로 고고! 핑크색 하트 프레임의 앙증맞은 런웨이를 보는 순간, 로셀라 자르디니가 이번 시즌엔 또 어떤 위트를 버무려낼지 기대됐다. 프레임 속으로 마네킹처럼 등장한 첫 모델은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데이지꽃 모자를 쓰고 있었고, 이 꽃 모티프는 모자에 이어 선글라스, 다양한 프린트 의상들에서 흥미롭게 등장했다.

1960년대 복고무드를 중심으로, 색동 티어드 스커트와 ‘PEACE‘ , ‘EVE’ 등의 글자를 넣은 프린트 티셔츠, 핑크색 아일릿의상들이 젊고 발랄한 리조트 룩을 완성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쇼이자 하이라이트 쇼,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쇼인 프라다 컬렉션을 만날 차례다. 브랜드의 파워를 증명하듯 프라다 쇼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쇼장으로 들어서자 샹들리에와 바로크양식의 건물들이 뒤섞인 그림 벽면이 마치 영화 세트처럼 세워져 있고, 깜빡이는 빔 조명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온 듯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올이 풀린 듯한끝 처리의 쇼츠에 한 치의 오차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테일러링의 스프링 코트를 입은 모델이 런웨이를 걷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미우치아 프라다는 바로크무드가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리조트 룩에 승부수를 건 듯 보였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올이 풀린 듯한 자연스러운 끝 처리, 샹들리에를 연상시키는 시원한 크리스털장식(다소 무거워 보였던!)과 PVC 소재 액세서리들, 완벽한 테일러링, 그리고 끝까지 시선을 뺏지 않는 모델들의 뒤태(옷 뒷면의 디자인을 감상하는재미가 남달랐다)! 상큼한 오렌지빛 입술이야말로 프라다 컬렉션의 유일한 컬러 포인트였다. 실험적인 동시에 실용적이기도 했던 프라다 컬렉션을 보고 나온 기자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확연히 나뉘었다. 하지만 다음 날, 모든 타블로이드 신문의 1면을 채운 건 역시 프라다 쇼였다!

25TH September 빅쇼가 무려 일곱 개나 있었던 어제의 살인적인 스케줄 덕분에 오늘은 동선을 잘 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 역시 일곱 개의 쇼를 봐야 하고, 거기다 리시(Re-see, 쇼룸에서 보다 가까이뉴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에 몇몇 프레젠테이션까지 줄줄이 잡혀 있기 때문. 다행인건, 어제 본 쇼들이 대부분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자, 블루마린 쇼부터 다시 시작해볼까? 기대와는 달리, 지난 시즌 다채로운 호피무늬로 신선한 글램 룩을 선보였던 안나 몰리나리 여사의감각이 한 발 퇴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양한 컬러의 홀치기 염색으로 완성한 트로피컬 룩. 문제는 옷부터 가방, 신발까지 모조리 홀치기 염색 패턴을 선택한 것에 있었다. 샤넬 이만이 입은 밝은 브라운 계열의 카디건과 튜브톱 미니 드레스의 룩처럼, 무척 근사했던 스타일링마저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첫 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준 건 스포트 막스였다.‘ 막스마라 컬렉션의 스포티브 버전’이라는 브랜드 콘셉트에 딱 맞는 실용적인 의상들이 완성한 시크 젯셋 룩은 생명력이 넘쳤다. 특히 스트링 처리로 벌룬 헴라인을 만들거나 마치 어깨에 걸치고 있는 것처럼 눈속임으로 디자인된 소매, 금사를 섞어 광택을 살린 소재 등으로 완벽한 ‘트랜스포머’를 선보인 트렌치코트들은 스포트 막스의 최강 볼거리였다. 반가운 얼굴,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를 유일하게 만날 수 있었던 에르마노 셀비노 쇼는 지극히 밀란 컬렉션다웠다. 적당한 트렌드믹스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장식, 고급스럽고 다양한 소재의 등장! 이들의 조화는 중세적인 뉘앙스를 담은 레이디룩을 탄생시켰다. 다소 밋밋했던 오전 쇼들을 감상한 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그 와중에도‘ 부디, 오후의 쇼들은 보다 흥미진진하기를, 패션에 대한 열정에 불씨를 당겨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1시, 평소 섬세하고 우아한 컬렉션으로 에디터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알베르타 페레티의 쇼다.오간자 원피스에 크로셰 니트 에이프런을 두르고, 리넨 모자를 쓴 첫 모델을 보자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시그너처 실루엣이라 할 수 있는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무드는 이번 시즌 한층 강력해졌다. 한들한들 춤추는 오간자와 노방,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스루 소재의 리조트 룩은 순수함으로 빛났고, 쇼장에는 금세 시원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음 쇼는 피아자 베트라 1번지에서 열리는 6시 베르사체 쇼. 그때까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심하던 중, 명품 거리 몬테나폴레오네로 향했다. 즐비한 명품 숍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거리 곳곳에 전시된 특별한 패키지의 코카콜라 병. 이탈리아 코카콜라가 밀란 패션위크 기간 동안선보이는 리미티드 에디션이였다. 에트로, 펜디, 블루마린, 베르사체, 모스키노 등 8명의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특별한 패키지를 제작했고 판매 수익금은 지진으로 고통 받는 아크르츠 지방의 자선 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패션 위크의 즐거움이 이런 거 아니겠는가! 그 의미만큼이나 근사한 콜라병들은 밀란의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 곳곳을 누빈 후 베르사체 쇼장으로 향했다.

메탈릭한 퓨처리즘 드레스의 절정을 선사한이번 시즌 베르사체는 평소 그녀의 화려한 글램 룩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에디터조차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몸의 곡선 라인을 부드럽게 드러내는 실루엣, 파스텔 계열의 컬러 믹스앤매치, 가죽 펀칭 소재, 비대칭 헴라인, 시퀸 장식들이 어우러진 짧고 긴 다양한 베르사체식 드레스는 ‘몸매만 된다면….’ 여자의 본능을 자극시켰다. 특히 모델 나타샤 폴리가 입은 삼각형의 핑크 시퀸 패턴이 스티치로 엮인 미니드레스는 10점 만점에 10점!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베르사체에 이어 다음은 오늘 빅쇼, 질 샌더가 기다리고 있었다. 벽면, 창문, 바닥 등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질샌더의 런웨이. 쇼 시작 전,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이번 컬렉션의 테마를 설명하는 듯한 영상물이 켜졌다. 사막 한가운데를 전라로 나뒹구는 커플, 콘크리트 건물 벽면을 동그랗게 오려내는 작업 등을 보여준 영상물은 현대의 삭막함을 모조리 부수고,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꿈을 담은 듯했다. 끝을 손으로 찢은 듯한 초대장을 다시 꺼내보니 그의미가 더 명확해졌다. 라프 시몬스가 옷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자연으로의 회귀’였다. 부스스하게 풀어 내린 머리, 창백한 메이크업, 올이 풀리거나 찢어진 오간자와 리넨. 그렇지만 절대 초라하거나 심심하지 않은 옷이 완성된 이유는 눈을 뗄 수 없었던 신비로운 디테일과 입체적인 재단 덕분이었다.

건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아웃포켓을 단 재킷, 내면의 본질을 밖으로 꺼낸 듯한 러플 장식의 원피스, 만들다 만 듯한 니트 메시 드레스 등 예술성이 돋보이는 컬렉션이 줄을 이었다. 예술적이면서도 동시에 충분히 입을 수 있는 옷, 역시 라프 시몬스였다! 쇼가 끝난 후, 한국프레스들 사이에서는 “최고였어!”가 연발했고,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파리의 화려한 포퍼먼스도, 뉴욕의 생기 넘치는 실용미도 부럽지 않았다. 여기는 밀란이다. 장인들이 살아 숨쉬는 곳, 그리고 그들의 정신이 밴 완벽한 디테일을 만날 수 있는 쇼, 쇼, 쇼!

26TH September 오전 9시, 밀란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보테가 베네타의 쇼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VIP 고객들로 보이는 그녀들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브랜드의 이미지와 참 닮아 있었다. 쇼는 어땠을까? 목가적인 느낌을 그토록 세련되게 풀어낼 수 있다니! 토마스 마이어의 위상은 시즌을 더할수록 높아진다. 캔버스를 메인으로 라피아, 가죽, 면, 시폰 등의 소재가 화이트, 아이보리, 오키드 등의 산뜻한 컬러와 만났고, 비대칭의 과장된 실루엣이 포인트로 활용되었다. 흰색 머리띠와 스트로 웨지힐 슈즈, 그리고 다채로운 소재들로 엮인 새로운 위빙 백을 챙겨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오늘은 시작이 좋군!’ 가벼운 발걸음을 막스 마라 쇼장으로 재촉했다.

스포트 막스보다 더 세련된 막스마라표 밀리터리 룩. 특히 맥시 길이의 트렌치코트와 오렌지색 플리츠 드레스는 시선을 압도했다. 아쉬운 점은 메이크업. 얼굴 윤곽부터 볼까지 어두운 음영을 주고, T존은 하이라이터로 반짝임을 살린 모델의 얼굴을 시크한 옷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심지어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차분한 쇼가 연속으로 이어지자, 슬슬 화려한 세트의 무대를 보고 싶다는 갈망이 인다. 다음은 로베르토 카발리 쇼. 유럽 상류층의 뒤뜰 정원을 옮겨온 듯한 화려한 세트가 ‘고맙게도!’ 런웨이에 펼쳐져 있다. 다들 이번 시즌 대폭 축소된 무대 세트가 아쉬웠는지, 쇼 시작 전 세트를 구경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쇼는 역시 예상했던 대로 아름드리 피어난 꽃무늬 의상들로 채워졌다. 테일러드 슈트에 꽃무늬 시폰 드레스를 매치하는 식의 반전은 있긴 했지만! 레이어드 포인트가 많아 집중력은 다소 떨어진 쇼였지만, 카발리가 애니멀 패턴에 작별을 고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캄캄한 쇼장 밖을 나오니, 비 갠 도시가 내뿜는 기분 좋은 상쾌함이 느껴진다. 잠시의 짬을 이용해 프레젠테이션 현장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이국적인 사파리 룩을 선보인 발리, 몽고의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 사진전과 ‘베이비 캐시미어’의 의상들로 찬사를 받은 로로 피아나, 아름다운 저택에서 진행된 토즈 컬렉션,이탈리아 가죽의 퀼리티를 제대로 보여준 훌라의 가방과 신발까지! 쇼 못지않게 컨셉추얼한 밀란의 프레젠테이션은 역시 남달랐고, 바삐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다음 장소인 모스키노 쇼장으로 이동했다.

먹음직스러운 체리는 이번 시즌 모스키노의 시그너처 패턴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커다란 링 귀고리와 머리 장식, 손에 쥔 가방들까지(쇼에 등장한 모든 가방은 모델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여전히 키치한 쇼였다. 다음은 구찌 쇼. 영화 〈툼 레이더〉의 여전사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퓨처리즘과 시크한 스포티즘이 조화를 이룬 이번 시즌 구찌. 프리다 지아니니가 과거 톰 포드 시절을 재현이라도 한 것일까?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상 곳곳에는 톰 포드의 색깔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구찌의 골수팬들은 반가워했고, 새로운 쇼를 원했던 이들은 아쉬워했다. 과거의 날렵하고 섹시한 구찌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커다란 거미줄이 달린듯한 저지 실크 소재의 롱 슬릿 드레스와 스키니 레깅스, 레이스업과 지퍼 장식의 재킷, 스쿠버 룩을 연상시키는 보디슈트 등 대만족이었다. 매튜 윌리엄슨으로부터 바통을이어받은 피터 던다스가 두 번째로 선보이는 에밀리오 푸치 쇼 또한 기대를 모았다. 지난 시즌‘푸치가 젊어졌다!’ 는 찬사로 푸치 입성에 성공한 피터 던다스는이번 시즌 역시 과감한 커팅의 수영복과 비치 드레스들로 젊음의 열정과 패기를 마음껏 펼쳐 보였다.

다음은 밀란에 오기 전부터 꼭 챙겨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마우리치오 페코라로의 쇼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시즌 국내 론칭으로 처음 접하게 된 이 브랜드는 고급스러운 소재감과 흉내 낼 수 없는 디테일로 에디터의 마음을 앗아갔었다. 쇼장은 프라이빗한 아틀리에처럼 꾸며져있었다. 이번 시즌 테마는 리비에라 비치에서 영감받은 1950~60년대의 에코 룩. 로맨틱한 시폰 플라워와 메시, 프린지 등 기교 넘치는 장식이 완성한 소재감은 기대 이상으로 근사했다.

27TH September 밀란에서의 지난 3일을 돌아보니, 정말 살인적인 스케줄의 나날이었다. 쇼 보고 이동하고, 또 쇼 보고 이동하고…. 오늘은 쇼도 쇼지만, 밀란 이곳저곳을 걷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생겨난다.최소한 두오모 광장의 비둘기라도 보고 와야 할 것 같다. 어찌됐건 또 마르니 쇼장에 와 있다. 마르니 옷을 챙겨 입고 온 게스트들을 보니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한때 나 역시도 마르니의 멋에 매료된적이 있다. 이국적인 패턴을 활용한 젊고 유머러스한 감각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몇 시즌 비슷비슷한 컬렉션들이 이어지더니 이내 식상하게 느껴졌다. 오늘의 쇼에서는 새로운 마르니를 만날 수 있기를고대하며! 신나는 음악과 함께 런웨이에 조명이 켜졌다. 스트라이프와 도트 무늬의 파자마 룩으로 문을 연 컬렉션은 경쾌한 플라워 룩으로 마무리되었다. 콘수엘라 카스틸리오니 역시 자연을 모티프로한 컬렉션에 심혈을 기울인 듯 보였다. 하지만 모델들의 머리에 두른 초록빛 두건과 자연을 테마로 만든 커다란 귀고리, 다양한 스트랩 슈즈 등의 조화는 다소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은 펜디 쇼. 지난 시즌 중세풍의우먼 파워를 느끼게 했던 컬렉션에 대한 흔적은 요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드럽게 흐르는 볼륨감, 미묘한 레이어링, 과장되게 풀어진 레이스, 투명한 튤, 워싱된 실크, 롱 앤 린 실루엣으로 완성한 초절정 로맨티시즘! 펜디는 극적인 변신을 꾀하는 데 성공했다. 돌체 앤 가바나는 정열적인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투우사를 연상시키는 블랙 슈트, 붉은색의 플라멩코 드레스, 곳곳에 매치된 레이스와 프린지 장식, 피날레를 장식한 코르셋 물결까지, 모든 것이 강렬했다. 붉은 입술과 그윽한 눈매, 자연스러운 업스타일 헤어도 마음에 쏙 들었다. 에트로 쇼는 결론부터 말해 고루했다. 블랙 페이즐리 패턴의 실크 가운 정도만이 기억에 남을 뿐. 오히려 쇼장에서 선물로 나눠준 페이즐리 패턴 쿠션과 콜라병이 더 흥미로웠다면 베로니카 에트로가 서운해하려나?

살바토레 페라가모 쇼에서는 하이엔드적인 아프리칸 무드를 만났다. 토가 형태의 원시적인 프린트 원피스와 엠보싱으로 처리한 가죽 코트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원래 보기로 계획했던 쇼의 일정이 끝났음에도 2% 부족한 이 느낌은 뭘까! 요즘 밀란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아퀼라노 리몬디의 컬렉션으로 그 부족함을 달래보기로 결정했다. 토마소 아퀼라노와 로베르토 리몬디, 이 듀오 디자이너는지안 프랑코 페레를 이끄는 동시에 개인 쇼도 함께 진행하고 있을 만큼 소위말해 떴다! 물론 미리 받은 티켓은 없었다. 〈얼루어〉 명함 하나로 어떻게든해보기로 결심했고, 결과는 입장 성공. 그들은 이번 시즌 모네의 그림에서 패턴 모티프를 따왔고, 가우디의 건축적인 실루엣을 빌려왔다. 건축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컬렉션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화려한 프린트들과 쿠튀르적 디테일로 황홀경을 선사했다. 상업성은 떨어져도 예술성 하나만은 박수 받을 만했다. 아직 덜 다듬어져 더 신선했던, 앞으로 더 성장할 일만 남은 이 듀오디자이너 덕분에 밀란에서의 행복한 나흘째 밤을 맞을 수 있었다.

28TH September 밀란에서의 마지막 날. 디스퀘어드2의 쇼 하나만 남겨둔 상태다. 지난 시즌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들의 모습을 재현한 쇼로 객석을 즐겁게했던 그들이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있는 시추에이션을 펼칠까? 호기심을 가득 안고 들어선 쇼장은 숲 속의 캠핑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 장난꾸러기 쌍둥이 같으니라고!’ 마지막 쇼를 유쾌함으로 장식해줄 것만 같은 두 디자이너, 딘과 댄에게 탱큐를 날렸다.다양한 컬러의 모자와 안경, PVC 소재의 원피스와 백팩, 벌과 나비 모티프의 패턴과 브로치들, 컬러풀한 카고 팬츠와 다채로운 쇼츠 등 풍성한 아웃도어 룩이 쇼장을 경쾌하게 물들였다. ‘과연 저걸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기발함을 담은 그들의 모험이 그저 반가웠다.